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에는 으레 산에 듭니다. 특히 첫눈을 보면 뭐랄 것도 없이 그냥 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무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 이른 시간에 고요히 듭니다. 오롯이 혼자 있음의 느낌으로 산중설(山中雪)이 주는 맛깔스러운 소리를 엿듣고 싶어서입니다.
산으로 드는 길을 따라 눈 위에 발자국이 돋았습니다. 아쉬움이 화인(火印)처럼 마음에 찍힙니다. 괜스레 그 길이 미워집니다. 길어깨에 아직 순정(純情)하게 남은 눈을 따라 몇 걸음 옮깁니다. 그예 마음이 틉니다. 길옆에 쌓인 숫눈 위를 자박하게 걸어봅니다. 자박자박 저벅저벅. 그제야 눈 밟는 소리가 뽀드득 귀속으로 스밉니다. 입가에 웃음 한 자락이 설핏 배입니다.
눈이 내리는 산속은 참 고요합니다. 꼭 진공관 같습니다. 눈이 하늘에서 땅으로 달음박질하면서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다 먹어버렸나 봅니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잡소리에 시달리다가 눈이 오는 날 산속 소리의 부재가 주는 아늑함은 자글자글 마음을 데웁니다. 그 고요한 사위에 마음 한켠으로 서늘한 바람이 관통합니다. 대자연의 자연스러움에 한 점 거슬림이 없는 산중설의 풍경이 그래서 자주 눈에 밟힙니다.
그 고요함과 아늑함 사이로 문득 사륵사륵 소리가 들립니다. 눈들이 솔잎 위에 내려 쌓이며 몸피를 키우는 소리입니다. 물매를 던져 눈을 덜어냅니다. 덜어낸 눈의 무게만큼 솔잎은 하늘로 돋움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차르륵 소리도 납니다. 싸락눈이 깡마른 떡갈나무 잎사귀에 빗겨 쓸리며 내는 소리입니다. 인생의 가풀막진 물매를 못 견디고 쓸려 내려오는 사람들의 아픈 한숨소리처럼 들립니다. 괜히 마음이 엡니다.
눈 내린 산속에서 고요히 일어서는 소리를 느끼며 더 높이 산으로 듭니다. 아침이 깊어지면서 숲을 덮은 눈 위로 돋을볕이 번집니다. 산의 속살이 더 선연(鮮然)해집니다. 어디선가 사박사박 소리가 들립니다.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눈을 밟는 소리인가 봅니다. 대자연의 자연스러움에 또 마음을 한 자락 내어놓습니다.
이내 앞이 탁 트인 절벽 위 마당바위에 도착합니다. 앞에 가림이 없어 제일 좋아하는 곳입니다. 언젠가 여기서 비박(Biwak)을 하며 별들과 눈싸움 한 번 실컷 해보는 게 제 소중한 휘게(Hygge) 중 하나입니다. 한숨을 거하게 내어 쉬고 그윽히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눈 아래 깔린 세상이 희부윰하게 보입니다. 조그만 아파트에 개미 같은 사람들, 도로를 굴러가는 조그만 자동차들. 저 흐리멍텅한 속에서 그리도 바쁘게 사람들과 치대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또 엡니다.
나와 그 세상을 가림하며 휘몰아 내리는 눈을 치어다 봅니다. 수직이 아닌 사선의 날림으로 땅으로 치닫습니다. 크고 작은 눈송이들이 장막을 펼치며 저 아래 세상을 흐리게 합니다. 마치 저 아래 세상과 담을 쌓으라는 듯이 말입니다. 그 시린 호흡에 가만 눈을 감습니다. 눈들이 치달으며 와와 소리가 들립니다. 하늘의 세상에서 땅의 영역으로 낙화하는 재미와 들뜸 때문인지 저마다 와글와글 아우성입니다.
그 그윽한 청설(聽雪)의 순간,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습니다. 그 가라앉음의 평온함이 온몸을 따스하게 휘감습니다. 눈을 살며시 뜨면 눈송이 하나하나가 눈에 잡힙니다. 눈으로 들어온 송이송이들을 가슴에 담으며 차분히 눈 속으로 웅크리며 스밉니다. 그 스민 시간 속은 아늑하고 그윽하고 참 다부집니다.
한 시간 여 눈을 들은 후 산을 납니다. 산에서 나더라도 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여전히 눈은 산이 생긴 대로 내려 쌓이며 그 생김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소리를 다 흡입하며 그 안에 더 큰 고요를 만들며 스스로의 깊이와 넓이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 오는 날 산의 위엄은 한 움큼 더 땅띔을 하나 봅니다. 눈 오는 날 우리는 그 산에 들며 또 얼마나의 아늑함과 고요함을 더 얻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