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영화는 계속된다
*지난 번에 쓴 <극장의 존재론>의 연장선상에 놓인, 그때와 같은 질문을 다른 관점으로, 더 세밀하게 다가가기를 시도한 글입니다. 지난 글을 읽으시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안 읽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1. 모두가 영화의 위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거의 항상 그 뒤에 한 가지 수식이 덧붙여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영화 산업의 위기이다’. 이 이상한 문구. 혹시 이건 현재의 위기를 부정하고자 하는 몸부림일까? 하지만 엄밀히 말했을 때 저 문장은 분명 맞는 말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영화의 위기’라는 문장과 ‘영화 산업의 위기’라는 문장이 사실상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는 점이다. 이때 동치되는 것은 물론 ‘영화’와 ‘영화 산업’이다. 마치 ‘영화 산업’이 ‘영화’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듯한 구조. 한 걸음 더 뒤로 가보자. 영화 산업의 중심은 무엇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극장. 그러니 영화 산업은 극장 산업으로 번역되어도 충분하다. 결국 동일시되는 단어는 ‘영화’와 ‘극장’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 논리를 비약으로 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날 영화와 극장의 상관관계가 갖는 의미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지를 질문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 산업의 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모두가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코로나19라는 변수의 등장. 이건 영화 산업이 그동안 겪었던 식의 변화, 기술의 변화도, 자본의 변화도 아니다. 이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는 일은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관객도, 영화도 극장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극장의 부재에 따른 공백을 대체하기 위한 움직임이 영화와 관객 양쪽에서 나타났다. 그것이 곧 OTT 시대를 열었다. 물론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산업의 움직임은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이 산업은 무언가 영화 산업, 더 정확히는 극장 산업과는 분리된, 혹은 영화 산업에 부산물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미 봉준호의 <옥자>등을 기점으로 OTT와 영화에 대한 담론이 일정 부분 제기되었으나 그것이 극장에 대한 지위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 상황을 코로나는 완전히 역전시켰다. 이제 영화와 이를 보는 우리는 그 중심을 점차 옮겨갔다. 하나의 변수가 만들어낸 또 다른 변수. 두 가지 변수의 총합이 자아낸 위기. 나는 이 두 가지 변수 중 코로나19라는 변수를 잠시 뒤로 물린 뒤 OTT라는 변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질문할 생각이다. 반문할 수도 있다. 왜 작금의 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인 코로나19라는 변수를 제외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건 현재의 팬데믹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언제 종식될지, 과연 종식이 될 수는 있을지, 종식이 된 후 코로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 등 수많은 요소들이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코로나라는 변수는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내제하고 있다. 하지만 OTT라는 변수는 그에 비하면 분명 더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 머물러 있다. 모두가 인정했던 사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극장의 위기는 찾아왔을 것이다. 다만 코로나가 이 위기를 앞당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이전 이 위기를 우리에게 가져오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물론 OTT 산업. 이 미래는 언젠가 우리에게 도달할 예정이었다. 결국 도착할 미래. 영화 산업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그 미래가 현재에 도착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볼 것인가? 혹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2. 잠시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 모두가 아는 시작. 1895년 파리의 그랑 카페.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이라는 아주 짧은, 지금의 관점으로는 영화라고 하기도 애매한 영화를 처음 상영한다. 우리는 이것을 영화의 시작이라고 일컫는다. 왜 이것이 시작이라고 불리는가? 뤼미에르 형제 이전 혹은 비슷한 시기 수많은 발명가들이 뤼미에르 형제와 유사한 영상 기기를 만들고자 했고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게다가 뤼미에르 형제보다 일찍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다(대표적으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그러니 단순하게 활동 사진, 즉 영상 이미지를 최초로 상영했다는 점이 아닌 다른 차이점, 뤼미에르 형제가 가장 먼저 선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예컨대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와 키네토스코프의 차이.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관객 한 명이 기계 안에 설치된 영사기를 홀로 감상하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영사기가 같은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은 철저하게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는 극장 안에 설치된 스크린에 영사하는 형태를 택했다. 결정적인 차이. 키네토스코프는 홀로 관람하지만 시네마토그라프는 함께 관람한다. 역사는 뤼미에르 형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엇을 보고? 물론 누군가는 열차의 움직임 자체, 혹은 그 움직임의 동선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영화 미학의 문제인가? 만약 그렇다면 <열차의 도착>이 키네토스코프에서 처음 상영되었다면 키네토스코프가 영화의 시초가 되었을까?
