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랑이 피다
내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어릴 적 봄을 생각하면 늘 생각나는 일이 있다. 코밑에 보드런 수염이 가뭇가뭇한 14살 중학생 때 가졌던 그 밀도높은 기다림과 행복한 두려움의 이야기다.
내가 자라난 시골에서는 면소재지마다에 초등학교가 하나씩 있었지만, 중학교는 인근 몇 개 면을 합쳐서 중간쯤에 있던 터라 청암면에 있는 부곡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근 20km가 넘었고 도로는 미류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비포장길이었다. 버스 한 대에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타고 30여 분을 달리는 등하교길은 그야말로 지옥버스였다. 그게 싫어서 나는 형님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수리해서 50분 정도 통학했다.
반은 3개 반이 있었는데, 1반은 남학생 반이고 2반은 남여학생 합반, 3반은 여학생 반이었다.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공부를 잘해서 그런지 나는 반장에 뽑혔고, 부반장은 여학생 중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친구가 맡았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학교에서 젊은 축에 드는 분들이 맡았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은 부산진여고에서 근무하시다 전근오신 수학 선생님이셨다. 주근깨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하얀 피부에 도회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아주 미인이셨다. 이제 막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 눈뜨고 있던 시골 떠꺼머리들의 인기를 얻기에 충분했다.
개학을 한 다음날 종례를 마치며 반장과 부반장은 잠시 남으라셔서 교실에 있었다. 잠시 후에 선생님이 다시 오시더니 잠시 얘기 좀 하자며 학교 주변에 있던 논둑길로 가자고 하셨다. 논둑길을 선생님과 함께 걸어도 되나 싶어 조금 의아했지만, 말없이 따라나섰다. 부반장도 쭈뼛거리기는 마찬가지였던 듯 따라오는 걸음이 엉거주춤해 보였다.
"야, 참 좋다. 이 흙냄새 하며 햇볕 하며... 이런 데서 근무하고 싶었거든."
논둑길에 서 있는 선생님이 만드는 풍경이 참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선망이 가득한 눈으로 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집은 어디야, 부모님은 뭐 하셔, 꿈은 뭐니 등등 낯설지만 거부할 수 없이 달큰한 서울형 말투에 내 인적사항이 낱낱이 벗겨지고 난 다음에야 선생님과 헤어졌다. 희한하게도, 어둠살이 내린 시골길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논둑길에 서 있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나지를 않았다.
다음날부터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괜히 얼굴이 빨개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조회 때는 선생님이 지시한 내용을 놓치기 일쑤였고, 수학 시간은 너무나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수학 수업은 왜 하루에 한 시간밖에 없는 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수학 재미없다며 툴툴거렸지만, 나한테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아래는 어느 글동무의 지나친 상상력이 이어준 글입니다.)
매일 선생님 생각으로 밤잠도 설치고 수업도 허투루 듣던 어느 날, 마침내 결심을 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선생님 집 앞에서 기다리기로. 이제 막 벼내기를 한 논에는 개구리 울음소리로 귀가 멍해질 정도로 시끄럽게 울어대던 봄밤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너무 지루해 자전거를 세워두고 동네를 구경다녔다. 그렇게 2시간 즈음 지나자 선생님이 오셨다. 쭈뼛쭈뼛 말을 못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무슨 일인 지 학교에 다시 가봐야 될 일이 생겨서 학교까지 자전거로 태워주면 안되냐는 제안을 하셨고, 난 흔쾌히 허락을 했다.
“아니, 원하던 바였다.”
올라오는 길은 오르막이라 힘들었지만, 내려가는 길은 힘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선생님도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뒷자리에 선생님을 태우고 30초 즈음 지나서야 브레이크가 고장이란 걸 알았고, 계속 내려가면 가속이 붙어 더 위험해질 거라는 걸 순간적으로 직감한 나는 차라리 옆에 진흙이고 푹신한 논두렁 아래에 있는 논에 빠지는 게 나을 거란 생각에 핸들을 논두렁으로 틀어버렸다. 높이가 2미터쯤 되는 논두렁으로 자전거는 날아올랐고, 선생님과 난 2미터 가량의 높이를 같이 날 수 있었던 것이다.
타기 전에 매일 브레이크를 점검했는데 왜 하필 그날 브레이크가 고장났는지 알게 된 것은 10년이 지나서였다. 서울로 학교를 같이 다닌 부반장과 사귀었던 난 여의도에서 자전거를 같이 타게 되었다. 그날 같이 탔던 삼천리자전거는 공교롭게도 선생님과 같이 탔던 자전거였다. 부반장은 여자였지만 자전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브레이크 작동원리를 초등학생 때 아버지한테 졸라서 특별강의를 들었던 이야기와 그날 선생님을 기다리며 세워두었던 자전거와 같다는 이야기, 마음만 먹으면 모든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30초 뒤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획득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난 머리에 난 모든 머리카락이 위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