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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선 썬 Jun 28. 2022

낮엔 공장, 밤엔 학교

엄마와 페미니즘 하기(3)

“그럼 돈은 누가 벌고?”


 엄마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여자애가 대학은 무슨 대학이라거나, 고등학교 공부까지 했으면 됐다거나 하는 말도 아니라 앞으로 돈을 누가 버냐니. 철 지난 유행어 ‘소는 누가 키우고!’ 같은 말씀을 왜 하셨을까. 외할아버지께선 당신도 당신의 아들도 일을 못하는 판국에 큰딸이 대학에 진학해 다니던 공장이라도 그만두면 집에 돈 버는 사람이 없어지니 큰딸의 대학 진학을 완강히 반대하셨다. 

 엄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돈을 벌었다. 1년 동안은 신발공장에서 일만 했고, 3년 동안은 산업체 특별학급 제도를 통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산업체 특별학급 제도는 산업체에서 일하는 청소년들에게 중·고등학교를 다닐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부분 인근 중·고등학교에 야간특별학급을 두어 운영했다. 엄마처럼 신발공장을 다니거나 섬유공장을 다니는 여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신발과 섬유산업은 그 시절 부산에서 가장 유망했다. 학생들이 다 일을 하니 소풍은 공장이 쉬는 일요일이나 휴가기간에 갔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이른 아침 생선 장사를 하러 나가시고 엄마는 출근 준비를 하며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이모의 아침식사까지도 다 준비했다.


산업체 특별학급 제도로 다닌 고등학교. 퇴근 후 어두운 저녁에 등교했다.


  엄마가 어린 나이부터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은 단순히 집이 가난해서가 아니었다. 좀 더 국가적 차원의 문제였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일을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연좌제 때문이었다. 엄마의 당숙, 그러니까 외할아버지의 사촌 중 한 분은 비전향장기수였다. 당시 말로는 빨갱이. 엄마의 집안은 ‘빨갱이 집안’이었다. 


연대책임이라는 굴레 속 책임이라는 멍에

 연좌제는 범지를 저지른 자와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게 하고 처벌하는 제도다. 사극에 자주 나오는 대사인 ‘죄인의 삼대를 멸하라!’가 바로 연좌제의 한 형태다. 한국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하지 마라’는 사책임개별화원칙이 선언되며 연좌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 직후인 7월 연좌제는 부활했다. 이른바 ‘사상범’의 가족 또는 친족을 고급공무원으로 임명하지 않거나 해외여행, 출장 등을 제한하고 형사책임 이외의 불이익한 처우를 과하곤 했다. 부활한 연좌제는 19년간 유지되다가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인 1980년 8월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현재는 헌법 제13조 3항에서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여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다. 

 연좌제라는 굴레로 외할아버지는 이렇다 할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으셨다. 일자리를 구할 때마다 가로막혔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집에서 ‘공자 왈 맹자 왈’을 읊으며 드문드문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정도였다. 80년에 연좌제가 법적으로 없어졌다고 한들 사회의 인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집안의 3대 독자인 외삼촌도 대학까지 갔지만 어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친척 중에 비전향장기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연좌제라는 사슬이 온 집안의 발목을 옥죄는 중에 어떻게 엄마와 엄마의 엄마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여성은 애초에 ‘일’을 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 녹아 있다. 여성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것과 ‘직업’을 떳떳하게 가지고 일하는 것은 다르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여성이 하는 일은 일이 아니었기에 연좌제가 있다 해도 가로막히지 않았다. 여성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사회의 고정관념은 반대로 여성을 일하게 만들었다. 돈을 벌어오는 일과 집안일 둘 다. 그렇게 빨갱이 집안은 여성이 일해 버는 돈으로 먹고 살 수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진로나 진학, 미래의 삶을 고민할 여유는 허락받지 못한 채 낮에는 온 식구의 식비와 오빠와 동생의 학비를 벌면서, 밤이 되면 졸음을 참아가며 겨우 자신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모든 공장이 쉬는 날 간 소풍


큰딸은 살림 밑천

 큰언니/큰누나가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하며 집안을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흔한 서사다. 노래에도 시에도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워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부르며 미싱을 돌리는 여성, 월급의 반 이상을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부치는 여성, 제 먹고 싶은 것도 입고 싶은 것도 참으며 돈을 모아 동생들 학비로 주는 여성.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속담은 집안의 맏딸은 시집가기 전까지 집안 살림을 도와주기 때문에 밑천이 된다는 뜻이다. 역시 속담은 현실 사회를 반영한다. 

