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의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를 참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죠? 마치 하이쿠처럼, 단 4행으로도 묵직하면서도 아주 큰 울림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겨울 초입에 감나무 우듬지에 매달린 홍시 하나를 보면서 '조선의 마음'을 뽑아낼 줄 아는 그의 기막힌 창발성이 부럽기도 하구요. 어릴 적 경험했던 우리 동네 어른들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읽혀 늘 가슴 한 켠에 쟁여두고 있는 시(인)입니다. 저도 이런 멋들어진 시를 한 편 좍 펼쳐놓고 싶은데,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품는 게 김 시인님께 불경을 저지르는 건 아닐지 내심 걱정도 됩니다.
그런 마음씨의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나고 자라면서 제게도 ‘조선의 마음’이 시나브로 자라고 있었나 봅니다. 제 유년의 기억들은 20, 30대 때는 진절머리 나는 가난의 시간으로 치부해서 기억의 저 깊은 곳에다 돌멩이로 꽈악 눌러 놓았더랬는데, 요즘에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하니까 말이죠. 가끔 외로울 때는 그때의 추억들이 스멀스멀 뇌리를 채우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잘 들리지도 않던 이정선의 <나들이>를 요즘 출퇴근길에 흥얼거리기도 하지요.
다들 기억들 하시겠지만, 우리 어릴 적 우리들 동네는 참 따뜻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낼 줄 알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따스운 정과 푸근함이 있었죠. 동네 이웃들에게는 쉬이 곁을 내어주면서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안으며 그 힘들었던 곤궁과 결핍의 시간을 더불어 함께 지나갔더랬습니다. 하물며, 까치의 겨울 끼니까지 걱정해주는 '까치밥'의 마음이야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동네에 있을 때의 그 연결감이 어린 시절은 물론 지금의 제게 정서적으로 큰 힘이 된 거 같습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며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열심히 좇으며 살다 보니 그 따뜻했던 마을은 서서히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웃은 남이 되고 관계는 없어지고 모든 것이 돈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차가운 사회(Cool Society)'가 되고 있죠. 요즘 마을이다 공동체다 말들은 많지만 달콤한 돈의 관성에 찌든 우리의 의식을 되돌리기에는 무척 벅차 보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건강은 자본의 소비 대상으로 전락하고, 그 거친 삶의 과정에서 얻은 사회적 상처로 인해 우리는 시나브로 질병을 걸머지고 살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임을 주입하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따라가다 보니 주변에 사람은 많은데 기댈 데가 없습니다. 화려한 개인인 거죠. 가정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동료들과는 거리를 두고 친구들을 만나도 더 외롭기만 한 자아가 현재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혼자임(외로움 또는 고독)이라는 괴물을 벗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사는 살이가 언제까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런 면에서 공동체가 왜 필요한 지를 잘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개인의 몸과 건강은 (개인의 경제적 수준에 기반해)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도그마를 강요해왔던 우리 사회에 일침을 가합니다. 한 사람의 병은 개인적이라기보다 사회적 관계에 의한 측면이 더 많고, 그 대안으로써 우리에게 (예전과는 다르겠지만)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 지를 고민하게 하는 좋은 책입니다.
특히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부분에서는 속으로 박수를 치게 됩니다.
김승섭 교수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 우리 몸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질병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직장과 학교와 가정에서 맺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겪는 차별, 혐오, 고용불안, 재난과 같은 사회적 폭력, 사회적 상처들이 몸에 스며들어 병을 유발한다는 것이 사회역학자인 저자의 지론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 우리 동네의 모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담았습니다. 서로 돕는 공동체 문화가 심장병 사망률을 낮췄던 미국 로세토 마을의 사례, 사회적 연결망이 기대수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사회역학의 연구 사례 등을 소개하며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지 함께 고민하게 하고, 모두 함께 건강하기 위해 공동체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따뜻한 깨우침을 받았네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우리는 연결될수록 더 건강한 존재들'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개별적 존재로 사느라 연결보다는 분리 중심으로 살았던 삶이었기에 이 말에 깊이 공감하며, 서로 간의 굳은 연결을 바탕으로 공정하고 따뜻한 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협동조합갈매책방북적북적의 고민과도 맥락이 닿았습니다. 앞으로 협동조합갈매책방북적북적의 행보에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강하게 연결하며 더 큰 개인으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