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mit of my world
일상의 모든 언어를 타국어에 의존하고 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통화나 메신저를 이용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순간도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유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사용할 수 없을 뿐이다.
이것이 필요해, 필요 없어, 꼭 해야 해, 하면 안 돼, 얼마나? 어떻게? 왜? 기본적인 언어로 의사소통하고 있다.
모든 것이 과하게 심플해진다. 감상할 수 없고 논쟁은 무의미하다. 가끔은 맞다, 아니다, 한다, 하지 않는다,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도 생긴다.
다만, 오해는 줄었다. 무엇이든 명확하게 전달하다 보니.
제대로 된 문장과 시제를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에 어려웠던 때도 있지만, 놀랍게도 언젠가 영어로 꿈을 꾼 이후로 한결 편해졌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
타국에서 (나의 모국과 이곳이 아닌) 온 어느 동료는 유난히 말이 많다.
듣기보다는 말하고 화두를 던지고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되고 마치 발제자이자, 토론자이자, 청중을 하는 사람. 나는 대부분 듣는 쪽이라 나에게는 편안한 상대이다.
그저 말이 꽤 많은 사람이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탁월한 그녀의 생존 방식임을 철저히 이방인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녀와 함께 일할 때에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였지만 근무지를 옮긴 후 '영어'는 나만을 위한 언어가 되었다.
로컬도, 일본인도 아닌 나와 같은 제3 국의 인간은 이곳에서 그녀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투명해질 때가 있다. (나의 직장은 대부분이 일본인과 로컬, 그리고 나와 같은 제3 국의 인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럽게 다인원의 언어에 잠식당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완벽한 이방인이 되는 순간이다.
매일 매 순간 그것을 느끼지만,
어쩔 땐 소음쯤으로 느끼고 가끔은 매우 예민하게 반응해, 그들도 느낄 수 있도록 한국어로 대응하고,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화제를 전환시키면서 혼자만의 서바이벌 게임을 하고 있다.
나와 정반대의 성향의 친구에게 이것에 대해 전달했을 때 그녀는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다고 말했다.
나도 분명히 소름 끼칠 만큼 의식할 때가 있다.
아마 관심이 없는 타인의 대화나 상황에 무심한 편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어려운 환경이다.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다,
The limits of 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world-Wittgenstein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면접장의 임원이 나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명언이 있나요?" 그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을 답했고,
글로벌 기업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능통하고, 타국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언어를 공부하겠다고 답했다. 아주 흡족해했다.
사실 이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은 학부 시절, 술자리에서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을 놀릴 때 사용하던 것으로(교수님 마저도 이렇게 학부생들을 놀렸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 철학을 기반한 이해는 뒷전으로 그저 나에게는 조롱용 명언인 셈이다.
놀랍게도 이 한마디 답변이 나를 이 회사, 지금의 타국으로 이끌었고 심지어 저 명언을 매일 지각하면서 살게 하고 있다.
맥락과는 무관하지만 가끔 인생의 알고리즘은 이렇게 치밀하다.
생각조차 영어로 하다 보면 삶이 더 심플해진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는 많은 것을 단순화시킨다. 기발한 상상, 창의적인 태도마저 소극적으로 만든다.
다만, 익숙한 언어가 한정적인 만큼 아는 것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로서는 그냥 일을 하는 것. (이렇게 괴로운 만큼 달러로 수당을 지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롭다면
그것을 영어로, 혹은 본인에게 모국어 다음으로 가까운 언어로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부터 결론까지 모든 것이 심플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