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페미니즘 하기(5)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성별로 인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곳곳의 차별을 찾고 그를 타파하고자 하는 이론이자 운동이다. 필자는 <엄마와 페미니즘하기> 꼭지를 시작하며 ‘엄마’와 ‘아빠’라는 존재가 겪어 온, 겪고 있는 차별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특히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의 여성과 남성인 엄마와 아빠를. 가부장제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은 뜻풀이에 ‘가부장이 가족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가족 형태. 또는 그런 지배 형태’라고 쓰고 있다. 가부장의 지배를 받는 가족도 가족에 지배권을 행사하는 가부장도 누가 승자라 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구조의 피해자다.
함께가는 예술인 130호에 실린 정진리 객원필자의 글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중 일부를 다시 살펴보자.
“젠더 담론을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수용해 성별 간 혐오가 번지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한 태도 또한 결과적으로 잘못됐다. 여전히 뒤쳐진다 할 수 있는 여성의 인권을 신장하고자 하는 취지는 십분 동의하나, 사회 전반의 합의가 부족한 날것의 목소리와 사유가 남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사실 가부장 제도란 여성을 착취하기도 하지만 보호하기도 하는 고전적인 시스템인데, 그러한 제도를 무너뜨리는 한편 여전히 보호받기를 부르짖는 모순적인 행보가 발목을 잡았다.”
위 글에서 ‘젠더 담론’은 페미니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어느 이론과 운동이 사회적 합의를 100% 이룬 후 사회에 퍼져 일상에 스며들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묻고 답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어떤 차별과 혐오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지 찾고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도가 ‘여성을 보호하기도 하는 고전적인 시스템’이라는 말은 남성중심의 근대적 사회구조에서 여성을 보호해야 할 존재로 볼 때에만 의미가 성립될 것이다. 그러한 시각 안에서만 페미니즘 이론/운동이 제도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여전히 보호받기를 부르짖는 모순적인 행보’로 보일 것이다. 모순은 사회구조에 있지 페미니즘에 있지 않다.
1, 2편으로 분재할 ‘아빠 특집’은 그저 엄마의 이야기만 쓰면 아빠가 서운할까봐 준비한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생애 동안 겪는 어려움을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나의 시 스승, 나의 술친구, 내게 김씨 성을 물려주고 ‘예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나의 아빠, 김봉진의 이야기다.
태어나보니 종갓집 종손의 아들이었다
아빠는 5남매 중 넷째, 종가의 대를 이을 종손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난 종손이다. 딸, 딸, 딸, 딸, 그 다음 태어난 아빠. 가문을 이어갈 아들이 드디어 태어났으니 집안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집안 어른들은 아빠의 바로 손윗누이인 넷째 고모를 유독 예뻐하셨다고 한다. 따로 시장에 데려가 예쁜 구두며 원피스도 사주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땅을 잘 팔아서’. 아들이 동생으로 태어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뭔 소리야!’ 그만큼 아빠는 손 귀한 집에 태어난 귀한 아들이었다.
아빠는 대여섯 살 즈음부터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자리에 겸상하여 집안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는 데 함께했다고 한다. 집안을 가꾸는 일이며 문중 산소의 위치를 익히고 집에 오는 손님을 맞았다. 종갓집이라 평소에도 집안 어른들이 오는 일이 잦았지만 제사 때나 명절은 더했다. 제사와 차례를 지낼 때면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다음 아빠, 아빠 뒤에 아빠의 삼촌인 나의 작은할아버지들이 섰다. 집안의 서열에 따라 순서대로 자리한 것이다. 어려도 어른들보다 앞에 선 아빠. 그곳이 장손의 자리였다.
가세가 기운 가문, 장손의 책임
집에 오래된 뒤주가 있다. 증조할머니께서 쓰시던 것으로 지금까지도 쓰고 있으니 우리 집에 3대째 내려오는 물건이다. 뒤주가 원래 ‘세자 감금용’이 아니라 쌀 등의 곡물을 넣어놓는 것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어릴 때엔 모든 집에 뒤주가 있는 줄 알았는데 친구 집에 놀러가서 자동식 쌀통을 보고 가히 충격을 받았었다.
옛날 우리 집안이 컸을 때는 사람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만한 그 뒤주에 쌀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고 한다. 집안사람이 집에 방문하는 경우가 잦았고 오가는 객이 요청하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에 오는 사람을 굶겨서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이 종갓집의 규율이었다.
