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자란 마음

봄꽃이 피는 차례

by 홍시궁

해마다 봄이 되면 우리 동네에는 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곤했다. 정월대보름 지나고 바람에 조금씩 따순 기운이 실릴 무렵부터 골목골목, 산등성이 저마다 산꽃이며 들꽃이며 집꽃이며 점점이 꽃무리를 이루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오는 마중물 꽃은 동백꽃이었다. 골목 담장 너머로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겨울 세찬 바람 속에서도 짙은 초록의 잎사귀와 붉디붉은 꽃을 떨구지 않고 이겨내더니, 이 무렵에는 한껏 물이 올라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고는 했다. 이때 장만하는 동백기름이 최고 좋다고 어른들이 가르치곤 했었고, 우리는 이제 곧 봄이 오겠거니 한껏 가슴을 부풀렸다.


봄의 들머리에서 제일 먼저 피어오르는 꽃은 매화였다. 장미과에 속하는 이 매화는 꽃을 강조한 이름이고, 열매를 강조하면 매실나무다. 매화는 잎은 다 떨군 채 줄기로만 겨울을 버틴 가지가지에서 마치 마술처럼 꽃순을 틔웠다. 어제 지날 때는 분명 가지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다음날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네댓의 꽃순이 칠해져 있었다. 어린 날의 그 신기함이란.


매화가 피고 나면 이내 산에 들에 산수유가 달려왔다. 처음에는 연노랑 꽃망울로 한데 뭉쳐 있다가 별 모양으로 점점 벌어지면서 알싸한 노란색으로 진하게 피었다. 가느다란 꽃대 끝에 매달린 꽃망울이 벙그러지면서 앙증맞은 꽃술이 온 천지에 상큼한 향기를 뿌렸다. 산수유 꽃그늘 아래서 얼마나 많은 동네 형, 누나들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밀어를 흩뿌렸던가.


산등성이에 산수유가 활짝 필 즈음이면 동네 골목마다에는 개나리가 벙글었다. 담장 위에서 아래로 축 처진 가지에서, 마당 한켠에서 마치 분수처럼 흘러내린 가지들의 잎겨드랑이에서 꽃망울이 맺혔다. 그렇게 올린 꽃망울들은 십자 모양으로 팔을 벌리고는 하늘을 향해 연신 노란 입김을 후후 내뿜는 듯했다. 그 입김에 취할 때의 아찔함이야 말해 무엇하랴.


이어 진달래꽃이 피고 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에 꽃이 맺히며 날이 점점 더워지면 뒷산 무덤가에는 홀연히 할미꽃이 피었다.


뒷동산의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싹 날 때에 늙었나 호호백발 할미꽃

천만 가지 꽃 중에 무슨 꽃이 못 되어

가시 돋고 등 굽은 할미꽃이 되었나


여자 아이들은 할미꽃을 보면 이 노래를 부르며 할미꽃을 꺾곤 했지만, 나는 왠지 할미꽃이 마음에 담겨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슬프도록 짙은 자주색 꽃잎이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선 모습이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었다. 그 할미꽃의 잔상은 줄기에 난 하얀 털처럼 내 기억에 털을 세우고 있다.


봄의 끝을 알리는 꽃은 함박꽃이었다. 흔히들 작약이라고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함박꽃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불렀다. 아마도 꽃이 흐드러지게 한껏 피어서 ‘함박’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우리 집에는 돌담 아래에 다섯 그루가 나란히 피었는데, 진초록 잎사귀를 달고 커다란 꽃을 이고 있는 함박꽃이 그렇게 멋있고 당당해 보일 수 없었다. 요즘 화원에 가서 가끔 작약을 보기는 하지만, 어릴 때의 야생스런 멋을 지닌 함박꽃은 찾을 수가 없어서 조금 아쉬울 뿐이다.


어릴 적, 이렇게 꽃이 맺고 떨어짐을 따라서 나의 봄은 흘러갔다. 봄이 되어 날이 풀리면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느라 정신없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꽃달력’을 따라 지내온 나의 유년이 있어 지금의 따뜻하고 소중한 추억의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삶내 나는 추억들을 도시의 회색빛에 휘둘려 살고 있는 사람들과 절절하게 나누고 싶은데, 그 느낌과 감성의 연결이 과연 가능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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