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연과학자의 영성
들어가는 글
내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처음 읽은 것은 고교시절, 학교에서 이 책은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강력 추천했던 고전이었습니다. 다시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돋보기에 의존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는 나이에 접어들서였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고 살았지만 정작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소망과 함께 죽음의 강을 건너는 모습에서 죽음은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칠십여 년을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세월을 살면서 천로역정의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인 내가 생물학자가 되기 위해 독일 유학길에 올랐던 이야기,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 잠시 들렸던 아름다운 집이 나의 순례길이었습니다. 생물학자로 황새복원 일을 하면서 모두 선하고 진실한 것을 지으신 은혜로우신 주님을 늘 찬양했습니다. 영화와 유튜브, 인터넷을 주름잡고 있는 요란한 디지털 게임과 반려 동물 산업의 열풍, 그 허영의 시장에 맞서지 못하고 황새복원 일은 모두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의 순례길을 따라가다 보니 하늘나라의 소망을 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경(막 5:28-34)에는 혈루병 앓고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곧바로 그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구원은 단번에 일어났습니다. 내가 바라고 기도하는 게 있다면 천로역정에 나온 인물들을 수채화로 그리면서 나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인물들-고집, 변덕, 나태, 거만, 허례, 위선, 무지, 수다쟁이, 노랭이,작은 믿음, 진실, 소망-을 생각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가평의 필그림 하우스에 묵으면서 그곳에 세워진 천로역정 조각상의 인물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지 수채화는 내가 독일 유학 시절 표현주의 작가이자 수채화의 대가인 에밀 놀데(Emil Nolde, 독일 1867~1956)의 작품을 보고 처음 배웠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놀데의 AI(인공지능)가 되어 이미 그의 작품 6,000여 점을 학습한 결과물입니다. 물론 AI와 다른 점이 있다면 AI는 믿음을 가질 수 없지만 나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내 속에 그분이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 처음 본 것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가족입니다. 성장하면서 친구와 친척들, 내 이웃들, 그리고 동물들입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내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습니다. 청년기에 들어 내 인생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다준 사람은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입니다.
그는 1628년 영국 베드포드 근처 엘스토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땜장이 일을 배운 그는 혼수로 단 두 권의 책을 들고 온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아내의 소중한 지참물이었던 두 권의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예수를 처음 알게 됐고, 1653년 존 기퍼드 목사에게 큰 감화를 받고 세례(침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견딜 수 없는 열정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1660년 찰스 2세가 국교회 이외의 모든 종교를 탄압했을 때에도 번연은 계속 설교를 했고, 그 죄로 체포되어 3개월간 수감되었습니다. 다시는 설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또 체포되어 1672년까지 12년간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바로 천로역정을 집필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온 인물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그 여정은 나의 반평생을 동반자였던 황새와 함께하려 합니다. 황새와 함께한 내 이웃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나와 황새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물론 때로 그들이 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빠트렸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 크리스천이 반드시 건너야 할 죽음의 강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 목전에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인왕산을 매일 오르며 산비둘기, 까마귀. 물까치, 까치, 개똥지빠귀, 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딱새, 황조롱이, 새호리기, 베짱이, 매미 그리고 개미들과 지구라는 이 별 나라에서 마지막 고별 대화를 나눕니다. 날 이 땅에 보내 황새와 사랑을 나누고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하심, 그분이 계시기에 죽음의 강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 거듭남으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내 삶은 엄청난 선물로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젠 늘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은 암울한 삶은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세찬 바람처럼 불어와 하늘의 먹구름을 모조리 걷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노래하고 외칩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저자소개
박시룡(이학박사):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새문안교회 출석교인으로 현재 'KBS 동물의 왕국' 감수 교수로 활동 중이다. KBS, MBC 자연다큐멘터리 자문교수, 멸종위기 1급 보호조 황새 복원 프로젝트 책임교수를 역임했다. 자연과학자로 쓴 '황새가 살 수 없는 땅 사람도 살지 못해요'(목수책방), '끝나지 않은 생명이야기'(곰세마리), '황새~자연에 날다'(지성사), '술 취한 코끼리가 늘고 있다'(웅진출판사), '동물행동 이야기'(자음과 모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자화상 Potrait (2023)
< 수채화가가 만난 천로역정 사람들 > 추천의 글
천로역정은 기독교 고전입니다. 고전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의 안경, 관점에 따라 새롭게 읽힐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생물학자이신 박시룡 교수님의 신앙고백으로 읽힌 천로역정입니다. 박 교수님은 천로역정의 길을 따라가며 수채화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생물학자가 화가로 변신하시어 순례자의 고백을 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천로역정을 다시 읽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님이 사랑하던 황새 따라 걷는 천로역정, 내용은 옛 것과 다름이 없지만 고백은 여전히 새롭습니다. 우리도 황새 따라 이 순례길을 함께 걷다가 박 교수님이 사랑하던 황새도 만나고 주님도 새롭게 만나고 저 멀리 뵈는 시온성에서 함께 만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 천로역정 길의 순례 동역자,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원로, 천로역정 순례길 섬김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그리스도인의 필독서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개된 기독교 도서 중 하나입니다. 다양한 해설서들이 존재하지만 막상 읽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박시룡 교수님의 천로역정의 사람들에는 천로역정에 대한 수채화와 함께하는 깊은 묵상과 설명, 개인적인 신앙 간증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 책은 자연과학자의 시선에서 풀어내는 해설을 통해 천로역정을 다양한 관점으로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안내서입니다. 위대한 고전을 새롭게 읽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이 상 학-
* 이 책에 수록된 수채화는 48.5x37cm 크기의 한지 위에 주로 수채화 물감으로 그렸으며, 일부 먹물과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습니다.
# 표지 그림 설명: 크리스천이 순례길에서 만난 무신론자와 무지를 표현주의 기법으로 그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