우리는 어떤 영화가 상영되었는지 이전에 어떤 공간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로 한 공간에서 모두가 동일한 시간에 관람할 수 있는 활동 사진을 상영했다. 이때 관객이 소비하는 것은 그저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활동 사진이 아니다. 활동 사진이 영사되는 공간, 극장이라는 공간의 존재. 너무나도 유명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열차의 도착>이 상영되자 극장 안의 관객들이 실제로 열차가 도착하는 것으로 착각해 놀랐다는 전설. (사실여부를 떠나)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극장의 관객들이 단순히 활동 사진이라는 이미지를 보는 것을 넘어 극장이라는 공간을 이상화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 영화는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을 넘어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자체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 관계가 형성됨과 동시에 극장은 외부와의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오직 영화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변수의 차단. 외부로부터의 고립. 그러니 열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관객들이 놀라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크린 위의 열차가 극장이라는 공간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영화와 극장 사이의 벽(일명 제4의 벽)을 붕괴시키는 것을 넘어 극장을 영화 속 공간의 연장으로 본 결과이다. 극장 안의 나. 다시 말해 영화 속의 나. 이때 비로소 관객은 시각적 이미지를 뛰어넘는 체험이 가능하다. 보는 것을 넘어 있는 것. 영화 속에 속해있는 듯한 경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한 체험. 그것은 철저하게 물리적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힘이기도 하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활동 사진이라는 이미지 자체에 몰두하다 관객이 영화를 마주하는 환경을 미처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자본은 뤼미에르의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더욱 온전한 체험을 선사할 수 있는, 그래서 관객들이 더 많이 끌어 모을 수 있는, 이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식. 시작은 그렇게 정해졌다.
여기서 극장이 영화와 폐쇄적 상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원인을 질문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극장은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그 관계의 근간에 자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시네마토그라프와 키네토스코프의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 키네토스코프는 홀로 감상해야 하지만 시네마토그라프는 함께 감상한다. 이 차이는 무엇을 만드는가? 어떤 영화이든 홀로 보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옆에 다른 누군가가 나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볼 때 그 체험은 더 이상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닌 한 공동체의 경험으로 환원된다. 관객이라는 공동체. (사회라는)공동체 안의 작은 공동체. 개인과 공동체의 가장 큰 차이점. 개인의 경험은 오로지 개인에게만 국한되지만 공동체의 경험은 그 규모와 상관없이 공인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법정에서 이해당사자와 증인 간의 관계 역시 작은 공동체 아닌가?). 공동체로서의 관객이 영화라는 매체를 체험할 때 그것은 곧 세계가 영화를 인정할만한 근거가 된다. 이때 내 옆에 앉아 함께 영화를 보는 사람은 단순히 같이 있다는 것은 넘어 나의 경험에 대한 증인이 된다. 영화에 대한 증인.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 나뿐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도 같은 영화를 보았다는 확실한 증거. 그런 증인들이 극장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영화는 세상으로부터 공인된다. 영화가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함께 본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한 편의 영화가 공인되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시. 어떤 감독이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을 자신의 하드 디스크에만 보관하거나 극장이 아닌 곳에서 홀로 혹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만을 위해 상영한다면 우리는 그 영화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스마트폰으로 찍은 조잡하고 짧은 영화라도 극장 개봉하고 관객들이 관람료를 내고 관람한다면 그것은 영화로 인정된다. 그러니 극장은 곧 영화가 공인되는 장소이다. 관객이라는 증인을 통해. 바깥 세상을 향한 첫 번째 장소.
