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페미니즘 하기(4)
'월남치마'에 '보로꾸' 담던 대학생
"(플리츠 롱스커트를 입고)엄마, 이 치마 어때?"
"잘 어울리네. 엄마 대학 다닐 때도 월남치마 많이 입었는데."
"이게 월남치마야? 그때 유행이었어?"
"치마폭이 넓어서 보로꾸를 많이 담아 나를 수 있었거든."
"보로꾸는 또 뭐야?"
엄마의 대학 시절은 어땠기에 ‘월남치마’에 ‘보로꾸’를 담고 날랐다는 걸까. 지난 호에서 말한 대로 엄마는 주간반으로 편입하여 대학교 2학년 1학기부터 낮에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단숨에 전산과 ‘인싸’가 된 엄마는 캠퍼스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지만 하수상하던 시절, 곳곳에서 독재타도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엄마와 친구들도 중간고사를 보이콧하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벽돌을 보로꾸라고 했어. 엄마 학교에서 서면 쪽으로 가는 길에 벽돌 공장이 있었는데 공장에서 안 쓰는 깨진 벽돌을 주워다가 가방에 담아서 서면까지 걸어갔지. 서면에 가면 저 앞에는 전경들이 쫙 진을 치고 있는 거지. 남자 선배들이 앞줄에 서서 벽돌을 던지고 여학생들은 벽돌을 앞쪽으로 날라주는데 한번에 많이 날라야 하니까 치마폭에 담아다가 그대로 뛰어가고 그랬지. 그래서 월남치마를 많이 입었어."
그랬다. 때는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전국 곳곳에서 피어오르던 때. 엄마의 캠퍼스 생활은 몇 달만에 야외 투쟁으로 바뀌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기도 하고 최루탄 가스를 피해 골목 안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허겁지겁 아무 식당이나 슈퍼로 들어갔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셔터를 내리거나 전경에게 거짓말을 하며 학생들을 숨겨줬다. 고생한다며 밥을 얻어먹은 때도 있다고 한다.
"최루탄 가스 그게 얼마나 독한지, 눈물 콧물 침 다 흘리고 매운 거 막아보겠다고 눈 밑에 치약을 바르고 그랬어. 담배 연기가 매운 거 중화시켜준다 그래 가지고 얼굴에 대고 담배 연기 피워주고. 그래도 또 거리로 나가서 데모했지. 아침이슬도 많이 불렀고, 노래에 대머리, 주걱턱 가사를 넣어서 부르고 그랬어. 대머리, 주걱턱이라고 하면 누구 말하는지 다 알았거든."
엄마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소풍날 갑자기 교사가 소풍이 취소되었다며 학생들에게 다 집에 가라고 해서 집으로 곧장 흩어졌다고 한다. 집에 갔더니 외할머니가 TV를 보며 대성통곡을 하고 계셨고, 엄마는 이유도 모르고 외할머니가 울어서 따라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TV에 나오고 있던 속보, 엄마의 소풍이 취소된 이유는 육영수의 피살 소식이었다.
독재라는 것은 그러했다. 정확한 내용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지만 국가가 만든 체제 속에서만 살고, 살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냥 살아지는 대로 살지 않는다. '이건 아니다' 싶은 사람들, 군부독재를 '살아내는' 사람들은 민주화를 꿈꾸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엄마는 1987년 6·29선언을 받아낸 대학생으로 나라를 뒤집었다.
며느리 삼고 싶은 회계 여직원
독재를 끝낼 결심, 마침내 민주화를 이루고 대학을 졸업했다. 엄마는 우수한 성적으로 금방 취직을 했다. 제법 큰 규모의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했다.
얼마 전 TV에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방영했다. 앞부분을 놓친 엄마에게 설명을 해줬다.
"상고 나온 여직원들만 똑같은 유니폼 입고 아침에 출근해서 믹스커피를 타는데 사람마다 기호 맞춰서 타서 자리에 막 갖다줘."
