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페미니즘 하기(8)
새색시 버선코 앞세워 나에게로 오라
“엄마는 어릴 때부터 너무 외로웠어. 가족이 많지 않으니까 명절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집을 보면 너무 부러워했어. 그래서 나중에 꼭 식구 많은 집에 시집가게 해달라고 빌었어.”
“식구 많은 집에 시집오긴 했지. 근데 엄마, 소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빌었어야지. 아들 많은 집에 막내아들이랑 결혼하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안 그러니까 시누이만 5명인 종갓집에 하나뿐인 종손이랑 결혼했잖아……”
엄마의 원가족은 3대 독자인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과 엄마, 이모뿐이다. 당시로서는 가족 구성원 수가 적은 편이었다. 엄마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육촌 오빠였으니. 어릴 때부터 늘 외로웠다는 엄마는 커서 식구가 많은 집에 시집가고 싶었다고 한다.
엄마는 대학에서 전산과를 졸업하고 금방 취업하여 일을 했다. 제법 큰 규모의 회사에서도 일했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어 이직을 고민하던 때에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 이직한 직장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자신의 담뱃갑을 엄마의 책상에 두고서 담배 피러 나갈 때마다 엄마 자리에 들러 한 개비씩 가져갔다고 한다. 엄마가 연유를 묻자 엄마 자리가 문가라서 그랬다고 한다. 아무리 내가 이 둘의 딸이라지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안 되는 말로 둘은 연애를 시작했고 1년이 넘도록 사내커플로 비밀연애를 하다가 회사에 청첩장을 돌렸다.
‘경상도 남자’답지 않게 다정다감한 아빠도 아빠지만 엄마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할아버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퇴근 시간 즈음이면 아빠가 아니라 엄마에게 전화하여 ‘홍군아, 집에 맛있는 것을 했으니 저녁 먹으러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고 문득문득 예쁜 꽃다발을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엄마는 이런 집에 시집와 며느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아빠는 ‘새색시 버선코 앞세워 나에게로 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를 써 엄마에게 청혼을 했다.
스물다섯,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사실 엄마아빠의 결혼식에 나도 참석했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엄마 아빠 뒤로 한복을 맞춰 입은 고모 5명이 섰는데 엄마는 마치 큰 날개를 펼친 양 든든했다고 했다. 살면서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고.(이후 고모들의 시집살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단녀’ 이전의 경단녀
지난 글에서 말했듯 엄마는 중학생 때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잠시 일을 쉬었고 졸업하며 곧장 취업해 일에 복귀했다. 결혼 후 엄마아빠는 함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빠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작은 회사를 차렸다. 임신한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이 고단하기는 했어도 아빠와 아빠 친구들과 함께 일하니 재미도 있었다고 한다. 태교를 위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면 모두가 졸려 해서 팝송을 종일 틀어놓았다고 하는데, 엄마아빠는 그 때문에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산달이 가까워졌을 때쯤 엄마는 사무실에 가지 않았고 이른 봄에 나를 낳았다.
내가 태어난 후 엄마는 육아와 집안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갓 태어난 나를 돌보는 것과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을 동시에 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어린 나를 엎고서 장례를 위해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듬해 엄마는 동생을 가졌고 겨울날 아주 힘겹게 둘째 딸을 낳았다.
그때에는 ‘경력단절여성’, 줄여서 ‘경단녀’라는 말이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회사에 ‘미스 김’은 있어도 결혼한 아줌마는 없었다. 엄마는 ‘경단녀’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 존재했던 경단녀다. 대학 졸업 후 아빠와 사내커플로 연애하다 결혼을 하고 자영업도 했지만 엄마는 나를 낳을 때쯤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었다. 동생을 낳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집안을 꾸려 나가는 것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라 전체가 무너졌다. IMF 사태가 터졌다.
보이지 않는 가장, 엄마
IMF로 아빠의 사업이 직격탄을 맞은 것은 아니다. 하나 둘 기업들이 파산하면서 그 여파로 우리도 부도가 났고 빚더미를 떠안은 채 회사 문을 닫게 되었다. 아빠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엔지니어였지만 아무리 기술이 좋다고 한들 그 시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가세는 크게 기울었다. 아빠는 다른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개발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몸을 써서 일을 하려니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병환이 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아빠와 어린 나와 동생 여섯 식구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더 필요했다. 엄마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니까 육아를 하며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 기혼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집 근처 공장에서 일을 하며 점심시간에는 집에 와 시부모님과 자식들 점심을 챙기고 다시 공장에 갔다가 저녁에 마치는 대로 집에 와 저녁 준비를 했다. 아빠의 회사도 부도가 났는데 소규모 공장이라고 살아남았을까. 엄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그때부터 내가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식당에서 일했다. 모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이었다. 일식집, 감자탕집, 횟집, 고깃집…….
나와 동생이 청소년일 때는 우리가 학교에 가 있는 낮 시간에 일할 수 있는 식당에 일하러 다녔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는 늦은 시간에 엄마가 집에 없더라도 잘 지낼 수 있으니 저녁 시간까지, 추가로 일하면 밤 12시, 새벽 1시 넘어서까지도 식당에서 일을 했다.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 집에 오더라도 엄마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종종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서 전날 남은 음식을 먹었다. 엄마는 부지런히도 남은 반찬이며 음식을 싸온 것이다.
