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자란 마음

겨울산에 들다

by 홍시궁

어릴 적, 늘 산을 가까이 두고 살았다. 큰골, 작은골, 위뜸, 아래뜸, 큰가재미, 잔가재미, 등대, 절골 등등해서 산도 많았을뿐더러 생활의 흐름 자체가 산에 기대어 있었다. 봄에는 꽃 따러, 여름에는 소 먹이러, 가을에는 산다래 따러, 겨울에는 나무하러 다녔다. 일 년 내내 산에서 놀았고 먹을거를 얻고 산을 닮은 생각을 키우며 자랐다.


대학에 올라오면서 산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두 눈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좇기 바빴고, 두 발은 도시의 빌딩을 배회하느라 쉼이 없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너무 멀게 느껴졌고, 간혹 눈에 들어오는 먼 산의 이미지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정물일 뿐이었다. 회사 다니면서는 봄, 가을마다 행해지는 산행 때문에 괜스레 밉상스럽기까지 했다.


작년에 동네친구와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릴 적 다니던 산의 느낌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지긋한 중년의 여울에 들어선지라 산에서 나름의 맛과 멋을 찾았다. 봄산은 나무가 열리는 느낌과 그 향긋한 냄새가 좋고, 여름산은 그 풍성한 그늘이 주는 햇볕 아래에서의 아늑한 시원함에 끌렸고, 가을산은 삶의 다섯 가지 맛을 닮은 형형색색의 단풍 그늘에 마음을 내놓았다.


올해 처음 겨울산을 올랐다. 어릴 적 나무하러 다니고 토끼몰이 다닐 적에야 수도 없이 산을 탔지만, 산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오르는 겨울산행은 처음이었다. 겨울등산 장비가 없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설마 뭔 일이 있겠어 하는 심정으로 청학동 쪽 수락산 길을 톺아 올랐다.


들머리에는 잔설이 여전했다. 내린 지 여러 날이어서 눈의 사근함은 없어지고 얼음처럼 서걱거렸다. 잔설을 밟는 소리가 뿌드득뿌드득 둔중하게 대기로 스며들었다. 계곡 바위들은 눈에 덮여서 전혀 새로운 정물을 자아내고 있었다. 수락산은 그렇게 조용히 겨울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중턱쯤을 오르면서부터 겨울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는데, 아슴하기도 하면서 비릿하기도 하고 또 시큼하기도 하면서 달착지근한 겨울산의 입자들이 줄기차게 코의 감각 속으로 틈입했다. 호흡기를 타고 허파에 이르러서 허파꽈리를 한 바퀴 휘 비트는 느낌은 청량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골짜기를 따라 소리 없이 내리부는 바람은 칼처럼 날카로웠지만, 심장을 데우는 더운 호흡에 밀려 겨울산 어디메로 소리 없이 잦아들었다.


물길 따라 꽝꽝 얼어있던 얼음골은 또 얼마나 기꺼웠던가. 연한 청자빛 몸색을 하고 겨울산에 웅크리고 있는 그 얼음골에 응축된 놀이의 재미를 어찌 그냥 지나치랴. 냉큼 덤벼들었다가 된통 당하기는 했지만, 저 먼 어릴 적 추억 만들기는 처음 가본 겨울산의 또 다른 별미였다.


중턱을 지나 정상으로 가는 길에서 하늘이 열리며 맞은편 산들의 모습이 지척인 듯 드러났다. 잎을 다 떨어뜨리고 잔설로 여기저기 가리고 있는 산의 벗은 몸이 진짜 뚜렷하게 다가왔다. 청한 하늘을 배경으로 죽 그어진 산줄기들은 마치 눈앞에 쨍! 하고 나타난 듯이 정갈한 한 편의 수채화로 내 눈앞에 그려졌다. 겨울 하늘에 한 점 거슬림이 없이 본래인 듯 겨울산들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이 내 눈에 가득 들어찼다. 아! 겨울산은 저리도 청아하구나, 저렇게도 사람을 미혹하는구나 하는 감상이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흘러 한 편의 시로 되살아났다.


바람이 밤새 벼린 칼을 눕혀

희디흰 눈의 속살을 스칠 때

저만치서 베인 몸을 감추고 누워있는 물고기를 보았다

가량없이 물안개를 토해내던 아가미와

미명을 털어내던 꼬리는 어디에 두었는지

흔적 한 줄 남기지 않고 저민 살을 수습하는

순백의 등줄기를 보았다

(뒤는 생략)

- 이용헌 ‘겨울산’ 중에서

나뭇잎 뒤에 숨은 얼음골을 피하다 보니 느릿느릿하나마 640미터 정상에 올랐다. 봄, 여름, 가을 그 많던 발길들은 다 사그라들고 몇몇 모둠만이 고즈넉이 정상을 즐기고 있었다. 주위에 잇닿은 산줄기 풍경들을 휘 둘러보며 감상에 젖었다.


주위로 죽 둘러선 산줄기들이 바로 옆인 듯 다가섰고, 청한 하늘은 오로라인 듯 궁륭인 듯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칼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구름을 불러 타고 하늘로 오르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미망마저 겉돌았다. 뚜렷한 산줄기의 정물과 가없는 하늘의 청함과 기꺼운 미망이 삼위일체가 되어 잠시 그 시간은 소멸과 부재의 알싸함으로 채워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설핏 이 세상이 아닌 듯했다.


처음 가 본 겨울산행에서 겨울산에 푹 빠져버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에 살며시 발을 넣을 때 갑자기 푹 빠지는 그 느낌처럼 겨울산행의 맛을 단박에 알아버렸다. 속살을 다 드러낸 채 까까머리 위로 넘어가는 해를 이고 정하고 청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자신의 위엄과 당당함을 뽐내던 그 기상은 눈을 통해 들어와서 마음속에 저장되어 버렸다. 이런 겨울산행의 기억과 함께 하는 그 축적의 시간 끝에 나는 어디메 장승처럼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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