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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Nov 03. 2020

허리 노동조합

허리 노조는 외친다. 수영하라! 수영하라! 쉴 권리를 보장하라!



 "머리를 물에 넣어볼까요."


  왜 난 수영 강습을 끊었을까. 허리를 치료하겠다면서 물 공포증은 뒤로 미루다니. 안일했다. 바들거리며 까치발을 들었다. 목부터 아니 쇄골부터 물에 넣지 않으려는 얄팍한 속임수였다. 몇 년 전 여름 날, 물 속에 머리 끝까지 잠긴 적이 있었다. 계곡물이 맑아 바닥이 훤히 보였고 난 튜브에서 내리고 싶었다. 문제는 계곡 한가운데였고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었던 것이다. 튜브에서 벗어나자마자 쑥! 밑으로 꺼졌다. 위에서 내려다 본 것과는 달리 물 속은 어두컴컴했다. 눈을 번쩍 떴다. 생존 본능은 엄청난 것이구나. 내가 물에서 눈을 뜨다니. 맨 눈을! 인간 내면 깊숙이 내재된 본능을 실감하면서 동시에 어떤 감각도 따라왔다. 상상과 호기심이었다.


  '여우굴에 퍼지는 아침 햇살이 이런 느낌일까?'


  여우굴도 호랑이굴도 아닌 이곳은 물속이었다. 그때의 나는 마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숨을 참았는지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몰랐다. 눈 앞의 빛살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빛살은 튜브 가운데를 통해 물에 굴절되어 일렁이는 빛이었다. 짧은 낭만은 끝났다. 생존하기 위해 팔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체 없는 메시아를 잡으려는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튜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불운은 따로 있었다. 아무도 내가 빠졌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들 라면과 고기와 밥과 상추와 다른 진수성찬이 차려진 밥상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계곡물 깊이를 몰랐다는 이유로, 진수성찬의 후광에 묻혀 죽을 수도 있다니. 여름 바람이 눈썹을 스쳤다. 잘 돌아왔다고,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걱정했다고 반겨주는 것은 여름 바람뿐이었다. 살아있다는 감각과 함께 공포와 허무와 쓸쓸함이 몰려왔다. 이때부터 물에 머리를 넣으라는 말은 고통의 길로 가보자꾸나라고 손을 잡아끄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왜, 수영장을 왔냐. 허리 아픈 사람이 펭귄 영상을 봤기 때문이다. 바다를 날아다닌다는 새. 그 새가 바다를 자유로이 몸짓하는 장관을 본 밤이었다. 영상이 끝나자마자 근처의 수영장을 검색했다. 수영을 배울 생각은 없었다. 중력을 벗어나고 싶었다. 침대에서 누워있고 앉고 걷는 모든 것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날고 싶었다. 중력따위, 거스르고 싶었다. 날개가 없어 하늘을 날 순 없으니 바닷속 펭귄처럼 유영하고 싶었다. 수영장의 나는 펭귄 영상을 보는 과거의 나를 말릴 걸하고 후회하지만.


 "같이 호흡해볼까요?"


  강사님이 다가왔다. 남극 바다에 던져진 것처럼 안절부절하며 바들거리는 내가 못내 눈에 밟힌 모양이었다. 그가 수영장 가장자리를 잡고 호흡했다. 따라 했다. 음-하. 음-하. 그와 나는 일말의 로맨틱한 기류도 없이 표류된 이와 발견한 구조 대원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레일을 출발했다.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고 가능한 오래 호흡하며 걸었다. 유유히. 물장구 없이 수영모들이 행진했다. 돌고래들처럼 머릴 올려 숨을 고르고 들어갔다. 아쿠아리움은 가지 않아도 되겠어. 여기 멋진 돌고래들이 있는걸. 나는 과연 돌고래가 될 수 있을까. 하물며 펭귄은? 수달은? 벨루가는? 바다를 여행하는 수많은 생명이 떠올랐다.


   그런데 강사님이 머릴 넣어보자는 말에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아릴정도였다. 혹여 레일 벽을 놓칠까 어깨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강사님은 머뭇거리는 내 머릴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이상한 신뢰감이었다. 그와 동일한 호흡을 같이해서 가능한 걸까. 들숨과 날숨을 비슷하게 맞추는 것이 안정감을 준다니. 거울 뉴런일까? 신체가 닿아도 로맨틱과 에로틱이 없다니. 오히려 희망이 샘솟았다. 그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바다 생명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생경함과 이상한 경이로움을 폐 가득 채우고, 잠수했다.



  물에 머리를 맡기자 물이 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숨과 급소와 두려움을 맡긴 것을 물은 반겼다. 물이 몸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이의 발이 땅에서 3cm 정도 떠오르는 것처럼. 돌고래와, 펭귄과, 수달과, 벨루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탄탄하고 뭉툭한 허리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허리도 신이 났는가 보다. 부력을 만난 허리는 시위를 그만두었다. 통각은 허리의 외침이었다. 쉴 권리를 보장하라! 우리도 쉬고 싶다! 꽹과리를 치듯 신경을 쳐대고 다리를 지나 새끼발가락까지 마비시킨다. 아픔으로 존재를 알리는 행위다. 아픔을 그만둔다는 것은 훌륭한 타결점을 찾은 증거였다. 허리 노동조합과 '나'라는 사회는 평화를 맞이했다. 수영이라는 타협점을 찾고. 허리도 드디어 중력과의 노동에서 벗어나서 쉴 권리를 얻었다.


  두려움의 대상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 가능할까. 평형이고 배영이고 자유형이고. 수영의 형태를 배우는 것을 떠나 물속에 머리를 깊이 넣었던 그날부터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낙관주의가 되었다. 영원히 침대에서 지낼 것만 같던 불안도 수영을 하면 잊힌다. 계곡에서 느꼈던 고독과 죽음의 공포와 쓸쓸함만을 기억하던 과거에서 벗어났다. 이제 나는 계곡에서 빠졌던 순간의 빛살을 기억한다. 손에 닿았던 튜브를. 눈썹을 스쳤던 여름 바람을. 들숨과 날숨을. 돌고래가 된 수영모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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