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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May 11. 2021

비평의 존재론

왜 비평이 필요한가

어린 시절, 아직 영화도 비평도 제대로 접하기 이전에는 ‘비평가’라는 직업이 뭔지 전혀 몰랐다. 정확히는 그런 직업 자체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내가 비평의 존재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지는 사실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비평의 자리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서투르고 무모한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있는 한, 어떤 이유에서든 비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근본적으로 질문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여기서는 내가 서있는(혹은 서고자 하는) 자리, 비평의 자리가 갖는 의미와 존재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처음 비평을 접했을 때 비평이란 평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점을 통해 처음 비평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이다. 영화(를 포함한 예술과 사회 현상)에 점수를 매기고 평가하는 사람들. 어찌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평가가 없다면 가치판단 역시 없다. 문제는 무엇을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때까지 내가 생각하는 평가는 좋음과 나쁨,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 질문이 거기서 멈춘다면 비평은 단지 추천의 영역에 불과할 것이고 그 이상의 소비는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방식 역시 깊이를 가지기 어렵다(물론 나는 추천 역시 비평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비평가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를 최대한 많이 추천하는 일 아닌가). 아마 비평가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의 원인이라면 비평을 평가의 영역에 한정하는 사고 때문일 것이다. 


비평을 더 많이 경험한 후, 그러니까 단순히 별점 등이 아닌 글과 말을 통한 비평을 접한 후 비평이란 해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담고 있는 숨은 의미를 찾고 설명해주는 일. 이때부터 영화를 보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고 편집과 미장센의 역할을 알게 되며 영화에는 단순히 스토리를 넘어서는 의미 체계와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다 영화와 비평의 역사, 그리고 여러 이론들을 접하면서 영화를 바라보는 더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해석이 가능해야 비로소 더 정확한 평가도 가능하다. 우리가 비평을 소비하는 가장 큰 이유도 비평가가 영화를 해석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비평이 해석에서 멈춘다면 그건 예술가의 본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그렇게 되면 비평의 자리는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작품 안에 숨겨진 의미가 궁금하면 비평가가 아닌 예술가 본인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그러한 본연의 의도가 있음에도 비평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무엇이 비평을 근원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가? 


정성일의 가르침. 영화를 비평하는 것은 영화 자체가 아닌 영화를 마주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내가 그 영화에서 무엇을 봤는지, 내가 본 것은 과연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질문하는 작업. 그렇기에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각 개인에게 전혀 다른 의미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비평은 결국 “나”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경험한 삶,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믿는 신념. 그 모든 것들이 영화와 만났을 때 나타나는 상호작용을 사유하는 것이 영화 비평의 작업이다. 그럴 때 비로소 비평이 예술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된다. 예술이란 예술가 본인이 마주한 세계를 매체 안에 어떻게 구현하는가로부터 출발한다. 이럴 때 비평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은 예술가 본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예술을 보는 것은 세계의 일부를 마주하는 것인 동시에 그 세계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태도를 마주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영화 비평은 영화 속에 구현된 세계와 태도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본 나는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이를 창조한 예술가의 태도에 동의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자리이다. 


그러니 모든 비평은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비평은 존재할 수 없다. 그건 예술에서 절대적인 걸작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걸작이라는 칭호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판단은 개인의 몫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영화에서 보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언어를 통해 설득시키는 것이다(취향과 설득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은 곧 비평가 본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선언하는 것이자 이를 보는 우리를 설득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어떤 비평이 어떤 영화를 옹호한다면 그것은 그 영화에 나타난 예술가의 미학적, 윤리적, 혹은 정치적 태도와 방식을 지지한다는 의미이고 반대로 그 영화를 비판한다면 그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그런 상황에서 비평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자신이 가지는 태도를 세상에 설득시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나는 예술이란 하나의 거울과 같다고 보는 사람이다. 거울은 대상을 비출 수는 있지만 세계 전체를 비출 수는 없다(물론 이건 라캉이 제시한 거울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예술가는 그 거울 안에 자신이 바라본 세계와 대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추는 사람이다. 비평은 그 거울에 비친 상에서 보고 느낀 것을 언어의 거울을 통해 다시 한번 비추는 일이다. 예술과 비평의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이 마주한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거울은 카메라가 될 수도, 그림이 될 수도, 종이와 펜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 예술가와 비평가 모두 자신의 거울 안에 담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보고 느끼며 배우게 된다. 온전하지 않더라도 어렴풋이. 따라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란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제목 중 하나를 인용해서 말하자면)”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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