3. 나는 이제부터 이 사실들에 대해 의문을 던질 계획이다. 그저 사실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 그 역할을 반드시 극장이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 다시 말해 권위에 대한 질문. 극장이 권위를 갖도록 해준 것은 결국 자본이 극장의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본의 선택. 역사의 선택. 그건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본이 극장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극장이 영화 산업의 중심이 되어야할 명분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극장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그러면서 극장보다 더 높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체계가 나타난다면 자본은 언제든지 극장을 포기할 수 있다. 극장의 진정한 위기. 자본이 극장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불안. 여기서 우리는 기술의 역사가 절대적인 시공간적 제약으로부터 탈피해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한 가지 예시. 에디슨이 등장하기 이전 사람들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직접 악단의 연주를 듣기 위해 공연장과 같은 현장으로 찾아가는 방법이 유일했다. 당연히도 공연장은 음악에 대한 절대적인 시공간성을 지니면서 이상화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축음기가 개발되고 LP판과 같은 음악 재생 매체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굳이 현장에서만 음악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다(여기서는 라이브 음악과 녹음된 음악 사이의 질적 차이에 대해서는 잠시 보류해두자). 축음기와 레코드판이 있다면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가 있다. 게다가 이후에는 LP판보다 더 가볍고 휴대성이 좋은 카세트 테이프와 CD가 나타났고 이제는 CD와 LP판이 지니는 시공간성마저 극복하기 위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나타났다. 종이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자책의 출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때마다 자본은 기술의 흐름을 따라 이동했다. 지금 극장이 겪고 있는 상황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극장이 지니는 물리적 거리감, 그리고 시공간적 제약. 지금까지 기술은 이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흐름을 이어왔다. 비디오 테이프와 DVD가 등장하며 2차 판권 시장이 형성되고 웹사이트를 통한 VOD 시장 역시 영화의 수익에 있어 극장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제 사람들은 굳이 극장을 찾아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다. 물론 극장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자신들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다. 3D나 4D, 그리고 아이맥스의 출현, 혹은 GV와 같은 프로그램들 역시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이다.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체험. 당신이 집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체험. 그러나 무엇보다 극장이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영화의 현재성에 있다. 무슨 의미인가? 극장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신작 영화가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공간이다. 여기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점은 단순히 새로운 영화를 접하는 것을 넘어 신작 영화들이 담고 있는 세계의 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인물의 등장일 수도 있으며,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아직까지 수많은 관객들이 물리적 거리를 극복해서라도 극장을 찾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극장의 이러한 역할조차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뒤집어 생각해보자. 극장은 어떻게 그 역할, 신작 영화가 처음 세계 앞에서 공인되는 장소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는가? 너무나도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유. 극장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공인되기 위한 조건. 개인의 경험이 아닌 공동체의 경험으로 환원되기 위한 공간. 그걸 수행할 수 있을만한 공간은 극장이 유일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극장 이외에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 무언가가 등장한다면 관객들은 굳이 극장을 찾을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는 그 모습이 OTT의 형태로 도착한 현재를 살고 있다. 그러한 미래가 언젠가 현재에 도착하리라는 사실은 모두가 예상했던 바이다. OTT와 극장의 공통점. 신작이 처음 개봉하고 공인되는 공간.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 절대적인 시공간성과 물리적 거리감을 지니는 극장에 비해 OTT는 비물질적 공간에 자리한다. 이때 나타나는 물리적 간극.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까지 걸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내 눈앞에, 우리 집으로, 모니터와 브라운관으로 영화가 도착한다. 이건 기술의 발전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 거부할 수 없는 흐름. 그것이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봉준호는 칸 영화제에 <옥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영화 오프닝 크레딧에 ‘넷플릭스’라는 이름이 뜨자마자 수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에 동조했던 국내 주요 멀티플렉스 극장들 역시 <옥자>의 상영을 거부했다. 이 당시 그들의 명분은 무엇이었는가? 오직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만이 진정한 영화이다. 아무리 영화의 모든 형식을 갖추고 있더라도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당시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상영 거부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옥자>를 찾았다. 누군가는 넷플릭스를 통해 보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옥자>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아 지방까지 찾아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를 본다 라는 행위. 아마도 그건 극장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관람은 아닐 것이다. 한번 더 반복하겠다. 극장이 자본의 선택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극장 관람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 영화에 동화되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과거형으로 말했다. 그건 그만큼 극장이 그 역할을 수행할만한 힘을 소진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최초로 <열차의 도착>이 상영되었을 때 사람들이 놀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 영화라는 매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활동 사진이 막 발명되었던 시기. 아직 사람들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들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영상 이미지를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이 실제라고 속기 쉬웠다. 