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nysu Sep 27. 2020

토마스 웨인에게

세 번째 주말 편지



편지를 보내기 전, 메모.




말하고만 싶었다.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나 이외의 것을 들이지 않고 속에 있는 것들을 자꾸자꾸 뱉고 싶었다. 그렇다. 뱉고 싶었다. 목적 없이 생각이라는 생각은 남김없이 뱉고 싶었다. 마지막 숨을 내뱉는 것처럼. 죽음 앞에 숭고해진 것 마냥. 숭고하기는커녕 기화되어 흩어졌다. 흩어지길 바래서 말로 하는 것들이 있다면 나의 말은 붙잡아도 흩어지는 것들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에게, 어디에 남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기억되는 것들은 잊힐 수 없어 괴로운 상처의 말들 뿐이었다. 생각을 멈추고 일어난 일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생각은 소거되고 쾌락은 눈 앞에 차려놓은 밥상처럼 온갖 미디어로 전시되었다. '즈얼대 현혹되지 마소잉.' <곡성>에서 나지막한 일광(황정민)의 목소리가 들리면 무엇하나. 현혹된 세월은 돌릴 수 없다. 현혹되고 중독된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선 담을 넘어야 했다. 담을 넘기 위해선 생각과 호기심, 그 이상의 사유가 필요했다. 사유를 위한 공간과 시간을 늘린다. 지하철, 카페, 집, 일터. 내가 존재하는 공간에 시간을 부여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출근 시간, 식후, 퇴근 시간, 잠들기 전. 사유의 공간과 시간은 무엇으로 새겨지나. 글과 사진으로 남는다. 펜과 키보드로 남긴다. 핸드폰의 메모장과 갤러리에 보관한다. 존재의 증거들을 인화해 노트에 붙인다. 달과 별과 꽃이 있었다. 바다와 맑게 웃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숲길이 있었다. 햇빛이 나뭇잎을 통과해 부서져 쏟아져 내렸다. 우울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세상을 눈치채지 못한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것들이 있었다. 여기저기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있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항상 인생 최고의 영화 TOP 3에 들어간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생각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을 일깨우고, 그 본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본능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생존 본능이다. 살고자 하는 본능을 어떤 욕망으로 치환할 것 인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은 밧줄을 풀고 벽을 오른다. <엑시트>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주인공은 암벽 동아리를 한 적 있고, 이후 백수이며, 재난 상황이 닥쳐 고층 건물로 몇 번이고 대피해야 한다. 벽을 타고 오른다는 것은 매 순간이 고통과 선택이다. 난이도 최상의 목적지 이외에도 공포는 자주 엄습한다. 오를수록 땅과 자신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 가고 자칫 삐끗한다면 죽는다. 빨리 올라가는 것보다 정확도를 기하는 일이다. 완벽히 발을 올리고 완벽히 잡아야 한다.


브루스 웨인은 밧줄을 묶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죽으면 구할 수 없기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은 죽을 각오를 하기에 두려워 않고 올랐다. 생존 본능 없이 올랐다. 그런데 미끄러져 떨어지고, 헛디뎌 떨어지고, 마지막 벽돌에 손이 닿지 않아 떨어진다. 브루스 웨인은 기절하고 그때 아버지와의 과거를 플래쉬백으로 보여준다. 우물에 빠진 어린 브루스 웨인을 구하러 온 아버지가 밧줄을 타고 오는 장면 직후 되살아나듯 숨을 들이쉬며 깨는 브루스 웨인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질문을 흘리지 않는 것. 질문을 살림으로써 무작정 탈출만을 바라며 오르던 그를 되살리는 것이다.


"브루스, 우린 왜 떨어지는 것 같니?"


우린 왜 떨어지나. '떨어진다'는 표현은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물리적 의미도 포함하여 다양하게 활용된다. 희망을 잃었을 때, 일상이 지루함을 넘어 공허해 우울감이 닥칠 때,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차별받았을 때, 사기를 당했을 때,  포위당했을 때, 학살당할 때, 소외될 때. 수많은 수동적 상황 아래 갇히고 찢기고 벗겨지며 밟히며 내동댕이쳐지고 혼자가 되는 순간, '떨어진다'. 자, 이제 써야 할 때가 왔다. 떨어지고 오르는 단어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마지막 벽돌을 잡을 때가 왔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의 질문에 답을 할 때가 왔다. 마지막 벽돌이다. 밧줄 없이 뛴다. 벽돌을 잡고 오른다면 편지를 부치기로 하고 작은 배낭에 넣었다. 손이 땀으로 축축하다. 세상을 구하기보다 편지를 전한다는 것이 이렇게 두렵고 심장이 뛰는 일이었나. 그래, 우편부의 마음으로 뛰자. 자전거를 탄 우편부 극심한 오르막길을 쉬지 않고 오르는 마음으로.










토마스 웨인에게.







"왜 떨어지는 것 같니?"


이제야 답을 합니다. 힘을 모으기 위해서지요. 다시 하기 위해서예요. 마지막엔 밧줄을 풀고 뛰어오르기 위해서예요. 하나의 벽돌을 밟을 때 분노로 인해 올랐고, 다음 벽돌을 밟을 땐 슬픔으로 올랐고, 다음은 오만함으로 올랐고, 다음은 허영으로 올랐으며, 다음은 자기 연민으로 올랐고, 다음은 절박함으로 올랐고, 다음은 미련으로, 다음은 희망으로, 그렇게 계속, 계속 벽을 탔지요. 탈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시 했지요.


그런데 몇 번이고 오르다 남은 것은 용기뿐이더란 말입니다. 누구의 말도 닿지 않았어요. 내 앞에 있는 것은 오로지 마지막 벽돌뿐이었습니다. 생존 본능은 용기로 치환되어 내 안에 튼튼한 근육으로 남아있던 것이지요. 비난과 야유의 목소리는 옅어지고 남은 것은 내 목소리뿐이었습니다. 뛰어. 뛰어. 죽지 말고 뛰어. 생존 본능이 관자놀이 말미에서 외치고 있었습니다. 외침은 귀를 울리고 마음을 울려 말했지요. 할 수 있어. 뛰어. 잡아. 올라! 올라 가!


전 뛰었고 이렇게 살아 당신께 편지를 부칩니다. 잘 도착해서 당신이 뜯어본다니, 설렙니다. 이 편지가 끝은 아닙니다. 결말은 아직 멀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처럼 우물을 탈출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차별을 없애는데 뜻을 함께하는 이를 만나야 하고, 함께 싸워야 하며, 종국에는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생을 불안해말아요. 전 어딘가 존재할 겁니다. 분명히요. 생명을 가지고요. 배트맨은 희생으로 결말을 맞이했지만 당신의 아들은 살아있었듯이.


커피 한 잔의 여유. 따뜻한 햇빛 아래 마시는 콜드 브루의 여운과 연고 없이 서로를 알아본 자들의 소란 없는 눈짓. 그것이 나의 결말이길 바랍니다. 나와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지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돌보았던 지난 세월을 향유하며. 필립 글라스의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는 결말. 이것이 나의 결말이길.


미리 결말을 써보았으나 어찌 될지는 저의 선택에 달린 것 같군요. 그럼, 어찌 되었든 살아 다시 편지하겠습니다. 저도 덩달아 기대됩니다. 토마스 웨인, 당신도 평안하길.


작가의 이전글 고난은 영웅을 어떻게 만드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