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심플 Sep 22. 2020

부쩍 친해진 친구가 있습니다

 육아로 확 줄어든 인간관계에 코로나까지 덮쳐 요즘은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없다. 대신 코로나 덕에 부쩍 가까워진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건 너튜브이다. 그 친구가 소개해 준 친구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음악이다.

 나는 본디 핵인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순이도 아니다. 나는 약간의 변종으로, 혼자서 나다니기를 좋아한다. 강제 집순이가 된 후로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참아져도 나갈 수 없는 건 참기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이들이 잠든 밤, 유튜브로 다른 세상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나는 본디 웰메이드 드리마를 찾아 보길 좋아해 드라마 하이라이트를 몰아보곤 했다. 나와 비슷한 상황인 이들은 알겠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드라마의 산을 넘고 먹방의 숲을 지나 어쩌다 어떤 가수의 듀엣 무대를 보게 됐다. 그리곤 그 가수에게 빠졌다. 무대 몇개를 찾아보았더니 다음날부턴 내 좋은 친구가 알아서 관련영상을 추천 해주었다. 안본 무대가 없을 무렵 또 여러 가수들이 나와 버스킹을 하는 프로그램을 소개시켜주었다 (이후 각 가수별로 무한반복).
이쯤되면 이 친구는 거의 "듀오"(결혼해듀오)였다.  그러다 나는 음악 그 자체와 사랑에 빠졌다.

 음악 안좋아하는 사람 있겠냐만은, 나는 대중가요보다는 드라마, 가수보다는 배우, 멜로디보다는 스토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십대때 내 친구들은 대부분 god 아니면 신화 팬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대걸레를 잡고

"잘가",
"가지마",
"행복해",
"떠나지마"

떼창을 하던 그 시절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나는 소지섭 팬이었다.

 음악사이트 탑100에 랭크되는 곡들을 듣고, 종종 그 중에 애정하는 곡들이 있었어도, 소위 음악 좋아한다는 친구들처럼 가수의 목소리를 구별한다거나, 다양한 장르의 곡까지 찾아듣는 열심은 없었다.
 관심이 없다보니 나는 자연스레 소위 말하는 "막귀"로 자랐다. 가수들이 얼굴을 가리고 나와 남의 노래를 부르면 아무도 못 맞췄다.

그런데 육아를 하며 다시 만난 음악은 생각보다 나와 잘 맞았다.
 사실 아이들이 깨어있을때는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눈과 귀의 집중력을 동시에 요하는 영상물은 시청하기가 힘들다. 시도때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요구사항에 내가 뭐한다고 이걸 보고있나 현실자각타임이 오고, 결국은 그냥 때려치우게 된다.
 그런데 음악이야, 들으면서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도 감시, 아니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음악은 나로 하여금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었다. 과거 육아의 세계에 들어서기 전 내가 무언가에 집중해야 한다면, 난 그저 내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됐다. 그래서 딱히 음악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용함"은 그때의 내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권리였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고 난 뒤, 내게 조용한 시간이란 허락되지 않았다. 소리를 내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어폰을 꽂으면 음악이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아이들의 고함소리와 블럭통 들이붓는 소리는 어렴풋이 멀어지고, 내가 듣는 음악의 무드만 남는다. 애들 싸우는 소리를 듣다가 이별의 아픔 한가운데로 가는 그 느낌을 아는가. 타임머신같은 그 느낌이 나는 참 좋다.
 그 속에서 나는 글 쓰기에 집중할 수도 있고, 글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고난 중에 얻은 보물같은 친구이다. 난 왜 이 친구의 진가를 코로나로 아이들과 강제 집콕을 하고 난 뒤에야 알았을까. 남들은 이런 사연 없이도 잘만 알던데. 어쨌거나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다. 코로나가 내게 좋은 일도 하긴 했다. 그걸로 됐다.

작가의 이전글 그럼에도 감사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