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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 록 Oct 16. 2018

15. 완벽하지 않으려는 연습

치앙마이 한 달 살이

사랑 그리고 착각

사랑은 억지스럽지 않게 흐르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사랑이 아닌 것 같아 괴롭고 죄책감이 들었다. 남한테도 나한테도 그 어떤 것에게도. 내가 생각한 완벽한 사랑의 상태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이번 과자 사건을 통해서다. 난 항상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존감이 높고 자신감이 있다고 착각했다. 과자를 연달아 일곱 봉지를 먹으면서 깨달았다.

난 날 사랑하지 않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일곱 봉지를 생각 없이 먹은 나를 자책하고 미워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상처 내고 있다는 사실 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후회하면서 애써 넘겼을 거다. 근데 이번에는 일곱 봉지다. 두 봉지 세 봉지가 아닌 무려 일곱 봉지. 침대에 아무렇게나 놔뒹굴러 다니는 텅 빈 봉지를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걸 내가 왜 다 먹었을까. 다 먹고 기분이 좋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나는 다 먹고 토할 것 같았다. 문제가 있었다.

출처: 헬스조선 기사


책 첫 장을 찢는 습관

나에게는 공책 첫 장을 찢는 습관이 있다. 종이와 펜의 궁합에 있어서는 중매쟁이처럼 까다롭게 고민한다. 아무리 좋은 종이에 비싼 펜으로 적는다 한들 궁합이 맞지 않으면 글자가 잘 적히지 않는다. 반면에 값싸고 잘 번지는 모나미 플러스 펜으로도 기가 막히게 술술 적히는 종이가 있다. 나는 새 공책을 펴고 첫 글자를 적을 때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하듯이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 종이와 펜이 궁합이 맞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모나게 적기라도 하면 첫 장을 가차 없이 찢는다. 화이트나 지우개로 지운 자국을 남기지 않고 깨끗한 첫 글씨를 시작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이렇게 한 장 한 장 찢다가 공책을 반 넘게 찢어버린 적도 있다. 고작 한 글자 때문에. 공책을 시작하는 그 한 글자를 반듯하고 완벽하게 적고 싶은 마음에 정작 중요한 글은 적지 못하게 된 격이다.


완벽주의 성향

완벽주의라는 단어가 좋았다. 완벽하다고 하면 빈틈없이 일도 잘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한 하비 같은 사람이 번뜩 떠오른다. 나는 오래전부터 완벽한 사람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왔다. 똑 부러지고 일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몰두하며 공격적인 하비 같은 사람을 동경해왔다. 이러한 동경은 어릴 적부터 차곡히 쌓였다. 한번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완벽하게 다 알고 싶었다.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학문에 완벽이라는 게 있을까? 나는 엉뚱한 걸 쫓고 잡히지 않아 불안해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손을 놔버렸다. 완벽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듯 노트 첫 장을 찢는 것처럼 완벽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남을까 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미드 Suits에 나오는 유능한 변호사 하비 출처: imdb 영상

완벽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나쁘지 않다. 그만큼 노력을 쏟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다만 나는 완벽한 것만 인정했다. 완벽과 완벽하지 않는 두 가지 상태로 나누고 완벽한 것만을 원했다. 그 중간 혹은 그 바깥에 있는 다른 상태는 안중에 없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가치를 두지 않았고 완벽을 위해서 잘해야만 했다. 노력했지만 못 한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그랬더니 완벽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외면하고 있었다. 일곱 봉지 과자를 먹은 나를 애써 외면하던 순간처럼 나는 완벽하지 않은 모든 것을 거부했다. 미숙하고 불완전한 걸 내면 깊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도하기가 겁이 났고 두려웠다.

시르사사나, 헤드 스탠드 동작

요가를 하다가 숨겨왔던 완벽주의 성향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처럼 곧게 펴져야 하는데 살짝 기우는 내 몸에 답답함을 느꼈다. 선생님이 자세를 잡아주고 호흡까지 마쳤는데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공책처럼 찢을 수도 없고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어 되지 않는 동작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라고 일러준다. 억지로 넘어가는데 자꾸만 마음에 걸려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수련을 마쳤다. 선생님께 동작이 잘되지 않을 때마다 속상하다고 볼멘소리를 하니 선생님은 매일 수련을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언젠가는 될 거라며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에 잘 되려고 하지 말라고.


일시적인 감정

한참을 비어있는 봉지를 보다가 내 뱃살로 눈길이 이어졌다. 배가 통통하게 볼록 나왔다. 완벽하지 않다. 근데 밉지도 않다. 그래서 깨달았다. 완벽한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 말고도 귀여운 상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과자 일곱 봉지를 먹은 나를 바라보고 나서야 왜 아무 생각 없이 먹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국에 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어 먹고 살 걱정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았다. 감정적으로 먹은 과자 일곱 봉지는 일시적인 문제다. 난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날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냥 이 순간 토할 정도로 과자를 까먹은 이 순간에 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알아채고 나니 문제와 해결 방법이 뚜렷해졌다. 한국에 가서도 내가 원하는 완벽한 생활을 계획하고 그대로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으로 나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계획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 틀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다. 완벽하지 않아서 가능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니 감정이 일시적으로 지나갔다. 토할 것 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나를 사랑하는 법

나를 사랑하는 첫 단계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완벽한 나와 완벽하지 않은 나 사이에도 나는 여러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모두 나다. 나는 완벽한 나만 원했다. 그렇지 않은 나는 거부했다. 항상 완벽한 나로 존재하고 싶어서 과정을 빨리 감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내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과자 일곱 봉지는 그런 나를 알아차리라고 보낸 신호인가 보다. 공책을 찢으면서 요가를 하면서 과자를 먹으면서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지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호는 이 과정이 꼭 지나가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니 피하지 않고 부딪혀도 괜찮다. 그렇게 모든 상태에 존재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낸 일곱 봉지의 과자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면 신호를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요?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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