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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심플 Sep 20. 2020

조화를 꿈 꿉니다

나의 지난 가을 이야기

 지난 가을, 그러니까 2019년의 가을, 나는 아마 정상이 아니었다. 마음에 찾아온 권태감과 우울함은 그간 모든 것을 쏟아오던 것들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었다. 사랑해 마지 않던 것들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밤엔 화장대 의자에 홀로 앉아 오열을 하고, 낮엔 친구들에게 신세한탄을 늘어놓던 시절들. 그리고는 급기야, 교과서에도 나온다는 "가지 않은 길"을 기웃거리며 미련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셋째아이의 태명처럼(깜짝이) 그 아이가 나에게 놀라운 선물과 같은 존재임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내 인생 최대의 암흑기가 "셋째 임신 ~ 셋째탄생 후 24개월"이라는 것도 변함은 없다.
 그 시기는 그저 아이들로 가득 찬 삶이었다. 남편이 함께 하는 주말 외에는 집과 그 근방 500m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기적인 모임들, 친한 친구와의 자잘한 만남도 점점 줄어갔다. 좀처럼 거절을 못하던 나는 그제서야 거절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단 살아야 하겠다는 그 일념이 거절당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미안한 마음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셋째아이 돌보기가 좀 수월해질 무렵, 나는 이제야 좀 인간답게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큰 욕심은 없었다. 막내 아이가 24개월이 되었기로서 마법처럼 모든게 쉬워지는 건 아닐테니. 그저 한숨 돌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암흑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나는 심적으로 더욱 힘들어졌는데,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조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내용이 비슷했는데, 이제는 뭐라도 해 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얹어, 그들이 가진 나의 이미지를 어떠한 직업에 연결시켜 추천을 하곤 했다. 거기엔 유튜버, 깨톡 이모티콘 디자이너, 댄스강사, 공방주인 등이 있었는데, 그 어느것 하나 내가 할 수있는 것이나 하고싶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더욱 당황스러웠다.

 이제는 안다. 그 모든 것이 애정에 기반한 관심이었다는 것을.

그런 이야기를 했던 이들 모두 나의 최측근이었는데, 아마도 내가 아까웠던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치열하게 공부하던 시절, 꿈꾸던 시절을 모두 봐왔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던 시절에 갈구하던 것을 한 인간으로써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게 지금은 고맙게 느껴진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지금은 안다.

그러나 그때는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낼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와같은 생각이 들었을 뿐.
'왜 나에게 또 뭘 하라는거지!'
'지금의 나는 충분치 않다는 거야?'
'내가 지금 한가하다고 생각하나?'
'엄마 무시하냐'
등등......

 그런데 머지 않아 알게 되었다. 사람맘이라는 게 참 알수가 없다. 이전보다 여유있는 시간이 생기자 어느새 뭔가 새로운 것, 그러니까 육아말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은 어느새 간절함이 되었고 그 간절함은 우울함이 되었다.

 지난 8년은 내게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에게 너무나 가치있고 귀중한 시간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다시 어떤 일을 하려 한다면 그 8년은 긴공백기였다. 

 이쯤되면 글을 읽는 이 중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거참, 복잡하게도 사네!'
그렇다. 나는 이런 인간이다.

나의 브런치 아이디가 왜 "비심플"이겠는가. "심플"이 아니고.  일종의 나를 향한 자기암시다.    (제에발)"심플해져라!"하는.
 나란 인간은 이러하다. 머리 생각은 치타처럼 달려 이미 이 일의 결말에 다 달아 있다면, 행동력은 엉금엉금 거북... 아니다. 그저 나무에 매달린 나무늘보일 때가 많다.

 시작도 하기 전에 될지 안될지를 머리로 영원히 시뮬레이션 해보는 인간.

 그런데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지금의 내가 현실적으로 뭔가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자 화살은 내 가장 가까운 이에게 향했다.

 내 사랑스런 친구였던 남편은 어느새, 이른 나이에 결혼을 주도하고,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기를 권유하고, 아이를 셋 낳자고 제안한, 극악무도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내 귀여운 아기 천사들은 시끄럽고 은혜도 모르고 분위기파악도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있었고.

 인정한다. 내가 비열했다. 그 모든 선택은 결국 내가 했던 것임을 회피하고 싶었다. 남편도 아이들도 죄가 없다. 내 의견을 무시하고, 나를 돌보아주지 않은 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탓을 하려면 나에게 해야했다.

 이내 나는 나 자신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내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나의 우유부단함과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경멸했다.  매일 밤 나 자신에게 '만약에'라는 효력없는 질문을 던지며 가슴을 쳤다. 결국 화살이 나에게 돌려졌다해도 나아지는건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나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바꿀 수 있는가?"
  "만약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는가?"
  "과거의 선택으로 현재 얻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가?"
 대답은 모두 "No"였다.
 더 이상 이러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아는 동생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그 애는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결혼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혼을 고민 중이라 했다. 그 아이가 이혼을 하고픈 가장 큰 이유는 "내 인생"이 자꾸만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딸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처럼 어린 나이에 혼한 나는 행복한지 물었다.
 갑작스런 소식에 적잖이 놀란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직하게 얼마전에 나 역시 "내 인생", "내 꿈" 생각에 힘들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내 인생", "내 행복"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상담을 해주다 오히려 나와 내 가족의 관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시간의 법칙과 사회의 법제도를 떠나 생각한대도, 지금의 나는 혼자로서 행복할 수 있었던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우리는 떨어질 수 없게 사랑이란 끈으로 묶여있었다.
 그들의 불행이 곧 내 불행이 되고, 그들의 행복과 안녕이 곧 나의 기쁨과 안심이 되는.
 나는, 새로운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순히 나를 생각할 것이냐, 아니면 너를 생각할 것이냐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그리고 이 관계는 반대로도 동일하게 적용 되었다.
"내가 행복해야 너도 행복하다"

 
 엄마가 된 이후로 나는, 아이가 행복한 것이 곧 나의 기쁨이라 여겨, 많은 날 동안 오롯이 나 자신으로 행복해지는 것을 포기해 왔다.

 희생이란 거창한 말을 붙이는데는 손사레를 치면서도, 무슨 일이든 아이가 우선이었다.

 육아계에선 이미 유명한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나도 들어 봤지만, 그 동안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세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수선을 피우고 다녔건만. 어째서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을까. 내가 돌보지 않은 나는 길을 잃고 엉엉 울고 있었다.

 나는 나를 돌보기로 했다. 그리고 간과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우린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묶인 존재들인 동시에, 독립된 존재로써 존중받아야 함을.
 나의 소망이 존중받아야 하듯, 그들의 개성과 소망도 존중받아야 함을.
  나는 이제 조화롭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너도, 나도 무시하지 않고 같은 위치에서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가려 한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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