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자란 마음

못에서 헤엄치다 동티나다

by 홍시궁

시골에서 최고의 여름 놀이는 헤엄이었다. 어릴 때만 해도 마을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골짜기에는 큼지막한 소(웅덩이)가 한두 개는 있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식히기에 냇가나 계곡에서의 자맥질에 댈 게 없었다. 꼭 더위를 쫓기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어릴 적 헤엄은 체력을 키우고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시골의 놀이였다.

시골마다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두어 놓기 위해 못(저수지)을 만들었는데, 우리 동네에도 큰못, 작은못 두 개가 있었다. 못은 수심이 꽤 깊어서 어른들은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 다짐을 두곤 했고, 학교에서도 방학식 때는 늘 '못에서 수영 금지' 푯말을 써붙이고는 했다. 그 정도로는 시골 꼬맹이들의 허영심과 호기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방학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하루 종일 못에서 헤엄치며 놀고는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수영이라는 걸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탓에 개헤엄과 배헤엄이 다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온 못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못에서 생긴 사건사고가 여럿 있었다.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다들 비슷한 경험들이 있으리라.

첫 번째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일어났다. 비가 사나흘 내리 내린 탓에 못에서 헤엄을 못 쳐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전까지는 작은못에서만 놀다가 마침 큰못에서 헤엄을 치기 시작한 참이었다. 비가 그치자마자 "비가 마이 와서 못에 수문 열어났응게네 절대 가지 말그래이" 하시던 아부지의 앙다짐도 들은 체 만 체 못으로 갔다. 벌써 또래 친구들과 서너 살 많은 중학교 헹님들이 와 있었다. 큰못에 물이 다 들어차는 바람에 놀 곳이 마땅찮아서 다들 산허리를 따라 만든 물넘이 근처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나도 친구놈들 틈에 신나게 물장구도 치고 물싸움도 하며 놀았다. 이윽고 친구들에게 수영실력을 뽐내고 싶은 생각이 나서 물넘이 너머로 개헤엄으로 나아갔다. 가다가 뒤돌아서 친구들한테 이리 오라고 한껏 호기도 부렸다. 다시 물넘이쪽으로 돌아오다가 힘이 조금 빠져서 쉬었다 갈 겸 자맥질을 해서 자랑하고픈 마음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넘이 끝나는 부분에서부터 자갈로 된 비탈이 시작되었는데, 그 비탈면에 발이 닿은 것 같았다. 아뿔싸! 바닥을 박차고 다시 물 위로 나오려는데, 발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 위로 솟구칠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수문이 열려있다는 아부지 말이 생각났다. 순간 머리가 하야지면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저승문이 잠시 스쳐간 듯했다. 더 열심히 발돋움질을 했지만 몸은 자꾸 깊은 데로 미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곧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죽을힘이 솟은 듯 마지막으로 바닥을 차고 위로 솟구쳤고, 물 위로 숨을 토함과 동시에 "사람 살리라!" 한 마디 내뱉고는 다시 물속으로 꼬르륵 사라졌다.

그때 나보다 4살 많은 육촌 아재가 물넘이 위로 뻗은 소나무 위에 올라가서 다이빙을 하려다가 물속으로 빨려가는 나를 발견했다. 그 아재는 타잔처럼 "아~아아~~~" 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고(나중에 친구놈들이 진짜 타잔 같았다고 웃으면서 얘기해줬다), 물속으로 점점 끌려들어 가고 있던 나를 간신히 잡아서 물 밖으로 데려 나왔다. 입안의 물을 토해내고 나자 정신이 들었고, 나는 그제야 으앙 하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옆산에서 두세 시간 놀다가 저녁답에 집으로 가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면서 흘금흘금 웃었다. "우리 맹이 리는 인자 오래 살겠네.", "그래도 네가 착항 게네 산신령님이 살려 준 기대이." 한 마디씩 하시며 지나갔다. 집에 갔더니 다행히 아부지, 엄마는 몰랐던 거 같았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시길래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그날 밥상에 돼지국이며, 조기며 평소에 먹지 못하던 반찬들이 올라왔는데, 그게 실은 두 분이 차마 나를 꾸짖지는 못하고 그에 갈음해 내놓은 사랑과 질책이었음은 나중에야 알았다.

두 번째는 4학년 때였다. 나는 헤엄 실력이 한층 늘어서 더 자주 못에 가서 더 오래 놀았다. 못 둘레가 거의 500미터 정도 되었는데,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수심이 제일 깊은 못 한가운데까지도 헤엄쳐 가고는 했다.


