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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Feb 26. 2021

균열의 순간

예술이 일상을 헤집고 들어올 때

문학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다자이 오사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거장. 그 자신의 작품처럼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작가. 아마 이름을 듣는 순간 <인간실격>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인간실격>과 함께 가장 유명한 또 다른 그의 작품인 <사양>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귀족 집안의 딸인 가즈코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가세가 빠르게 몰락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시골로 이사하고 전쟁에 참여했던 남동생 나오지가 돌아온다. 이후 어머니가 병에 걸리고 나오지가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전락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그리고 끝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오지는 자살한다. 가즈코는 나오지의 후견인인 우에하라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에게 임신했다는 사실을 편지로 쓰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소설을 읽는 중 내게 푼크툼처럼 갑작스럽게 다가왔던 순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가즈코는 유부남인 우에하라에게 그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말할 것도 없이 불륜이다. 그런데 가즈코 본인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편지에 이런 내용을 써놓는다. 


“만약 이런 편지를 조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자가 살아가는 노력을 조소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목숨을 조소하는 사람입니다”(번역본은 민음사 판본을 따랐다). 


이건 단순한 호소가 아니다. 이 문장 안에는 가즈코의 엄청난 결단이 숨어있다. 어떤 결단? 도덕을 포기하고 윤리를 선택하는 순간. 나는 여기서 도덕과 윤리에 대한 긴 논의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가즈코의 선택은 분명 도덕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선택이다. “간음하지 말라”라는 도덕의 명령은 생존이라는 윤리 앞에서 힘을 잃게 된다. <사양>이 고통스럽게 읽히는 이유는 단순하게 그녀가 끊임없이 전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가즈코의 이러한 윤리적 선택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에 따르자면) 절대적 고독과 마주하는 선택. 가즈코는 자신의 이러한 선택을 한번도 되돌리지 않는다. 그녀는 우에하라의 아이를 임신한 후에도 그 아이를 키우겠다는 결심을 우에하라에게 편지로 쓴다. 이 윤리의식에 동의할 수 있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이 순간은 문학을 넘어 예술이 세계와 마주하는, 동시에 세계의 통념을 돌파하면서 세계를 낯설게 느끼도록 만드는, (카프카의 말대로) 얼어붙은 바다가 도끼에 깨지는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영화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다. 도덕 앞에서 인물의 윤리적 선택을 끝까지 지켜보는 영화들. 당장 떠오르는 예시. 끌로드 샤브롤의 <여자 이야기>,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 이창동의 <시>. 그리고 내가 놓친 여러 영화들. 이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인물들의 숭고함만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거대한 통념에 대하여 균열을 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들의 절대적인 고독이다. 세계를 낯설게 마주한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 바깥에 자리하도록 만드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렇기에 위대한 예술을 보는 것 역시 불편함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충만함으로 바꾸는 것이 곧 걸작의 힘이다. 굳이 윤리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세계를 낯설게 감각하도록 만드는 영화들은 많이 있다. 이를테면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 어쩌면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 낯선 순간들을 나에게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재인식하게 만드는 영화에 큰 관심이 없다. 일상에 가해지는 작은 균열. 삶의 권태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낯선 체험. 사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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