 조앤 W. 스콧, 루이스 A 틸리는 『여성, 노동, 가족』에서 시대에 따라 여성의 노동 형태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은 가족 구성과 형태, 필요에 따라 정해졌다고 말한다. 


“여성 노동자를 일반적인 (남성) 노동자의 범주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여기게 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여성이 적어도 두 가지 역할, 즉 생물학적 역할과 경제적 역할을 한다고 여겨짐으로써, 여성은 가치가 낮은 노동자가 되고 임금도 적게 받으며, 그 결과 가족이 부양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가족관계는 노동시장의 비대칭성에 상응하며, 그와 동시에 그런 비대칭성이 기초하는 구조를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여성 노동 가족은 불가분의 범주가 되며, 서로 규정하고 서로 의존관계를 창출한다.”(조앤 W. 스콧, 루이스 A 틸리(2021), 『여성, 노동, 가족』)


 엄마가 어린 나이부터 노동을 한 것은 연좌제라는 사회 구조만이 아니라 그 연좌제로 영향을 받고 있는 집안의 필요에 따라 요구된 것이었다. 특히 젊은 미혼 여성으로서 엄마가 버는 돈은 모두 집안에 귀속되었다. 엄마가 일정 이상의 돈을 벌어야 할 집안의 필요, 곧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공장을 그만두고 대학에 다니는 것은 제한되었다. 집안에서는 엄마가 대학에 가는 것보다 공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어오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앤 W. 스콧, 루이스 A 틸리는 미혼 여성의 노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젊은 여성은 일반적으로 가구에서 노동했다. 노동과 소비에 대한 가족의 필요는 그녀가 자신의 집에서 일할지 말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어디에서 일하든, 그녀는 자신이 생활하는 가구에 의존했다. 그녀의 노동은 가족경제에 이바지하고 자신을 부양하는 수단이었다. 노동은 또한 이후 그녀 자신의 가족을 건설할 때 필요한 자원을 축적하게 하여 결혼을 준비하게 했다.”(조앤 W. 스콧, 루이스 A 틸리(2021), 『여성, 노동, 가족』)


모든 공장이 쉬는 날 간 소풍. 가운데, 요즘 패션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엄마의 모습


아버지, 저 일 그만두겠습니다

 외삼촌처럼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강경한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끝내 대학에 입학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전문대학 야간반으로. 등록금은 엄마가 일하며 조금씩 모아둔 돈으로 냈다. 엄마에게 대학 입학은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굴레에서 약간은 벗어나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는 탈출구였다. 1학년을 마칠 때쯤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얘기했다. 


“아버지, 저도 대학의 낭만이라는 걸, 캠퍼스 생활이라는 걸 느끼고 누려보고 싶어요. 야간반에서 주간반으로 편입하겠습니다.”
“그럼 일은 어떻게 하고?”
“일... 그만두겠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모든 가족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큰딸의 파업 선언이라니. 이번에도 외할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엄마는 중학교 졸업 이후 내내 다닌 신발공장을 그만두었다. 퇴직금으로 남은 등록금을 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외삼촌은 직장에 들어갔고 엄마는 밝은 햇살이 내리는 대학 캠퍼스를 누비며 낭만을 느낄 수 있었다. 집을 위해 돈을 벌지 않으며 자신만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주간반으로 편입한 엄마는 활발한 성격에 좋은 성적까지 받으니 금세 학과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중간고사 시험도 거부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1987년이었다.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30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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