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Dear Past

Let them Free!

꼰대력에 꿀밤 먹이기

by benysu



같이 일하던 남자가 다가왔다. 위압적이었다. 묵직한 목소리로 화내기 시작했다. 나는 정색하고 바라봤다. 화가 나면 말을 아껴야한다. 아무리 내 생각이 정당하다고 느껴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똑같이 험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담배를 휙 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사람에게, 나를 향한 가스라이팅에게 지고 싶지도 않았다. 미안하지도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다. 화는 났지만 참았다. 상대방은 나와 대화할 마음이 없었다. 결국 그 사람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바로 쉬는 시간이 왔다. 즉시 산책을 갔다. 일하는 곳 옆에 조그만 숲길이 있다. 그곳으로 올라가면 억새길이 이어진다. 자수정처럼 빛나는 연한 보랏빛의 억새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 날 녹음을 했다. 나 자신에게 전하는 음성 녹음이었다. 기운이 빠져 글을 쓰기도, 친구에게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할 기분조차 아니었다. 무작정 친구에게 전화를 걸듯이 녹음을 했다. 나 자신이 제일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거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을 아끼는 거. 너무 잘했어. 그 사람이 말하는 네 탓이라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야. 너는 열심히 했고 실수를 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지만, 일을 못하고, 집중을 안하고, 성실하지 않았다는 거? 절대 사실이 아니야. 너는 정말정말 성실하고 일하는데 불평 한 번 한 적 없고, 먼저 알아서하는 멋진 아이야. 절대 너의 잘못은 없어. 너에게 무작정 다가와서 위협적으로 '조언'하려고 한 그 사람도...사실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과 너도 다를 바 없어. 다 같은 사람이야. 네가 만약 <사생활의 천재들>이나, <82년생 김지영>을 읽지 않았다면 이 일이 모두 그 사람과 너의 개인적인 일 같았겠지. 모두 네 탓이 되거나 혹은 그 사람 탓이 되었겠지. 하지만 수현아, 기억해야 돼. 단지 너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일 뿐이라는 거. 별 거 없이. 책을 그저 두 권 읽어서 한국 사회에 이런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아는거야. 그걸 그 사람을 상처주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면 안 돼. 사람은 다들 열심히 살아가. 너는 인정 받으려고 주말마다 그 곳에서 일을 하는게 아니니까. 네가 진짜 인정받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어. 그 사람은 그 일이 소중한거야. 결이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고, 단지 그 뿐이야. 누구 하나 잘못한 사람, 나쁜 사람은 없어. 충돌이라는 건 오해가 쌓였을 때, 그것이 폭발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야. 그때, 너는 아주 잘 한거야. 같이 소리치고, 따지고, 혹은 굽신거리면서 미안하다고 한다거나 그러지 않은거. 너의 마음에 네가 생채기를 내지 않은거.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어."



두서 없어도 된다. 온전한 공감과 지지를 나 자신이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자기 존중감, 자존감은 물론 진정한 자존감에는 성찰도 꼭 필요하다. 사실 관계를 파악해보니 그 사람이 말하는 나의 실수는 4번,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실수는 2번이었다. 실수의 숫자가 조금 줄어드는 것 만으로도 뭣보다 다른 사람들이 '바쁘면, 실수 할 수 있어요.'라고 다독여주는 모습에서부터 다음엔 잘해야지. 조금 더 꼼꼼해져야지. 라며 다시 시도하는 것에 자신감이 붙었다.


자, 어르고 달랬으니 남아 있는 감정의 잔여물을 뺄 시간이다. 걷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평소처럼 느긋하게 걸으면 생각에 먹힌다. 달렸다. 숨이 적당히 차오를때까지 조깅을 하고 나자 다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과 나는 착하고 나쁜 사람으로 나뉠 수 없다는 것. 그 사람이 날 섭섭하게 했다고 해서 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는 것. 그 사람과 만약 대화를 하게 된다면 절대 절대 가르치지 말 것.






가르치려는 마음, 없애자. 선민 사상 후려치기 중이다. 내 안의 가르치려는 꼰대력에게 꿀밤을 먹인다. 당당히 나로써 달리는 데 집중하자! 그 사람의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냅둬, 그냥! 누군가를 믿고 냅두자. 놔두자, 놔주자. 자유로워지도록. 나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달리는 저녁. 환기된 마음처럼 땀에 젖은 머리칼을 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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