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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Sep 28. 2020

애증(愛憎)과 희비(喜悲)는 속삭인다.



  손 끝이 시리다. 자전거 핸들을 잡은 손마디가 차게 식었다. 벌써 장갑이 그리워진다. 뺨도 살짝 얼린 찹쌀떡 아이스크림처럼 시원해졌다. 검은색 반팔 크롭티를 입고 위에 후리스를 걸쳤다.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패션. 딱 가을을 위한 한정 패션이다. 산책로의 벤치에 앉았다. 달리는 사람들은 허리에 겉옷을 여미고 반팔 차림으로 지나갔다. 빠르고 정적이었다. 달리는 사람들은 팔을 과하게 돌리지 않았다. 적정 각도로 양 팔을 교차시키고 팔꿈치는 살짝 접는다. 주먹을 쥐거나 쥐지 않은 사람이 몇 번이고 앞을 지나쳤다. 뜨거운 숨이 차가운 공기와 닿아 옅은 연기가 주위로 흩어졌다. 내 숨은 식어있었다. 자전거는 느긋하게 밟아도 속도가 오르기 때문이다. 경쟁심도 투지도 느낄 새 없이 스쳐가는 바람을 만끽한다. 몸이 달궈지기엔 충분하지 않아 손이 시리고 어깨 죽지가 쌀쌀해진다. 자전거를 타는 내내 몸은 식어가는데 찬 바람이 들어오면 감기에 걸릴 수 있었다. 몸을 여름과 겨울로 함께 덮는다. 유난스럽고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차가워진 손 끝에 들린 것은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 여름의 마지막 활기를 빼기에 적절하다. 변동과 감성의 계절. 짧아 아쉽고 반갑다. 여름의 뭉친 공기처럼 응어리진 마음도 순환되어 환기되길.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 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

"계속 사랑해야지."
소피아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할머니는 한숨을 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베 얀손, <여름의 책> 中




사람은 사람을 왜 미워할까. 미워하다가도 왜 사랑할까. 애증(愛憎)은 복잡하고 다면적인 세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애증은 희비(喜悲)를 부르고 희비는 청량하다. 솔직하니까. 솔직한 희비를 데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애증은 별처럼 하늘에 떠있다. 천체 망원경으로 보면 크게 보이기도, 아이슬란드 대지에서 보면 오로라에 겹쳐 아름다워 보이기도, 사막 위에서 보면 삼켜질 듯 많아 보인다. 단 하나, 나만의 애증이란 없다. 희비는 말한다. 기쁘지? 슬프지. 모닥불을 피워놓고 봐도 되고, 가까이서 찬찬히 뜯어봐도 돼. 다만, 지구에 데려올 수 없어. 지구 자체가 이미 저 별 - 애증 - 중의 하나이니까. 희비는 거짓말을 한 적 없다. 언제나 솔직했다. 변명과 반박 없이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애증은 희비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둘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 해도 금방 다시 붙었다. 자기장도 끊어내지 못하고 자기장보다도 강했다. 둘 중 하나가 희미해질지언정 결속된 애증과 희비는 솔직하고 끈덕진 것이었다. 끊어내지 못해 안달이 났다. 안달이 나면 인류애가 사라졌다. 애증을 없애고 기쁘고 슬프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미워하며 슬퍼하고 복수하고 기뻐하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잃기 두려워 슬퍼했다. 빈틈도 없이 가득해진 희비와 애증으로 지쳐버린 마음이 끙끙 앓았다. 지쳐서 놓고 싶었다. 그래도 소피의 작은 체구가 잔뜩 성이 난 모습이 스치면 그만둘 수 없었다. 밥 자리를 지키려는 새끼 고양이처럼 등줄기를 바짝 세운 위협이 사랑스럽고도 얄미워서. 다시 애증과 희비가 문을 두드렸다. 패배감보다 안도감으로 기꺼이 손님으로 받아들여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애증은 머리맡에, 희비는 오른쪽 다리 허벅지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에 들어갔다. 잠꼬대를 하는데 뚜렷했다. 잠에 들기 전이었고, 고롱거리며 말했으니 놓칠리 없었다.


"계속 사랑해야지, 미워도."

 희비는 말한다.

"우릴 놓치지 말고 계속 느껴야 해."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줄게."

애증이 하품을 했다.

"촉촉이 머릴 적시고 뽀송이 뺨을 쓰다듬을게."


밤은 깊었고 애증과 희비도 잠에 들었다. 나의 눈도 끔뻑이며 느려졌다. 걱정과 고뇌는 그들을 깨울 뿐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운 김에 잠들기로 한다. 꿈도 없는 잠의 바다를 유영하러 간다.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어쩐지 손 끝이 뜨거워져있었다. 핸드폰도 뜨끈한 핫팩처럼 주머니를 달궜다. 우다다를 마친 고양이의 뒷목처럼 덥혀진 뒷목을 쓰다듬고 페달을 밟았다. 벤치는 휑했고 자전거를 탄 나는 가뿐했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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