하루는 몇 살 많은 형들과 낚시를 하다가 너무 더워서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못 뒤쪽 논에서 일하시던 아부지가 내가 못에서 수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시고는 벗어놓은 옷이 있는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오셨다. 가운데쯤 있었던 터라 옷이 있는 쪽으로는 못 가고 반대편 못둑으로 헤엄을 쳤다. 반대편에 도착해서 다행이다 싶었던 순간, 아뿔싸! 아부지가 내 옷을 주섬주섬 챙기시더니 집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그냥 가버리셨다. 헹님들은 "역시 너그 아부지답다"며 슬슬 놀렸다. 야속하게도, 헹님들은 우리 아부지가 또 올 지도 모른다면서 옷을 입고 낚싯대를 챙겨서 집으로 가버렸다. 뭐 저런 헹님들이 다 있노 싶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물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두어 시간을 그렇게 있었다. 평소에는 그리 재미지게 놀던 못이 물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날따라 사람들도 안 보이고 날은 어둑해졌다. 다행히 신발은 놔두고 가셨길래 두 손으로 앞을 가리고 옆산에 가서 큰 떡갈나무 가지를 서너 개 잘라서 치마처럼 둘렀다. 남들이 봤으면 타잔 흉내낸다고 그랬을 것이다. 옆산을 통해서 집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사람이 있으면 숨기를 여러 차례. 괜스레 서러웠다.

옆산을 거의 다 내려갈 때쯤 엄마를 만났다. 저녁때가 다 되어도 집에 안 와서 아랫집 헹님한테 찾아갔다가 자초지종을 들으셨다고 했다. 엄마가 챙겨 온 옷으로 바꿔 입고 집에 갔다. 마당 평상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계시던 아부지가 나를 흘깃 보시더니, "잘못했제?" 한 마디 하셨다. 대답을 못 하고 발끝으로 바닥만 긁적거리고 있으니까 "밥 굶어라. 벌이다" 하시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는 그날도 또 광에 갇혀서 교교히 스며들어오는 달빛과 짹짹거리는 쥐 소리를 벗 삼아 속 깊은 한숨을 한 소끔 토해낼 뿐이었다.


세 번째는 5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일어났다. 전날 몰아치기로 끝낸 방학 과제물을 들고 터덜터덜 학교에 갔다. 담임선생님한테 과제물 검사를 받고 쉬는 시간이었는데, 딩동댕 하며 교내방송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거문디미 6학년 김진욱이, 5학년 김맹일이, 5학년 김두상이, 4학년 김갱호 이상 니 명은 즉각 교무실로 올 것. 이상 끝" 하는 방송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교무실에 갔더니 진욱이 헹님이 잔뜩 기가 죽어서 서 있었고, 나머지 두 명도 병 걸린 닭처럼 주억거리며 교무실로 들어섰다. 우리 넷은 영문을 모른 채 교장실로 불려 들어갔다. 교장선생님은 우리 넷을 일렬로 죽 세우시더니, "너그들 와 불리왔는지 아나?" 하고 물으셨다. 영문을 알 리 없어서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말씀은 우리가 못에서 헤엄치고 노는 걸 우리 동네 어른이 보고서 학교에 신고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따금한 맛을 한 번 봐얀다고 하면서 팬티만 입은 채 운동장에 1시간 동안 서 있으라고 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동안 우리 넷은 하얀 삼각팬티만 입은 채로 운동장에 서 있었다. 당시 학교에서 제일 무섭다고 소문났던 교무선생님은 지나가시다가 낄낄 웃으면서 우리의 소중한 그곳을 톡톡 건드리기도 하고 몸매 좋다면서 한껏 놀렸다. "김맹일이 일마 이거는 공부도 잘하는 기 와 하지 말라는 짓을 해 갖고..." 하며 끌탕을 날리고는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여석아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같은 반 여석아 서넛이 와서는 "사진 한 장 찍었으모 좋겠다" 하며 놀리며 지나갔다. 나는 그 여석아들 뒤통수에다 대고 '너그는 나중에 내한테 죽었다'며 뿌드득 이를 갈아붙였지만, 그 쑥스러움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우리는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되어 다른 학우들에게 재미난 웃음거리를 제공했다. 지금도 그 정보 제공자가 누군 지는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내 12살의 여름은 암회색으로 덧칠해졌다.

이 세 가지 에피소드는 여름방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헤엄치기를 생각할 때면 늘 솟아나는 재미난 이야기들이다. 어떤 때는 아프게 송곳처럼 콕콕 찌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또 달콤한 수박화채처럼 살살 녹아들기도 한다. 동네 친구들과 만나서 늘 빠지지 않는 술안주였는데, 요즘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 만나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나마 글쓰기를 통해서나마 내 어릴 적 추억들을 소환하고 곱씹는 게 재미진 힘이 되고 있다. 그 추억 너머로 걸어가는 내 남은 삶의 여정이 어떻게 갈지 모르겠지만, 이런 추억의 묶음으로 이 재미없는 삶을 지탱해 나가다 보면 또 다른 추억들로 내 남은 삶을 채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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