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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Sep 17. 2020

악마가 무서워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와 희망의 죽음

※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판도라의 상자 신화를 아는가. 신이 열지 말라던 상자가 있었다. 증오와 미움, 질투와 오만 등등 갓 지어져 순수한 세상엔 위험한 감정들이 들어있는 상자였다. 신은 부러 판도라에게 상자를 준다. 판도라가 호기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 적에 흉흉한 기운에 놀라 상자를 얼른 닫아버리는데, 이때 상자 속에 있었던 '희망'이 날아가지 않고 남게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 신화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판도라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은 어떤 의미냐는 것이다. 그 중 두 가지 해석은 대척점을 이룬다.


* '헛된 희망을 쫓아' 괴로워지게 되었다.

* 희망이 마음 속에 남아 살아갈 수 있다.


  난 상자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사람의 마음 속엔 누구나 악마가 들어있고, 그 악마가 세상에 풀리는 순간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행해지니까. 마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처럼.

 

  넷플릭스의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영어 원제 : The Devil All The Time)는 앤토니오 캠퍼스 감독의 영화로,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톰 홀랜드, 로버트 패티슨, 빌 스카스가드, 세바스찬 스탠, 미아 바시코프스카 등등 넷플릭스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희망의 부재가 일으키는 비극'이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빈 러셀(톰 홀랜드 역)의 아버지 윌러드 러셀(빌 스카스가드 역)과 같이 '아빈 러셀'이라는 젊은 청년의 세대에게 영향을 끼쳐온 아버지 세대부터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아빈 러셀(톰 홀랜드 역)은 어릴 적 아버지 윌러드 러셀(빌 스카스가드 역)이 병 들어 죽어가는 아내의 구원을 신에게 바라며 피폐해져가는 것을 목격했다. 윌러드는 기도하라며 아빈에게 강요한다. 심지어 가족같은 반려견인 잭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 끝내 아빈의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마저 자살한다. 이때부터 아빈에게 구원과 기적은 헛된 희망되었다.


  이후 아빈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삼촌이 사는 고향으로 내려간다. 할머니는 가여운 고아를 가족으로 들여 돌보고 있었다. 리노라(일라이자 스캔런)다. 아빈은 리노라를 친 여동생처럼 여기며 아낀다. 7년 동안 아빈은 신을 불편해하면서도 리노라가 어머니 묘소 앞에서 성경을 읽을 때 곁을 지켜준다. 그러나 아빈은 아버지가 잭을 죽일 때 무기력했던 기억이 있다. 아끼는 반려견이 헛된 희망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기괴한 경험. 아빈은 지키지 못한 무력감에 리노라에 대한 보호 본능이 극에 달해 폭력도 불사한다. 리노라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떄려 눕히며 여동생을 다신 건드리지 말라고 어름장을 놓는 장면처럼.


  영화 속엔 한 줄기 희망같은 인물이 있다. 바로 리노라다. 리노라는 어머니의 무덤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위험이 닥치면 신앙으로 마음을 다지며 극복하려한다. 리노라는 자기 연민보다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 리노라도 결국 타락한 프래스턴 신부(로버트 패티슨)과 얽히면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프래스턴 신부의 가스라이팅에 슬픔에 빠져 목을 메기 직전, 깨닫는다. 자신의 가족들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과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고 괜찮을 것이라고.  


  서둘러 목의 밧줄을 푸르려는 순간 양동이는 넘어지고 리노라는 목숨을 잃는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죽음'이라는 요소를 부여해 희망을 프레임에서 제거한다. 리노라마저 죽음으로써 아빈에게 두 번째이자 마지막 희망, '사랑'이 사라졌다. 타인을 보호하고 돌보는 '사랑'이라는 마음이 제거당하면서 잭과 리노라는 모두 창고에서 죽었다. 창고는 아빈의 마음이다. 리노라와 잭이 모두 창고에서 죽었다는 상황은 아빈의 마음이라는 상자 속 희망을 상징하는 두 존재가 지워진다는 이미지적 상징으로 남는다.