그렇게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던 엄마는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받을 만큼 일을 잘했지만, 결혼 후 단 한번도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일이나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엄마는 쉬지 않고 일을 해왔지만 사회는 엄마의 일을 인정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가장으로서 살아왔다.
딸들은 결혼하지 마
“엄마는 우리 딸들이 결혼 안 했으면 좋겠어. 둘 다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하고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여자가 결혼하고 애 낳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해. 결혼 꼭 안 해도 돼. 엄마는 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 또래 여성들과 얘기해보면 대부분 엄마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다. 왜 우리의 엄마들은 자신의 딸들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 아빠를 만나서, 나와 내 동생을 낳아서, 딸들이 잘 커줘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엄마가 우리에게는 결혼하지 말라고 말한다.
최근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2030세대가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문항에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남성보다 여성의 부정적 응답 비율이 대체로 높다. ‘결혼은 여성에게 더 부당한 제도다’라는 질문에도 많은 여성이 ‘그렇다’고 답했다. 함께 직장을 다니고 있는 또래 미혼 여성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유는 결혼과 임신, 출산이 경력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때문이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 그 직무의 수행에 필요하지 아니한 용모·키·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 미혼 조건, 그 밖에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조건을 제시하거나 요구하여서는 아니’ 되며, ‘사업주는 여성 근로자의 혼인, 임신 또는 출산을 퇴직 사유로 예정하는 근로계약을 체결하여서는 아니 된다’.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 혼인, 가족 안에서의 지위, 임신 또는 출산 등의 사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다르게 하거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는 경우’를 차별이라고 규정하는 법이 있음에도 우리는 왜 불안할까?
법이 여성 근로자를 보장한다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언니들’이 결혼을 한다고, 아이를 가졌다고, 아이를 키운다고 ‘자발적으로’ 일을 그만두는 것을 봐왔는지.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든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든, 얼마만큼의 경력이 있든 여성이 공백기를 가지면 특히나 그 이유가 임신, 출산, 육아라면 휴식이 아니라 경력 단절이 된다는 것을 바로 옆자리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엄마가 그래왔기 때문에.
결혼 꼭 해야 해?
현재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기획전시 <가족의 역사: 틀, 전환, 확장>(2022.9.5.~2023.7.21)을 열고 있다. 전시 서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갑니다. 오랜 시간 그러했기에 얼핏 가족은 선험적이며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고정되어 있지도 단일하지도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 우리의 삶은 변화하며, 가족은 삶의 양식에 맞추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족의 역사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입니다.
또한 가족은 남녀 역할 형성과 사회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기본 집단입니다. 법과 제도, 관습이 만든 가족의 틀은 가족 구성원의 삶을 결정합니다. 때로는 규제하기도 합니다. 가족법을 바꾸고자 한 운동이 한국 가족 제도의 전환점이자 대표적 여성인권운동, 사회운동이 된 이유입니다.
오늘날 가족의 형태와 개념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본다는 것은 오늘을 대하는 미래적 관점을 갖는 일입니다. 이 전시를 통해 가족의 역동성과 의미,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대마다 합당하다 여겨지는 가족의 ‘틀’은 달랐다. 과거에는 여성이 호주인 경우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이래 가족과 가족 관계를 규정한 근대적 규범은 한국의 가족법과 가족정책이 되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시대가 변하며 이러한 틀을 바꾸고자 가족법개정운동, 호주제 폐지를 외친 이들이 있었다.
지금의 ‘가족’은 어떠한가.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는 성인 남녀의 법적 결혼을 통해 성립된 부부, 그 자녀들로 구성된 직계가족일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정상가족’일까. 가족의 모습과 의미는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비단 동성부부뿐만이 아니라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1인 가구, 동거인으로 함께 사는 친구 사이 등 법이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현실에서는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넓히고 그 상상은 차별 없이 법적으로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근데 딸들이 결혼했으면 좋겠어
딸들은 엄마처럼 살지 말라며 결혼하지 말라고 말하는 엄마는 또 어느 날에는 딸들이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아이도 낳아서 손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결혼도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라고 했다가 결혼해서 아이 낳으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인가! 딸들이 고생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고,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냐는 고전적인 조언인가 하고 생각할 때 엄마는 단서를 붙인다.
“여자가 능력이 되면 혼자 살아도 돼. 결혼할 필요가 뭐가 있어. 내가 내 능력 되면 혼자 사는 거지.”
혼자 살 능력이 되면 혼자 살아도 된다니.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일까. 물론 지금도 1인 가구의 가장으로서 나 하나 키우며 살아가기 버겁긴 하다. 하지만 혼자 살 능력이 부족하면 좀 어떤가. 그렇게 혼자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혼자 살 능력이 안 되면 결혼해야 한다는 결말로 꼭 이어질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결혼이 아닌 다양한 모습의 가족을 꾸릴 수도 있는 일이고. 어떤 방식이든 딸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엄마의 진심이니까.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35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