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독서 모임에 참여 중이다. 맑고 밝은 직장인들의 저녁 독서 모임이 많은데, 내가 참여하는 독서 모임은 감각적이고 자유로우며 희소하다. 조명이 밝지 않은 공간에서 이뤄지는 이 독서 모임은 마음이 편하다. 이 곳에서 나온 질문을 글로 쓰며 사유한다.
Q. 자아의 유일성은 두 가지 (덧셈, 뺄셈) 방법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 中)
각각의 장담점이 있을 것이고 본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어 나가는지 혹은 위 두 방법과 관련되지 않아도 자아의 유일성에 관하여 글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
자아. 스스로 자(自), 나 아(我).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
유일성. 오직 유(唯), 하나 일(一), 성품 성(性).
오직 하나뿐인 성품.
단어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느낀다. 완벽한 유일성은 없다. 심지어 이 문장도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그럼 완벽한 유일성은 존재한다고 해보자. 이 문장은 완벽한가? 우린 그 어떤 완벽을 찾을 수 있는가. 옳고 그름을 넘어 진리로 여겨지는 것을 우린 일생이 끝나고 나서도 찾을 수 있을까? 자아의 유일성에 대한 나의 물음은 여기서 시작하는 듯하다.
그런데 어렵네. 매일 수영장에서 수영하던 사람이 갑자기 바다에서 수영하면 공황 상태가 오는 것처럼 황망하다. 다른 재밌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것을 찾는다. 어떤 아이디어를 낚기 위해 배를 띄우는 행위로 넷플릭스 창을 켠다. 물음을 가슴 한편에 품고 어떤 것을 보든지 연결시켜 파고들고 싶었다.
지금부터 쓰는 글이 <소셜 딜레마>의 후기 감상으로 그치는지, 아니면 자아에 대한 거대한 비유가 되는지는 읽는 이가 자유로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단지 이 마음속 혼란을 어떻게든 하고 싶을 뿐이다.
/
<소셜 딜레마>는 우리의 행동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구글, 유튜브 등등 IT 산업에 관련한 모든 것들이 우릴 상품으로 본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우리에게 단지 '노출'시키기 위해 광고 회사는 플랫폼들에게 수억의 돈을 지불한다. 그리고 각 개인의 특성마다 알맞은 광고와 영상을 사람들에게 노출시킨다. 이는 공론장을 약화시키고 심각한 양극화를 일으킨다. 정치를 예로 들어, 보수적 정치 성향의 사람에겐 보수적 주장이 강력한 영상을. 진보적 성향이 강한 사람에겐 진보적 뉴스만 계속 노출시키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줄어들도록 하는 플랫폼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증가시키는 책임을 져야 했다.
이 영상을 본 후에 곧장 유튜브를 켰다. 유튜브 추천 영상을 없애는 확장 프로그램을 깔기 위해서다. 유튜브 '홈' 화면에서 광고 영상을 없애고 싶었다. 광고와 추천 영상을 없애면 내가 원하는 영상만 '홈'에 남을 거라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안일했던 거지.
오류인가? '홈' 창에 어둠이 깊게 내리 깔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추천 영상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유튜브의 '홈'은 나의 '홈'이 아니라 날 분석해서 깔아 놓은 정해진 비단길 같은 것이었다. 알고리즘의 집. 내가 보고 싶은 것 이상이었다. 볼 것이라며 예견하며 특정 지어 놓는 알고리즘이라는 그물 창고. 알고 보니 알고리즘. 그곳이 진짜 나를 이루는 요소이자 성질이라고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시스템에 얽매여 그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 무인도에 던져지면 이런 느낌일까. 무인도에 가면 뭘 들고 가고 싶나요?라고 묻으니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무인도에 데려 놓은 느낌이다. 어.. 저는 책을... 하는데 벌써 이동시켜버렸다. 분홍 키티 잠옷에 나이키 레깅스를 신은 해괴망측한 상태로 말이다.
/
예상치 못하게 날 마주하는 순간은 당황스럽다. 놀랍기도 하다. 의외로 대단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으니까.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겠다. 주체적으로 살겠다.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겠다. 자유롭고 싶다. 바람 가는 대로 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해도 결국 거대한 시스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조그만 개인이라는 현실이 들이닥쳤다.
10분 간, 멍하니 시꺼먼 악어 입 속 같은 창을 바라봤다. 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악어 입 속에 머릴 넣고 있었구나. 동아시아 수족관에서 하는 위험천만한 쇼처럼.
침을 꿀떡 삼키고 차갑게 식은 손끝을 마주 비빈 다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눈을 굴려 '홈' 버튼 아래를 봤다. '구독' 버튼이 있었다. 클릭했다.
"우와."
실제로 낸 감탄사다. 2020년 9월 15일에 올라온 영상만 해도 87개였다. 채널의 정체성도 다양했다. 춤, 비건, 영어 회화, 영화, 외국 토크쇼와 이슈, 블랙 코미디, 한국 사회에 대한 이슈, 엠비언트, lofi, lp판, 플레이리스트, 책, 글, 일러스트.
신이 났다. 나이면서 내가 아니었다. 내가 관심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다른 이의 언어와 표현으로 가득했다. 타인이 과하게 날 메우고 있다는 생각보다 소통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소통이었다. 타인과 자아의 사이를 끊지 못하는 것 말이다. 내가 나로 있지 않도록 가만 두지 않는 것. 함께 하자고 신이 나 방방 거리는 어린아이의 머리칼과 손 끝 같은 공간. '구독'이라는 공간. 누가 더 많이 아느냐 겨루는 것이 아니라 이거 재밌지? 맞아 재밌어. 이것도 좋아. 저것도 좋아, 하는 것. 확장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무수한 두더지들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빼꼼, 빼꼼. 두더지가 얼굴을 내밀면 사냥하지 않는다. 있구나! 거기 있구나! 발견하는 기쁨과 함께 알아보는 흥분감. 무인도에 던져지니 저 앞에 서핑을 여유로이 즐기는 사람도 있고, 별도 있고, 파파야 나무도 있고, 모래도 있고, 자갈에 부서지는 파도도 있었다.
/
물론 완벽하지 않다. 단 하루의 87개의 영상들이고, 다른 날의 다양한 영상이 있다. 15일 단 하루, 단 하나의 플랫폼으로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다. 그래도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서 사람이고, 사람이란 유일했다가도 흔했다가도 불안했다가도 평온했다가도 다양했다가도 일률적이니까. 사람만큼 세상도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니까.
나라는 사람을 정의 내릴 순 없지만 되고 싶은 모습은 있다. 퍼펙트한 사람보단 유연한 사람. 건강한 사람. 회복력이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