김해 모 동네에 우리 집안 땅을 밟지 않고 지날 수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여전히 뒤주에는 쌀이 들어있지만 가세는 크게 기울었다. 할아버지도 어린 아빠도 장손으로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이 우선이었다. 아빠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그냥 잘한 수준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는 과학반 활동을 하다가 교사에게 과학실 열쇠를 받아 직접 관리하며 실험을 하기도 했단다. 학생 대상 과학경진대회에서 버스 손잡이에 있는 세균이 증식하여 감염병을 옮길 수 있다는 발표를 해 상도 받았다. 아니 이거 코로나19 팬데믹에 나오는 얘기 아닌가!
아빠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 빨리 일을 시작해 집안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렇게 아빠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처음 공고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담임교사가 무슨 일인가 하고 학부모 면담을 요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공고에 진학해서도 성적이 좋았던 아빠는 공대에 입학했고 지금까지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제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전 있잖아요....
나는 아빠와 술을 마실 때면 친구가 된다. 아빠는 나를 자신의 딸이 아니라 술친구로 대하며 ‘자네’라고 칭한다. 아빠와 내가 술잔을 기울이다 시곗바늘도 기울어지면 엄마와 동생은 자러 가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계속 술을 마신다. 아빠는 어디서도 말하지 못한 마음을 내게 들려준다.(물론 다음날 아침 엄마에게 둘 다 엄청난 잔소리를 듣게 된다.)
청소년기 아빠는 어릴 때부터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기 힘들었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절에 들락날락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주지스님이 잡초를 뽑으라고 하면 ‘같은 풀이고 생명인데 왜 어떤 것은 잡초라고 하고 어떤 것은 뽑지 말고 놔두라고 하냐’며 대들기도(?) 하고 경전 공부도 했다. 출가하겠다는 마음도 먹었지만 그 마음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 귀한 집의 종손,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라 귀하게만 컸을 것만 같지만 아빠는 그만큼 홀로 외롭고 답답한 시간을 살아내야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제를 습득하고 체화해 대를 이어가야만 했다.
아빠에게도 꿈은 있었지만 취향이나 취미는 없다. 나에게 시를 가르쳐주고 재즈를 알려주고 도서관에서 홀로 책을 찾게 하고 많은 곳을 여행하게 해준 아빠지만 정작 본인의 취미는 없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할 시간보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인가 찾고 행해야 할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아빠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다부동전투에 참전하셨다. 한 마을에서 열 댓 명이 징집되어 갔는데 돌아온 것은 2명뿐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부대끼며 살았던 사촌형제들이며 친구들이었다. 할아버지는 군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도 받으셨지만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으셨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이유와 살아 돌아 왔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빠가 대학을 다닐 때, 집에 친구들을 데려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아빠와 아빠의 친구들에게 물으셨단다.
“너희는 데모 안 하냐?”
“아이고, 아버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저희는 착실하게 공부만 하지 위험하게 밖에 안 나갑니다.”
“예끼 이 녀석들아! 대학생이나 되어서 사회가 잘못되었으면 바로 잡아야지. 데모 안 하는 게 자랑이냐!”
할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꾸짖음에 아빠와 친구들은 학교 안팎에서 어떻게 데모를 하고 있는지 소상히 고하였다고 한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봐 거짓말을 한 것이었지만 할아버지는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고 혼쭐을 내셨다. 아빠의 아빠는 그런 분이셨다. 불의를 참을 수 없고 정의로운 일을 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는 분.
나와 동생이 태어났고 IMF로 가세가 더 기울었을 때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시라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뜻은 완고했다. 아빠는 무릎을 꿇고 손주들을 봐서라도 다시 생각해달라 빌었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품에서 훈장이며 관련된 모든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할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도 당신의 뜻을 지키고자 할머니께 부탁하지 않으셨을까 추정한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결정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당신의 자존심 한번만 굽히면 손주들도 덜 힘들 수 있는데 그 마음이 무엇이기에 그리고 완고하셨는지 원망도 많이 했다고 한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할아버지나 아빠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무와 책임감으로 살아온 종손이기에 굽힐 수 없는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다. 가부장제 구조 속에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에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벽을 세우고 아무리 힘들어도 문을 열지 않는다.
굳건한 벽을 세워오던 아빠가 처음으로 문을 열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이 태어나며 ‘딸바보’가 되면서부터.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32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