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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Mar 19. 2021

극장의 존재론

우리는 왜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할까?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사실 언젠가는 꼭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주제 자체가 주는 무게감과 나 자신의 여전히 부족한 지식 수준과 경험을 알고 있기에 계속해서 미루기만 하다가 글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말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서 내가 하는 말은 한없이 부족하고도 좁은 견해에 불과할 것이나 누군가 이 글을 읽은 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나의 글은 충분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작년 이맘때쯤 혹은 조금 전, 그러니까 한국에서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바로 직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샘 멘데스의 <1917>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갔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많은 관객들이 남긴 평에는 대략 “왜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영화”라는 식의 평이 많이 올라왔다. <1917>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내내 단 하나 혹은 두 개의 쇼트만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도록)시키는 로저 디킨스의 유려한 촬영은 분명 영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분명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 촬영에 매혹되지 않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 그리고 극장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졌다. 정말 영화가 스크린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만 같은 인상. 마치 영화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917>을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는 특유의 시간성이라는 점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코필드라는 인물이 체감하는 고유의 시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은 영웅이 견뎌야 하는 시간을 관객이 체험할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 곧 이 화려한 촬영의 명분이다. 시간성. 사실 이것은 굳이 <1917>이 아니더라도 극장이 가지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이다. 극장에서는 오직 영화만이 허락된다. 휴대폰을 보거나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는 것은 엄청난 민폐이고 화장실은 시작 전이나 끝난 후에 가는 것인 예의이다. 거기다 (코로나 이전 시기에도)멀티플랙스가 아닌 독립예술영화관에서는 음식물 섭취 또한 제한된다. 그러면서 관객들이 영화가 부여하는 고유의 시간성을 온전히 체화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1917>은 그 시간성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너희가 극장 아니면 이런 체험을 어디서 해 볼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듯이. 하지만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거만함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1917>에서 촬영만이 아닌 다른 요소들을 통해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보이는 것도 사실이나 이 자리는 <1917>을 리뷰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보류하기로 하자). 여기서 나의 의문이 시작된다. 과연 영화의 시간성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까? 물론 극장이 영화를 관람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를 관람하는 것 이외에 모든 행위는 금지되고 스크린과 사운드는 영화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영화 감독들도 이를 고려하여 영화를 제작한다. 분명히 집에서 관람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과연 그것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 있어서 핵심이냐는 것이다. 그냥 생각나는 예시. 나는 아직까지 3D 영화나 4D, 혹은 아이맥스 영화를 관람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결국 이러한 영화들도 영화의 물성과 시간성에 더욱 몰입하기 위한 극장의 상업적 수단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이러한 방식들로 관람한다고 해서 그 영화의 가치가 더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3D나 4D 영화를 통해 감상하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더 생생하다고 해서 독립영화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의 미학적 가치는 결국 연출과 각본, 편집이나 촬영 등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상투적인 한 마디. 좋은 영화는 극장 바깥을 나갔을 때 비로서 시작한다. 만약 영화가 극장에서 끝나는 순간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세상과 동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극장만을 위해 존재하는 영화는 극장 안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본다면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분명 일리 있는 주장이다. 다른 방해 요소가 없다면 영화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그렇다면 같은 관람이라도 다른 장소에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요소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론. 영화에서 무엇을 찾느냐는 환경의 문제 이전에 개인의 관점의 문제가 우선 아닌가? 한 개인이 한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는지는 그 개인이 가진 가치관과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설사 극장 관람이 디테일한 부분들을 포착하는 면에서는 더 유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해당 작품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바꾸지는 않는다. 결국 어디서 보는지 이전에 누가,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  번째 질문. 그렇다면 극장 관람이 영화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있는가?  같은 영화라도 스마트폰 화면으로 관람하는 것과 모니터 화면으로 관람하는 , 그리고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영화적 체험이   있는가? 아마도 최근, 특히 코로나 시국 이후 재개봉 영화가 많아지면서 이미    영화라도 다시 극장에서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리마스터링 하여 재개봉하는 왕가위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왕가위 영화들에 대한 평가 자체는 이미 그의 영화를  사람들을 통해 널리 퍼져있다. 그렇다면 이미 왕가위 영화를  사람이라도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다시 관람한다면 전혀 다른 영화적 체험으로 다가올  있을까? 누군가는 이미 나의 대답을 추측할  있을 것이다. 조금은 애석하게도 나는 아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당연히 누군가는 여기에 대해서 반박할 것이고 이에 대해 나는 얼마든지 환영한다. 다만 그저 나의 좁은 견해를 피력하자면 어떤 방식으로 관람하 영화의 내용은 변함이 없다. 졸작은 극장에서 관람해도 여전히 졸작이고 걸작은 자그마한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더라도 변함없는 걸작이다. 그건 종이책으로 읽든 전자책으로 읽든 책의 내용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유사하다. 아주 개인적인 예시. 나는 지금껏 나에게 영화적인 충만함을 주었던 걸작들의 대부분을 극장이 아닌 모니터 화면으로 감상했다(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들의 힘은 충분히 피부에 와닿았다. 만약 오직 극장에서만 온전한 영화적 체험을 가져갈  있다면 그건 너무나도 폐쇄적인 경험이고 시네필들은 그만큼 폐쇄적인 집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극장 이전에 영화를 소비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사실은 언제나 극장을 방문한다. 나는 지금 극장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극장만이 줄 수 있는 영화적 체험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극장을 사랑하고 찾아간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집에서 관람하는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왜 극장을 찾아야 하는가? 이렇게 대답해보자. 나는 극장이 신작 영화가 개봉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찾아간다. 단순히 새로운 영화를 빨리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작 영화에 한해서)극장은 영화가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공간이다. 이때 이 영화에는 어떤 순수성이 묻어난다. 관객과 비평의 언어가 때묻지 않은 순수함. 여기서 반론. 그런 순수함은 극장이 아니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분명 맞는 말이다. 쉽지는 않지만 어떤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 없이 관람할 수만 있다면 집에서도 그런 순수함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작 영화에는 이를 뛰어넘는 또 다른 순수성이 존재한다. 영화의 시대성. 아무리 못 만든 영화라도 그 안에는 그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공기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건 우리가 여러 걸작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측면이다. 극장의 아우라가 있다면 이 공기가 만들어내는 시대성일 것이다. 현재의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현재성. 기획전에서 느낄 수 있는 한 시대 혹은 감독의 아우라. 영화제에서 접하게 되는 낯선 공기. 이건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분산되어 있는 인터넷이나 다른 플랫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취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우리가 극장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진정한 영화적 체험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재를 마주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어떤 극장의 가치는 어떤 시설을 갖추고 있는지가 아닌 어떤 영화들을 상영하는지에 달려있다. 나쁜 영화가 많다면 그 시대가 나쁘다는 의미이고 마찬가지로 나쁜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극장도 나쁜 극장이 되기 마련이다. 독립예술영화관이 소중한 이유는 극장의 시설 자체가 아닌 상영하는 영화들의 가치 때문이다. 나쁜 영화들이 범람하는 상황 속에서도 좋은 영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 내가 극장을 찾는 것은 이 공기와 아우라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답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만약 그것이 극장의 존재 이유라면 그것을 다른 플랫폼이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당장 지금도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에서는 자신들의 오리지널 영화나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그런 경향이 지속될 때 극장은, 영화는, 그리고 이를 보는 우리는 어떻게 바뀔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미루어야 할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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