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은 방콕에서 달라진 내가 있었다
16년 방콕 50일 살아본 이야기
2016년 여행 이야기를 이제야 꺼내본다. 유럽 병에 심하게 앓고 있던 그때, 혼자서 베를린에 갈 계획이었으나 동생이 합류하며 급하게 동남아로 방향을 틀었다. 동남아 어느 나라든 상관없이 제일 싼 비행기가 뜨는 곳으로 알아보고 있었을 만큼 동남아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그때는 그랬다. 이틀 후에 떠나는 괜찮은 가격을 발견하자마자 비행기 티켓을 샀다. 방콕 공항에 도착해 느껴지는 쾌적하고 차가운 공기에 여기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잠시, 공항을 벗어나자 뜨겁고 무거운 공기가 훅하고 들어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첫날, 하늘이 뚫린 듯 퍼붓는 빗소리와 번쩍거리는 천둥번개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말 전쟁이라도 난 줄 알고 구글에 방콕 전쟁이라고 검색하며 밤새 뒤척였다. 그렇게 사흘간은 동생한테 방콕 말고 유럽에 가고 싶다며 방콕 속 유럽을 찾아다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쌀국수를 찾기 어려운 시절에 엄마와 함께 맛본 쌀국수가 맛이 없던 게 원인이었다. 그 이후로 동남아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 동남아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방콕은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여행지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인연이 될 줄 나도 몰랐지만!
나의 동남아 첫사랑은 방콕이다
사랑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내 첫 동남아 사랑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첫인상도 별로고 관심조차 주지 않는 사이가 연인 사이로 훌쩍 발전한 것처럼 사흘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방콕이 좋아졌다. 그렇게 나는 방콕을 사랑하게 되었다.
첫사랑은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다
사랑에 빠지면 평소 관심 없던 것도 상대방에 관련되었다 하면 모든 알고 싶어 진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도 상대방이 땅콩버터를 좋아한다면 냉큼 먹어볼 마음으로 나는 동남아에 대해 특히 방콕에 대해 모든 걸 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 알레르기가 있다면 큰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랑으로 열린 마음은 새로운 경험의 기회가 된다. 방콕에 오기 전부터 관심 있던 IT 서비스는 한국에서 이용할 기회가 없었지만 방콕에서는 마음껏 사용해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거부해왔던 동남아 음식에 마음을 열자 새로운 음식의 세계가 열렸다. 이처럼 좋은 걸 새롭게 알려주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상대방은 신뢰를 바탕으로 환상이 가득 차 있던 세계에 대해 진실을 알려주며 충고도 서슴지 않는다. 방콕을 만나기 전에 동남아는 무조건 저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방콕으로 동남아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참 고마운 첫사랑이다.
IT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었다
방콕에 갔던 당시 나는 한창 유행하던 공유 경제라는 새로운 비즈니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표적인 서비스인 에어비앤비와 우버를 직접 이용해 보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법적인 문제 때문에 원활하게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갈증을 방콕이 해결해주었다. 방콕에 도착해서 예약해놓은 에어비앤비 숙소까지 우버를 불러서 이동했다. 우버 이외에도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했다. 쾌적하지만 큰 도로 이외는 다니지 않는 지상철 BTS, 사기당할까 봐 긴장하고 타야 했던 택시, 실제로 사기를 당했던 뚝뚝, 창문 없이 매연을 마시며 달렸던 버스 중 단연 우버가 제일 편리했다. 우버는 거리와 시간을 기반으로 금액이 부과되고 이를 앱을 통해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운전사와 요금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일이 없다. 또한 운전사와 차량의 정보가 나와있고 지도를 통해 실시간으로 위치를 알려주니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또한 에어비앤비에 머무는 동안 문제가 생겨 분쟁 조정 센터까지 들락거리며 메일을 주고받았다. 스트레스받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우연히 발생한 상황 덕분에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즐겁기까지 했다. 이때 한국 에어비앤비 팀이 대응을 잘해주어서 이력서도 내보았는데 연락이 없었다.
동남아 음식에 빠져들다
위에서 말했듯이 처음으로 먹었던 동남아 쌀국수가 맛이 없었다. 부정적인 최초의 경험은 아쉽게도 도전을 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동남아 음식을 더는 찾지 않았다. 방콕에 도착하고 사흘 동안 일식과 양식만 먹었다. 사흘 후, 길거리에서 넓은 팬을 가지고 면을 볶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홀린 듯이 이름도 모르는 음식을 주문했다. 그렇게 주문한 생에 첫 팟타이는 내 미각과 후각을 동남아 미식의 세계로 들어서게 해 주었다. 그 후 매일 오후 5시 30분에 리어카를 끌고 오는 아저씨를 먼저 가서 기다렸다. 아직도 그때 팟타이 맛이 혀 끝에 남아있다. 그 뒤로 동남아 음식은 나의 소울 푸드쯤으로 올라갔고 지금도 팟타이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동남아 음식과 식품을 사랑한다.
동남아 물가에 대한 환상을 벗겨주다
잘 알지 못했을 때는 동남아는 물가가 싸도 너무 싸서 돈을 남겨올 줄 착각했다. 방콕에서 호텔이 다들 싸다고 하길래 알아보았더니 50일을 살기에는 무리였고 한 달을 넘는 기간 동안 에어비앤비를 구하니 서울 강남 월세쯤 되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스무디를 마시고 맛있는 이탈리안 음식을 먹기도 하며 서비스 좋은 마사지를 받고 있으니 다 자기 쓰기 나름이라는 누구나 아는 진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18년 지금 방콕
오래된 연애는 편하다
그렇게 처음 방콕을 여행하던 당시에는 여러 음식을 시도했고 남들 다 가는 짜뚜짝 시장부터 룸피니 공원 등 핫스팟도 죄다 찾아다녔다. 이제는 첫사랑의 새로운 면을 알아가는 시기가 지나고 서로 점차 편한 사이로 발전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과 음식을 알고 있으니 특별히 새롭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즐거운 연인 사이 같다.
2년 전에는 동남아 하면 무조건 무에타이라는 생각에 무에타이 전용 운동복까지 사 입고 무에타이를 했었다. 힘들지만 재미있었고 다시 방콕에 온다면 한 달 내내 무에타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이번에 다시 돌아온 방콕에서 나는 무에타이 대신 매일 아침 요가를 한다.
요가와 채식
방콕에 와서 제일 좋아했던 지역에 호스텔을 잡고 2년 전에 찾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여전히 고기 국수가 좋아 땀을 뻘뻘 흘려가며 두 그릇씩 먹고 바나나칩을 오도독 씹으며 맛있다고 연신 칭찬을 한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사랑하는 부분이다. 그런 부분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그때는 하지 않았던 요가를 하고 그때는 몰랐던 채식 음식을 찾아 먹어 본다는 점이다. 더 이상 무에타이나 야시장은 찾지 않는다. 사랑이 변했냐며 원망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달라진 내 선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없다. 사랑은 똑같이 그대로 여야 하는 게 아니다. 변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변화 속에서도 이어나가고 있는 시간이 아직도 방콕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변해도 알아보고 온전히 인정해주면 그게 사랑이 아닐까?
첫사랑이었던 방콕과 나는 아직도 연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