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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Jun 10. 2020

부재하여 충만하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

  






 무덥다. 숨을 들이쉬면 목 언저리가 홧홧하다.   

   

  무덥다의 '무'가 ‘無’였으면 좋겠다. 무감각의 '무'는 ‘無’이면서 공허하다. 그래도 무감각보단 무덥다는 감각을 느껴서 다행이라고, 짐 자무쉬의 <패터슨>을 보며 여실히 체감한다.     


  <패터슨>엔 다양한 부재가 있다. 사건의 부재. 장르의 부재. 욕심의 부재. 무엇보다, 결핍이 부재한다.      


  영화엔 주로 닫힌 결말이든, 열린 결말이든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수많은 영화가 다양한 스토리를 쏟아낸다. 인물이 겪어 내는 인과관계와 사건이 주로 장르를 결정한다.     


  <패터슨>엔 사건이 부재하니, 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다. 자연스레 장르가 부재한다. 주인공 패터슨(애덤 드라이브)이 원인이다. 그는 식욕, 성욕, 수면욕 등등 어떤 욕망에 욕심부리지 않는다. 욕망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사건이 없다. 사건이 진행되지 않으니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서사는 불필요하다.      


  패터슨은 결핍보다는 현재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에 집중한다. 성냥갑부터, 사랑하는 아내 로라(골시프테 파라하니)와 버스를 운행하며 나누는 승객들의 대화들. 강아지와의 산책 시간과 흑인들이 가득한 바에서 마시는 맥주 등.      


 이때 흑인들이 가득한 바에 대한 설정도 흥미로운데, 패터슨은 '결핍'에 관심이 아예 없으니 '차별'도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자신이 백인이라 눈에 띄진 않을까.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셔도 되나?’ 같은 고민도 없다. 그냥 마신다. 소도시 패터슨의 명예로운 사람들이 신문으로 프린팅되고 전시된 바에서 칼 같은 시간에 맥주를 마신다. 그렇다고 이 명예로운 이들을 질투하는가. 그렇지 않다. 전시된 신문들을 보며 맥주를 홀짝일 뿐이다.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세계관에서 그는 자주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퇴근하며 돌아오는 길에도 프레임 밖으로 나가고, 맥주를 마시러 가는 길에도 강아지에 끌려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패터슨>의 프레임 밖에서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던지 간에 영화의 프레임 안에서만큼은 이 '부재'는 존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패터슨의 ‘결핍’과 불만족이란 없는 세계에 욕망을 채우고자 행동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애버렛(윌리엄 잭슨 하퍼)은 여자 친구 마리(채스탠 하몬)다시 이어지고 싶어 한다. 아내 로라는 비싼 기타를 산다. 패터슨은 지금껏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고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여자 친구와의 삶과 기타 없는 삶을 충족시키려 한다. 언뜻 패터슨은 관망하고 아무 상관 없는 듯 보이지만 그도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시를 당당히 보이라는 로라의 응원에 주말에 공책을 복사하러 간다고도 말하고. 가짜 총기 소동을 벌여서라도 여자 친구를 되찾고 싶어 하는 무모한 애버렛의 행동을 저지하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니 발전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다. 그런데 패터슨 이외의 인물들 심지어 강아지 마빈까지 합세해서 사건을 만든다. 끝내 패터슨에게 없던 것을 끌어내는 사건들로 부족해 가장 소중하고 애지중지한 공책까지 찢어 없어진다. 그의 온전한 세계였던 공책은 파괴되었다.      








  영화는 핸드 헬드 기법보다 고정 기법을 사용한다. 망연자실한 패터슨도 똑같이 정적으로 바라본다. 다만 다른 것은 패터슨의 측면에서 그가 프레임을 빠져나가길 기다리던 카메라는 공책을 잃은 후 산책하는 패터슨의 등을 잡는다. 처음으로, 그가 공책을 잃었다는 결핍에 아쉬워하는 것임을 카메라는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운이 좋게도 – 혹은 시를 쓴 패터슨의 공책이 찢겨 산책하는 어떤 필연적 행보로 인해 – 일본 시인을 만나 공책을 선물 받는다.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는 그의 인지부조화적 부정은 공책마저 찢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찢긴 공책으로 시 자체에 공허한 감정이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일본 시인이 말한다. 두서없이, 갑자기. “아하!”     


 패터슨은 일본 시인의 “아하”를 따라 중얼거린다. 시의 부재를 느끼고 집중하는 패터슨의 얼굴은 점점 달리숏으로 클로즈업 된다. 한 번 상실을 겪고 “아하”하고 깨달은 패터슨의 얼굴 옆으로 떠오르는 ‘The Line’. 깨달음의 의성어를 깨닫게 하도록 쓴다는 역설은 영화 <패터슨>에 잘 어울린다. 이후 패터슨의 옆모습만을 잡던 카메라는 프레임 아웃의 움직임에서 마지막에 프레임 아웃에 이은 코너를 돌아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페이드 아웃으로 변화했다. 그는 아마 상실과 부재에 대한 충만함도 시로 아름답게 써 내려갈 것이다.     









  이렇듯 그가 쓴 시를 영화 <패터슨>은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 시에서 4차원 이야기를 하면 카메라는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과 현실이 이어진다는 이미지적 기교로 4차원을 형상화한다. 5차원, 6차원, 7차원의 이야기를 할 때, 거울로 로라의 손이 나타나고 몇 초의 텀을 두고 프레임 바깥에서 로라의 얼굴이 나온다. 하나의 시각 안에 두 번에 나뉜 존재의 출현은 가히 공간을 넘나들고 시간이 동시적으로 있지 않고 나뉠 수 있다고 초공간을 이미지화했다.     

 

  영화적 기교로 패터슨의 시와 세밀한 접점을 드러내는 이 장면은 패터슨의 시를 더욱 아름답고도 시각적 경험으로 직접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예술의 아이러니를 펼친다.      


  예민한 시각으로, 관찰력으로, 무언(無言)의 시선으로 자신의 일상을 한 편의 시로 변모시키는 패터슨. 사물은 사물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패터슨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정받고자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할 만큼.      


  쥐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지만, 때론 주먹을 쥐고 있어 손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지 않은가. 영화는 그가 손을 하나씩 피게 되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도 아쉬워하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주일의 시간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실은 <패터슨>은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그의 기민함을 정적인 카메라가 대변하고 패터슨의 유머를 적절한 컷으로 현상해 보여줬으니 그의 성장에 대한 차분하고 따뜻한 시선을 우리에게 말해준 것이 아닐까. 결핍의 부재로 만족했고, 상실하여 더욱 충만해지는 그를 보여주며.     


 쨍한 햇빛 아래에서 멍하니 있는 것보단 덥다며 수분의 상실과 손상되어 빨갛게 변한 피부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나으리라. 아, 역시 무감각한 것보단 무덥다고 헛헛하게 웃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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