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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May 31. 2022

비관의 힘

낭만과 희망 너머를 바라보며

가끔 가다 주변에서 내게 이런 얘기를 하고는 한다. "네가 좋아하는 영화는  이렇게  우울하고 염세적이니?" 일단  말은 절반 정도만 맞는 말이다. 당장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동시대 유럽의 여러 시네아스트들, 자신이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로베르 브레송마저 신의 침묵과 인간에 대한 염세적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  타르코프스키 본인은 끝까지 신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믿음과 희망이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충만함의 원천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외에도 영화사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희망을 말한 거장들, 예컨대 프랭크 카프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자크 타티,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이름들을 떠올리면 염세주의자만이 시네아스트라는 이름을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있다. 그럼에도 내가 지지하는 시네아스트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열거해 볼때 분명 염세적 비전으로 가득  이름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정할  없는 사실이다. 동시에 희망이나 변화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하는 영화에 대해서 의구심이 먼저 드는  또한 사실이다. 그럴  주위에서 묻고는 한다.  그렇게 영화를 보나요? 나는  질문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게 영화를   무엇을   있는가?


얼마 전 웨스 앤더슨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았다. 그의 작품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전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를 인상적으로 보았기에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떤 난해한 감정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웨스 앤더슨다운 화려한 미장센이다. 그리고 편집과 구조 또한 미장센을 뒷받침하는 화려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가 끝난 뒤 어떤 기만을 당한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게 가장 확실히 드러난 것은 티모시 샬라메와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출연한 세 번째 에피소드이다. 이 에피소드는 68혁명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취재하는 기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68혁명을 다룬 이야기라는 것이 나오자마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이미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68혁명을 낭만적으로 다룬 것을 보았다. <몽상가들>에서 68혁명은 책과 영화의 이상 속에서만 갇혀 살던 세 주인공을 사회 비판과 현실 참여로 이끌며 교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베르톨루치의 태도는 당연히도 68혁명 당시 파리를 낭만화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68혁명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나는 그보다는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와 같은 영화를 지지한다(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다). 그런 상황에서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그 시절 파리를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예측이 어느 정도는 가능했기에 불안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웨스 앤더슨은 베르톨루치와는 다르게, 어쩌면 더 이상한 방법으로 68년 5월 파리를 바라본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68혁명은 드골 정권을 비롯한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기 위한 저항 운동이 아닌 단지 두 남녀 주인공을 이어주기 위한 로맨틱 코미디의 무대로 바뀐다. 게다가 시위대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 사이의 싸움도 체스 게임으로 대체한다. 이토록 기만적인 메타포. 그러니까 웨스 앤더슨은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68혁명 당시 파리는 혼란과 그 이후의 절망이 존재하는 도시가 아닌 오로지 낭만과 로맨스만이 남아있는 도시로 미화된다. 그렇기에 이 에피소드를 보고 난 후 나는 <프렌치 디스패치>를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이 이야기 역시 이 자리에서는 길게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있다. "낭만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  나쁘단 말인가?" 물론 나는 지금 낭만과 희망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낭만과 희망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기조이다. 웨스 앤더슨이 68 5 파리를 낭만적으로 바라볼   이면에 숨어있는 68혁명의 본질과  이후의 절망감은 조용히 묻히게 된다. 게으른 낭만은 과거를 희생시키면서 자라난다. 과거의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된 현재에서 아무런 성찰과 반성없이  시절을 되돌아   낭만은 과거에 있었던 비극마저 희극으로 미화한다. 그건 어쩌면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심연을 애써 외면하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희망과 낭만은  안에 심연의 어둠을 가지고 있을  완성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희망을 말할  있는 것은 스토커의 실패(<스토커>) 아버지의 희생(<희생>), 이반의 죽음(<이반의 어린 시절>), 그리고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겪은 비극(<안드레이 루블료프>) 모두 체화했기에 기적으로서 희망이 탄생할  있는 것이다. 자크 타티의 코미디가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의 순환 안에서 자신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잠시라도  순환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태도가 저변에 있기 때문이다. 시네아스트( 포함한 예술가들) 중에서 비관주의자가 많은 것도 낭만 이면에 숨어있는 심연을 마주하고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를 대면하는 . 어쩌면 예술가가 다가서야 하는 심연.  예술가를 괴물로 만드는 실체. 그렇기에 수많은 예술가들은 언제나 낭만의 위험성을 경계하며 일상과 통념에 도전하고 균열을 내고자 노력한다. 누군가 다시 내게 비관주의에 대해서 묻는다면 이것이 지금의 내가 해줄  있는 최선의 답변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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