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페미니즘하기(7)
덕천동 큰손 홍여사
“아, 엄마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어!”
“진짜 조금씩밖에 안 담았어. 집에서 먹고 도시락 싸먹고 하면 며칠 먹을 것밖에 안 돼.”
“삼시세끼를 먹어도 이거 남아. 남으면 다 음식물쓰레기 된다니까.”
추석 연휴에 본가에 갔다가 명절 음식을 잔뜩 받아왔다. ‘엄마 제발 적게 담아줘, 다 못 먹어, 다 버려’를 몇 번을 말하고서야 겨우 쇼핑백 하나만 들 수 있었다. 말이 쇼핑백 하나지 그 안에 든 몇 개의 반찬통을 보면서 새삼 엄마의 손이 얼마나 큰지 느꼈다. 동생과 내가 독립하기 전 네 식구가 함께 살 때도 엄마는 손이 커서 음식을 늘 많이 했다. 우리는 엄마에게 음식 먹을 만큼만 하라고 잔소리를 했고, 엄마는 우리에게 사람이 손이 그렇게 작아서야 어떻게 먹고 살겠냐고 잔소리를 했다.
어릴 때부터 밥 한 공기, 국 한 그릇을 뜨더라도 엄마에게 손이 작다는 얘기를 매일같이 들었다보니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여행만 가도 너는 손이 너무 크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거 너무 많지 않냐고, 남으면 어떡하냐는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소금 간 적당히’처럼 ‘손’의 크기는 상대적이었고 엄마의 기준이 너무 컸던 것일 뿐. 내 손이 크다니! 우리 자매의 손이 크다니...!
엄마가 손이 큰 것은 종갓집 맏며느리이기 때문이다. 큰 집안, 제사 한 번을 지내면 제사상이며 손님 주안상과 다과상, 손님들 돌아가실 때 가져갈 음식까지 준비해야 했으니 음식을 많이 할 수밖에. 엄마 아빠의 말에 따르면 우리 집 ‘규모’가 이 정도면 많이 작아진 것이라고 한다. 엄마도 결혼하고서 할머니가 어찌나 손이 크신지 깜짝 놀랐다고 했다. 김치 한번 담그면 배추 세 접, 그러니까 한 접이 100개니까 배추 300포기는 기본이었고 된장 고추장도 집에서 직접 담가 먹었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절구에 콩을 찧는 일을 담당했고 낮이나 밤이나 메주와 함께 방을 썼다. 집에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뒤주는 늘 차있도록 해야 했다. 어느 때에 얼마만큼 손님이 올지 모르고 누가 오든 밥상을 차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도 엄마도 ‘사람이 손이 커야지’ 하고 하신 말은 그 옛날부터 당신들이 해내야 했던 일, 다른 이들의 밥상을 차리고 모두가 충분히 먹게 하기 위함이었다. 큰 손은 종가집의 안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아들 없는 설움
지난 호에서 얘기했던 바대로 아빠는 엄마가 동생을 임신했을 때 집안에 공포를 했다. 둘째가 딸이든 아들이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실제로 그러했다.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났다면 좋았으련만. 십 수 년이 지난 후에야 아빠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집안 어른들이 아빠에게는 말을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아들을 왜 낳지 못하느냐고,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얘기를 해왔던 것이다. 엄마는 아빠가 알게 되면 화를 낼까봐 혼자 속으로 그 말들을 삼켰었다.
지면에도 누구라고 밝힐 수 없지만 어느 분은 아들만 낳으면 아기용품이며 학비며 모든 것을 다 대주겠다고 했다. 또 한 번은 할머니 생신 즈음에 동생이 너무 아파 병원에 입원을 시키려는데 어느 분이 자식이야 죽으면 다시 낳으면 되지만 부모는 지금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생신 상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엄마는 길거리에서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종갓집 종손인 아빠의 말에는 쉽게 반기를 못 들지만, 그 안사람인 엄마, 종갓집 맏며느리는 집안의 요구를 들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종손과 종부의 딸들인 우리 자매는 아들이 아니기에 ‘子’도 아니고 죽으면 다시 낳으면 되는 딸들이었다.