   하지만 희망의 죽음보다 난 샌디의 죽음이 가장 비극적이었다. 


   샌디 핸더슨(라일리 키오 역)은 일상처럼 반복되는 살인이라는 일과에 지친 인물이다. 그녀는 피해자에게 감응하는 공범이자 새로운 삶을 희미하게나마 갈망한다. 개리가 신을 믿어 죽음 이후에 구원받길 바라고, 개리에게 미안한 듯 '넌 좋은 아이야'라고 말한다. 샌디는 아직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올가미를 벗어나려던 리노라의 발에서 양동이를 휙 제거하듯이 샌디의 총에서 총알을 제거하고, 아빈과 샌디 사이의 침묵을 제거함으로써 서로 소통할 기회를 앗아갔다. 그렇게 악마는 사라지지 않고 나타난다. 겁에 질린 두 사람은 결국 방아쇠를 당긴다.


  애석하게도 아빈과 샌디 사이의 소통의 제거는 그들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다. 샌디는 살인의 공범인데 미래가 있느냐는 것보다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마저 없었다고 힘을 실어 말하고 싶다. 그녀는 피해자의 마지막 사진에 함께하는 공범이자 피해자를 '모델'이라고 부르면서도 자신도 사진의 피사체로써 '모델'이 되어었다. 먼지 쌓인 차창 밖 숲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마치 헛된 꿈인 듯 말한다. 탈출에 대한 일말의 희망. 희미하지만 그곳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가능성이 제거되는 비극. 심지어 잠시 소통하지 못해 일어난 비극. 자랄 수 있는 나무를 가차없이 잘라버린 느낌이었다. 마지막 엔딩에서 아빈이 하품하는 모습을 보며 샌디의 말이 떠올랐다. 담요에 누워 높게 뻗은 나무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아득한 먼 곳을 바라보는 샌디의 말이.




  It's beautiful, isn't it? All them trees just going up,up,up.
That's a good picture.


2020년 9월 18일 금요일 오후 다섯시의 나무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에서 악마는 누구일까. 무엇일까. 어디있을까. 리노라의 발 밑에서 양동이가 미끄러진 '비극적 운명'? 사람을 죽이려는 '살의'? 살인을 정당화하며 자기 합리화하는 '나약함'? '두려움'? 그 무엇이든, 누구이든, 언제 또 어디에 있든 악마는 분명 다양한 형태로 우리 곁에 잔존해있을 것이다.


  나도 두렵다. 분명 '헛된 희망'보다 현재에 충실히 살며 버틴 사람들이 있으니까. 누구도 자신을 위로하지 않아 자신이라도 자신을 연민하며 돌본 사람들이 있을테니까. 힘겹게 버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문장과 단어를 쓸까 봐 조심스럽다. 키보드 위를 방황하는 손가락 끝이 꽤나 차갑다.


  그럼에도 쓰는 이유는 써야 했기에. 나 또한 마음 속에 악마가 있었기에. '자기 연민'이라는 악마가 있었다. 타인에게 상처주고 있었다. 그런데 날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소통이다. 상처 받은 이가 상처 받았다 소리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날 보듬어주는 상황이었다. 부끄러웠다. 미안하고 슬펐다. 이후 뼈저리게 후회하고 변화하고 싶어 발버둥치고 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이니까. 자기 연민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다. '나한테만 왜 이런일이'보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로 바꾸고 싶기에. 살짝 변형한 것이지만 크게 바뀌는 것이 있으니까. 주저 앉기보다 일어나서 발걸음을 뗄 수 있으니까.


  해야했다. 솔직하게 '완벽하진 않지만 더 나아지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다. 악마가 어떤 형태로 나타난다면 물리치거나 굴복하는 일 없이. 악마의 존재를 존재 자체로 '아, 있구나.'하고 싶다. 악마를 만나 분명 괴롭겠지만 건강하게, 튼튼하게 매번 회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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