극장은 관객이 그렇게 속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21세기 현재, 사람들은 더 이상 극장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제 영상 이미지는 너무 보편화되었다. 우리는 어딜 가나 수많은 영상 이미지와 함께 한다. TV에서, 스마트폰에서, 길거리 전광판에서. 이러한 수많은 영상 이미지에 대한 노출은 우리로 하여금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와 우리 스스로를 분리하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오로지 영화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 극장에 찾아 간다. 사실 그 이전, 그러니까 TV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화와 극장은 위기감을 느꼈다. 또 다른 영상 매체의 등장. 그러나 TV는 결정적으로 여러 채널과 프로그램이 각자의 시간대에 반복되면서 공존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는 상영되는 순간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용해 영화는 미학적 변화와 러닝 타임을 늘리는 등의 차별화를 통해 TV와의 공존에 성공했다. 여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영화 스스로의 미학적 변화를 통해 극장 상영과 OTT 상영의 차별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4. 이 말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극장 관람과 OTT 관람 사이의 질적 차이. 다시 말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과 OTT를 통해 다른 공간에서 관람하는 것은 질적으로 봤을 때 완전히 다르다 라는 주장.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물론 극장 관람이 관객이 체감할 수 있는 변수를 통제함으로서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 그것이 영화라는 이미지 자체에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극장 관람은 단지 영화를 보는 관객을 극장의 통제 하에 두면서 관객에게 다른 변수들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관객 개개인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한다. 이 안에서는 모든 개인성이 말소된다. 성별, 직업, 나이, 신분, 그 외의 모든 요소들은 영화를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난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순간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진다. 유토피아와 같은 민주적 공간. 모두가 영화 앞에서 하나가 되는 순간. 그런데 어째서인지 영화계에는 이러한 격언이 있다. “정말 좋은 영화는 극장 바깥에서 시작한다”. 또 다른 격언(아쉬가르 파라디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 “좋은 영화는 답을 내지 않고 질문을 하는 영화이다”. 이제는 꽤나 상투적이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팬데믹 앞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극장에게 이 말은 뼈 아프게 다가온다. 왜 걸작은 극장 바깥에서 시작하는가? 두 번째 말과 연결 지어 생각하자면 걸작은 질문을 던지기에 걸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의 가장 큰 특성. 모든 질문은 개인적 영역에 머무른다. 같은 영화를 보았을 때 저마다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던진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역시 질문을 마주한 개인의 문제이다. 이 문제와 마주할 때 영화를 제외한 변수를 통제하고자 하는 극장의 시도와 관객이 지니는 공동체성은 무너진다. 그러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 관객과 OTT를 통해 관람한 관객 사이의 간극 역시 사라지게 된다. 이제부터 영화를 마주하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영역 안에 국한된다. 그럼 어떤 일이 생기는가? 개인이 영화와 그 질문을 마주할 때 그 개인은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이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내가 서있는 곳. 나의 나라, 나의 사회, 나의 삶. 그 모든 것들이 영화를 향해 질문하고 동시에 영화에게 질문 받는다. 이는 곧 영화가 바깥으로 나오면서 세상과 융화되는 과정이다. 모든 예술은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건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영화가 세계와 동화되기 위한 통로가 있다면 반드시 극장을 거칠 필요도 없다. 바꿔 말하면 극장은 절대적으로 영화를 필요로 하지만 영화는 극장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건 자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윤의 최대화를 위해 극장을 선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큰 이윤을 위해 극장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하지 말란 법은 없다. 어쩌면 역사의 관점에서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이제 당신은 질문할 것이다. 영화의 중심이 OTT로 넘어갈 때 어떤 새로운 일이 벌어질 것인가?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몇 가지 변화는 확실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를 테면 시청의 주도권 문제. 극장에서 영화 상영의 주도권을 관객이 아닌 극장이 절대적으로 소유한다. 그러나 OTT 관람 시에 관객은 필요할 때 영화를 멈출 수도, 아예 외면할 수도 있다. 이것은 영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또 다른 변화. 신작 영화의 물리적, 시공간적 거리감 역시 약화될 것이다. 단적인 예시. 전주국제영화제는 2020년과 2021년 모두 온라인 상영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제가 가지는 고유한 시공간성은 퇴색되고 영화제 특유의 낭만이 사라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대신 물리적 거리의 한계로 인해 영화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다수의 관객들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었다. 연결의 힘. 극장 없이도 가능한 연대. 미래는 이미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과연 이 미래에 영화 미학은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시네마의 개념은 어떻게 재정립될 것인가? 아직 답하기 어렵다. 단지 나는 지금 영화 이전에 극장이라는 문제에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OTT의 등장으로 인해 극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동이 시작될 때 우리는 이 변화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대비해야 한다. 위기를 긍정하는 것. 그러면서 그간의 영화 산업 구조, 극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제작과 배급 구조에서 드러났던 여러 문제점을 다가오는 미래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개선하고 구조화 할지에 대해서 고민할 시기이다.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가 모두 각자의 자생력을 갖춘 생태계. 영화계가 그토록 요구하는 변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현재의 위기는 영화의 위기가 아닌 (극장을 중심으로 한)영화 산업의 위기이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위기가 기회가 될지, 종말이 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당연히 과도기를 겪을 것이고 누군가의 크고 작은 희생 역시 뒤따라올 것이다. 우리의 최선은 그 희생이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최선의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다. 여기에 대해서 관객이, 비평이, 영화인들이, 그리고 자본이 대답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