중학교 때쯤 집안 어른들의 입김을 둘째치더라도 막내를 입양하자고 엄마 아빠 나 동생 넷이서 결정을 했다. 지금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와 동생이 엄마 아빠에게 계속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노래를 불렀고 동생이 생기면 우리가 다 키우겠다고 선언했었다. 엄마는 더 이상 임신도 출산도 할 수 없는 몸이었고 가족회의 끝에 입양을 하기로 결정했다. 엄마아빠는 입양 절차를 알아보았고 나와 동생은 막내 동생이 생긴다며 신이나 무얼 해줄지 기대에 차있었다. 엄마 아빠는 집안에 입양을 하겠다고, 엄마 몸 상태로는 더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아들을 원하신다면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처참히 무산되었다. ‘어디 남의 씨를 집안에 들이냐’는 한 마디 말로. 그때에서야 아빠는 우리 집에 아들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제대로 선포하였다.
아들 없는 설움이 이쯤에서라도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아들을 낳지 않겠다는 아빠의 두 번째 선언 이후 집안 어른들은 일종의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종손의 아들이 없으니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아빠는 딸들이 있는데 왜 우리 집에서 제사를 못 지내냐고 했지만 이후에 이어받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딸들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 된다는 이유로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고등학생일 때 우리 집에서 지내던 제사 중 3대조, 2대조 제사를 옮기기로 했다. 5촌 당숙부가 제사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제사를 옮기기로 했다.
제사가 줄어든다니 엄마가 드디어 덜 고생하겠구나 생각했다. 근데 엄마의 반응은 내 생각과 정반대였다. 제사를 옮기는 것을 아빠보다 더 반대하며 절대 제사를 못 옮긴다고 하는 것이다. 제사 지내고 나면 며칠씩 몸살을 할 정도로 힘들어 하면서 왜 엄마는 제사 옮기는 것을 반대한 것일까.
엄마의 반대에도 제사를 옮기기 위해 온 가족이 서울로 향했다. 제사를 옮기는 절차에 따라 우리 집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신주를 모시고 다시 제사를 지내며 의례를 치렀다. 엄마는 서울에서도, 부산에 돌아와서도 계속 울었다. <엄마와 페미니즘 하기> 연재를 시작한 가장 큰 계기가 이 일이다. 왜 엄마는 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에 그리도 슬퍼했을까.
하늘이 내려준 종갓집 맏며느리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는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을 자주 한다.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 하늘이 점지해준다는 뜻이었다. 엄마가 종갓집에 시집을 와서 손이 커진 게 아니라 종갓집 맏며느리가 될 만큼 손이 컸기 때문에 김씨 집안에 오게 된 것이라고. 종갓집 맏며느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자부심이 잔뜩 들어간 말이다.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제사를 옮긴 후 2번째 해에 엄마 아빠만 서울에 다녀왔는데 그때에도 엄마는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떻게 모셨던 제사인데, 가져간다고 했으면 잘 지내기라도 해야지. 상차림이 그게 뭐야. 그게 무슨 음식 차려 놓은 모습이야. 가족들이 다 모이기라도 해야지.”
그렇다.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그것도 하늘이 내려준다는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자신이 해야 할,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잘하는 데에서 자기 효능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엄마에게 3대조, 2대조 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신이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닐까 하는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결혼해 시부모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집안에 장례가 있으면 장례를 치르고 제사와 명절을 지내고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고 그렇게 집안 모두를 챙기며 종갓집을 가꾸고 대를 이어가는 것이 엄마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엄마는 그 역할을 본인이 잘 수행하는 데에서 자기만족을 느껴왔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자아를 동일시하였고 아들을 낳지 ‘못’해서 제사를 다른 집으로 옮기는 일이 벌어지며 가부장제 내에서의 정체성이 흔들리자 자신의 존재적 불안마저 느끼게 된 것이다.
딸의 입장에서 엄마의 결혼 후 30년의 세월을 바라보면 가부장제에서 너무나도 힘들었던 한 여성, 희생을 강요받아온 한 명의 여성이 보였다. 그래서 제사를 그렇게 지키려는 엄마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를 타파하겠다며 페미니즘을 공부할수록 내 안에서도 모순을 발견했다. 동시에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도 찾았다.
엄마, 한국 사회 중년 여성의 정체성 확립은 한국 가부장제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바라보는 동시에 가부장제 내에서 정체성을 확립한 여성을 보아야 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화한 엄마에게 그 정체성은 엄마를 옥죄는 것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역할을 잘 해냈을 때의 뿌듯함,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엄마에겐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엄마, 음식 많이 하면 힘들잖아. 이제 좀 적게 해도 되는데 많이 하지 마. 사다가 해도 되고. 다른 집들은 제사도 안 지낸다는데. 누가 엄마보고 뭐라고 하겠어, 엄마가 편한 대로 해.”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34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