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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 록 Oct 16. 2018

16. 아빠 닮았다는 말이 좋다  

치앙마이 한 달 살기

꼭 지 아빠를 빼다 박았네!
아빠, 우리 닮았데!

어릴 적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면 아빠를 꼭 빼닮았다고 했다. 습관처럼 듣다 보니 나는 당연히 아빠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커가면서 엄마 닮았다는 말을 더 자주 듣게 되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분명 아빠를 닮았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나는 아빠의 취미를 닮았다. 취향이 꼭 아빠다.


취미 부자 아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취미가 다양했다. 퍼즐부터 시작해서 다소 돈 드는 취미도 많았는데 이런 아빠를 온전히 이해하는 엄마 덕분에 나까지 취미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가 차곡히 모아놓은 DVD를 보면서부터였고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음질 좋은 스피커로 노래부터 라디오까지 들려주는 아빠 덕분이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정기 구독하는 아빠 곁에서 힐끔힐끔 보다가 먼 나라를 기웃거리게 되었고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며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보내준 아빠 덕분에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에도 낯선 사람 만나는 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


사진 찍어주는 아빠

아빠는 내가 제법 말을 잘하는 다섯 살 무렵부터 가족 영상을 남겨두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DSLR를 구입해서 우리 가족을 담기 시작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 찍힌 영상은 좋은 추억이었지만 중학생인 내 앞에 있던 DSLR은 자꾸만 날 불편하게 했다. 처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셔터가 눌리는 아빠의 카메라를 피했고 사진 속 내가 낯설어 보기 부끄러웠다. 몰래 삭제하기도 했다.


이제는 아빠 렌즈 앞에서 자유롭다
광화문에 같이 갈 사람은 나야 나

광화문을 중심으로 다소 넓은 종로 지역은 서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종로 일대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오롯이 스며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3년 동안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주말을 가족과 함께 보냈다. 보통 영화관에 가서 팝콘과 나쵸를 잔뜩 사들고 영화를 보고 외식을 했다. 카메라도 부족해 무거운 렌즈와 삼각대까지 들고 가서 아빠는 연신 우리를 담았다. 멀리 나가는걸 귀찮아하는 우리를 회유하는 데 성공한 날이면 집 근처 영화관을 벗어나 꼭 가는 곳이 광화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생 때부터 차가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멀리 나가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특히 주말에 렌즈와 삼각대까지 들고 사람 많은 서울 지하철을 타고 북적이는 종로까지 간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런데 우리는 다섯 가족이 함께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함께 졸면서 광화문으로 갔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영화관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 스타워즈를 보려고 종로에 있는 오래된 영화관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쉽게 맛볼 수 없던 고르곤졸라 피자와 스테이크를 먹고 광화문으로 걸어가는 길이 지금까지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어 부모님께 참 감사하다. 우리는 맛있게 먹고 사진을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동네를 벗어날 때마다 아빠는 항상 종로로 향했다. 아빠에게 왜 경복궁에 계속 가느냐고 물었다. 아빠는 전생에 왕이었나 보다고 말했지만 그냥 그곳이 좋았던 것 같다. 다른 가족들은 똑같은 궁에서 사진을 찍는 걸 점차 지겨워하며 아빠와 동행해주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아빠와 궁에 가는 게 점점 즐거워졌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빠와 단 둘이 종로에서 데이트를 하곤 했다. 삼청동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서촌 골목을 돌아다니고 광화문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는 소소한 데이트는 남자 친구보다 아빠와 먼저 했다.


2014년 광화문부터 시청까지 아빠와 활발히 돌아다니던 일상


2017년 운현궁에서 아빠가 쥐어준 민들레 씨를 날리며


아빠의 렌즈 앞에서 나는 자유롭다

아직도 렌즈를 통해서 보는 나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이번 연도에 기회가 되어서 생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한 번, 치앙마이에서 한 번 스냅사진을 찍어보았다. 사진을 찍으면서 어떻게 포즈를 잡아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신경을 쓰느냐 촬영 내내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마음 따뜻한 사진작가님은 나를 편하게 해 주셨고 촬영도 즐거웠지만 카메라 렌즈는 여전히 날 얼어붙게 만든다. 내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순간을 능숙하게 포착해 찍어주신 컷에서만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빠 렌즈 앞에서는 계속 자연스러운 나로 있을 수 있다. 억지로 웃지도 않고 긴장도 되지 않는다. 그냥 나로 서 있는다.

2014년 덕수궁 앞에서 한복 체험을 보자마자 아빠 이거 할래!

이제는 아빠가 저기 가서 사진 찍자고 할 때보다 내가 여기서 사진 찍어줘라고 할 때가 더 많다. 아빠가 담아주는 나는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다. 아빠가 날 편안하게 해 준다.

가족 앞에서는 깨방정을 참 많이 떤다
안녕!


처음 카메라를 사고 우리 가족은 사진을 찍기 위해 궁을 돌아다녔다. 이제는 돌아다니다가 사진을 찍는다. 한창 영어 학원을 다닐 때는 아빠한테 영어로 떠들기도 하고 요가를 하면서는 갑자기 멈춰서 요가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빠는 그냥 듣고 바라본다. 딸인 나를 사랑스럽게 봐준다. 사랑스럽게 보는 게 맞겠지?


나한테 이런 표정이 있는 줄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함께 먹으러 가주는 아빠는 최고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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