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Dear Past

부정적인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by benysu
20201010_123149.jpg 여름과 가을과 봄이 공존하는 사진. 뒤숭숭하고 소중하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았다. 일을 해도 순간 순간 멍하기 일수였다. 생산과 쓸모를 넘어 온갖 생각이 머릴 지배했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은거야, 나쁜거야? 어느 책에서, 기분은 전부란다. 기분따라 행동하지 말라고 해도 기분은 정말 중요해서 어쩔 수 없단다. 기분을 잘 챙겨야한단다. 그럼 내 기분은 지금 어떤거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감해질정도야. 내 기분은 어떤 기분인거야. 혼란스러웠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다.


"딴 생각하지?"


불쑥 튀어나온 맑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는 같이 일하는 카페에서 일명 '멘탈 지킴이'였다. 깜짝 놀라 내 행동이 티가나고 더뎠냐고 물었다. 그녀는 끄덕거리며 말한다.


"해결되지 않는 생각이라면 아예 다른 것을 하는게 좋아. 먹히지 않도록."


먹힌다. 나는 먹히고 있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어이기도, 활자이기도,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머릿속에 상영되는 영화 한 편에 먹히고 있었다. 한 시간의 휴식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빅 매직>이었다. 이때 난 일종의 기분 전환을 위해 기행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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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던 부분을 요약하자면, '천재성'이라는 것을 외적인 요소로 두면 편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즉, '천재성'을 타고난 것과 같이 내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두는 것보다 일종의 영감(Inspiration)으로 두면 편하다는 것이다. 영감은 꿈 같은 존재다. 깨고 나면 기억이 날 때도 있고, 깨고 나면 꿈을 꾼지도 모를 정도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떠오르면 후다닥 메모를 해야 겨우 꼬리를 붙잡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영감이다. 난 이런 창조적 영감이 변덕스럽다는 문장을 두고 변덕스러운 할아버지, 영감을 떠올렸다.



아직도 이 메모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네모로 꾹꾹 눌러둔 모래성처럼 굳은 마음을 파도가 쓸어가듯 풀어진다. 변덕스러운 할아버지와 험한 말을 하는 할머니. 둘은 완벽하지 않고 사랑스럽다.












메모를 마음에 품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휴식 시간은 끝났고 기분은 정리되었다. 좋은 기분으로. 어서 8시 퇴근 시간이 되길 기다리며 젖소의 눈물을 정리했다. 카페라서 우유를 많이 쓴다. 정말, 정말 많이 쓴다. 젖소의 눈물을 짜냈으면 한 방울도 헛되이 쓰지 말았으면 했다. 제일 안쪽 구석에 모여있는 16일까지 유통 기한인 우유를 죄다 앞으로 꺼냈다. 16일까지인 것은 제일 앞으로, 21일까지인 것은 제일 뒤로 보냈다. 생각이 많았던 때라면 하지 않았을 소소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비로소 돌아왔다. 눈물을 외면하지 않는 자신으로.



8시, 퇴근 후 걸었다. 멜론을 열어 무작정 '밤산책'이라고 검색했다. 플레이리스트 중에 <잠시 부정적인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밤산책하면서 듣는 노래>라는 제목이 있었다. 전부 재생시켰다. 첫 노래부터 취향 저격이었다. 감각적이지만 잔잔한 비트, 꾸덕꾸덕한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앨범 자켓이 나왔다.







Tonight let's take a walk
In the light of the moon
부정적인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Tonight
Take a walk in the light of the moon

Moonlight (Feat. CHE & Mokyo) 가사 中





물들어가는 단풍 색도 희미해질 만큼 전봇대마다 불이 들어와있었다. 이맘때의 밤산책은 선선했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면 매일 하고 싶었다. 여자여도 밤산책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얼른 되길 바라며 걸었다. 조금 껄렁거리며, 뒤에서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문득 낙엽을 찍고 싶었다. 붉고, 노오란 낙엽들을. 곧 떨어질 운명들을. 사진을 찍고 있는데 무언가가 무릎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고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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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치즈였다. 한쪽 귀가 잘려 있는 것을 보니 중성화를 한 모양이었다. 여유로이 바짝 치켜 든 꼬리를 무릎에 비비더니 자리에 앉아서 그루밍을 했다. 뒷발을 들고 배까지 꼼꼼히 핥는다. 땅콩이 제법 컸다. 저런, 너 중성화 잘했다야. 책임지지 못할 생명이 많아지면 안 돼. 아무리 생명이 소중해도, 태어나서 불행해지면 슬프잖아. 일말의 희망과 사랑을 줄 책임감을 가지고 생명은 태어나야하는거니까.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최소한의 조건을 주는거지.



벤치에 앉자 짧고 높은 목소리로 엥!하고 울었다. 꼭 다짐했다. 내일도 밤산책을 하기로. 꼭 이 길을 걷기로. 츄르를 들고. 부정적인 생각에 스위치를 끌까 말까하는 망설임에 대신 복슬거리는 꼬리로 스위치를 꺼주어서 고마웠다. 하늘이 내려 준 아이일까. 천사같은 아이야.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살이 붙어있었다. 중성화 이후엔 살이 찌기 쉽다지만 털도 윤기가 흘렀다. 내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듬뿍 받을테지만, 꼭 감사를 표하기 위해 츄르를 바치겠나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이도 작별 인사를 하듯 엥!하고 울었다.



내일 아침이, 내일의 밤산책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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