"옛날엔 다 그랬지. 유니폼에 구두까지 맞춰 입고 누구는 커피 둘, 프리마 둘, 설탕 하나 다 외워서 커피 타다가 책상에 갖다줘야지, 담배도 자기 피는 걸로 사다 줘야지, 신발 구두 닦는 데 맡겼다가 찾아다 자리에 두고 그랬어."
"헐… 방금 그런 장면 영화에 다 나왔어… 진짜 있었던 일이라니. 도대체 왜 그랬대?"
'보로꾸'를 던져가며 자기 손으로 민주화를 이룬 엄마가 일터에서 손에 쥔 것은 커피를 타는 찻숟가락이었다. 남성 직원들의 기호식품인 커피와 담배를 책상마다 가져다 놓고 사무실 청소를 넘어 남성 직원들의 신발 청결 상태까지 챙겨야 하는 게 엄마의 업무였다. 매출, 매입 계산을 하고 장부를 쓰는 회계 직원 본연의 업무와 별개의 일. '여직원'은 그저 남성 직원의 보조였다.
회사 사람들이며 거래처 사람들은 엄마를 보며 "예쁘다”, "일 잘한다”,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 "딱 내 며느리 삼고 싶다.” 같은 말을 했단다. 동일한 노동자이기보다 결혼해야 하는 젊고 예쁜 아가씨, 딱 그것이 젊은 여성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남결출’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친구는 있습니까?', '결혼할 생각은 있습니까?', '출산 계획은 있습니까?'. 여성이 면접에서 많이 받는 질문 3종 세트다. 임신을 하거나 출산할 때 휴직을 하면 눈치를 받고 해고 위협까지도 당하는, 애초에 여성이라서 채용이 되지 않는 지금과 그때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성평등은 그 논의에 포함되지 못했다. 민주화를 외친 여성들이 노동현장에서 설 자리는 어디였는가. 과연 동등한 위치에 있었는가.
노래하는 오월어머니
민주화 이후 여성의 자리는 노동 영역에서만 제한당한 것이 아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여성의 자리는 남성의 자리와 관련되어진다. 지난 5월 14일 5·18민중항쟁 42주년을 맞아 2022 <오월어머니의 노래> 순회공연의 부산 공연이 민주공원에서 열렸다. 기념품으로 진달래꽃 색 손수건을 나누어주었다. 꽃분홍색이 예쁘다고 생각할 때, 이 공연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어 손수건을 기념품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실로 그러했다. 공연 내내 5·18민중항쟁 때 남편을 잃은 아내, 아들을 앞서 떠나보낸 어머니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4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빗방울처럼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 속에 한 줄기 의문이 피었다. 민주화운동에서 왜 여성은 피해자/희생자의 어머니 혹은 아내일까. 가부장을 잃은 상황에서 그 역할을 해야 했던 여성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먼저 떠나간 남편과 아들을 그리워하는 여성만이 남았다. 어느 '오월어머니'를 소개할 때는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들의 어머니'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렇게 여성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존재, 특히나 가부장제 내에서의 존재로만 자리한다. 여성 홀로 '오월의 ○○○'으로 호명될 수는 없을까? 민주화운동은 남성만 했을까? 여성의 이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민주화운동의 유가족 역시 피해자이다. 생존자로서 그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오월어머니’들이 40년이 지나 무대에 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슬픈 현실을 마주하는 매우 힘든 트라우마 치유의 과정이자 누구나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증언이다. 「망월동 고개를 넘어가네」에 나오는 가사 '망월동 고개를 넘어가세'처럼 과거를 넘어 미래로 향하는 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피해자를 넘어선 '저항자', 저항자로서의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지면에 엄마의 이야기를 쓰며 나의 엄마를 '엄마'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에 살고있는 한 명의 여성, 홍경애라는 인물로 바라봐야 함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2010년대 초 대학 반값 등록금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말했다.
"엄마로서는 너희가 시위하러 간다고 하면 걱정돼. 두 딸이 무슨 일 당할까봐 무서워. 하지만 엄마도 대학생 때 데모했어. 아니다 싶으면 바꿔야 되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절대 안 바뀌어. 너희가 마땅히 가야 할 데라고 생각해."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31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