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시절은 먹고살기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비해 지금은 훨씬 더 잘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행복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내 이웃의 어려움을 그냥 지켜만 보는 한심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순례길에 너무 당당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세상의 지식으로 무장한 채 날 절망의 늪으로 유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전도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났을 때, 그를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고집과 변덕이었습니다. 고집은 크리스천을 세우고 고향을 떠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크리스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간직되어 있는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는 유산을 찾아갑니다. 당신도 나와 동행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보화를 누리고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여기 그대로 머물러 사는 한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이 책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고집(중앙)과 변덕(우) (2022)
그러나 고집은 크리스천의 말을 끝내 거절하고 멸망의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마음 밭이 성경에 씨 뿌리는 비유에 의하면 길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고집으로 마음이 이미 굳어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예 마음 문을 닫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고집과 동행한 변덕은 멸망의 도시로 돌아가자는 고집의 권고를 물리치고, 크리스천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크리스천과 운명을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들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발버둥을 치며 늪을 빠져나와 "아니, 당신이 말한 순례길을 위해 약속된 행복한 삶이 겨우 이런 것이란 말이오?"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크리스천은 그때 막 지나가던 전도자 도움의 덕택으로 간신히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을 구해준 도움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길은 멸망의 도시로부터 떠나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도중에 있는 이 수렁을 고치지 않습니까?" 도움이 대답했습니다 "이 깊은 수렁은 고칠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낙심의 늪이라고 부르죠. 죄인들이 자신들의 절망적인 형편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두려움과 의심과 절망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 이곳으로 흘러와 고여있기 때문에, 이곳은 늘 좋지 못한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낙심의 늪 (2022)
도움의 손길로 낙심의 늪에서 빠져나온 크리스천은 새로운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로 세속현자였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로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요?" 그러자 크리스천은 "전도자의 말을 듣고 좁은 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속현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쉽고 안전한 길로 안내하겠다며 윗마을 언덕 '도덕마을'을 가리켜주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율법 어른을 만날 터인데 그가 크리스천의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덜어 줄 거라' 말해주었습니다. 혹시 그가 출타 중이면 그의 아들 예의를 만나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사실 세속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복음보다 윤리와 사회개혁을 앞세우는 세상과 타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에게 그렇게 어려운 순례길을 갈게 아니고 편안하고 쉬운 길을 가르쳐 준다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세속현자의 조언대로 그 마을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로 가는 길은 언덕이 가파르고 길이 너무 험했습니다. 점점 지고 있는 짐이 훨씬 더 무겁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갑자기 언덕 위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는 것을 본 크리스천은 그곳으로 올라가다가는 불길에 휩싸여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 무서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크리스천은 세속현자의 그릇된 충고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낙심의 늪에서 자기를 구해준 도움을 만나 좁은 문으로 가는 길에 대해 다시 안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덕마을 입구에 선 크리스천(2022)
학문적 세속현자
교회를 다니면서, 나의 학문적 세계에서 이런 세속현자를 만났습니다. 그 한 인물이 진화론의 찰스 다윈이었고 그 다음으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슨이라는 세속현자입니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조상이 침팬지에서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주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창 5:1)'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고 쓰여 있습니다(요 1:18, 요일 4:12).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진화가 아닌 하나님의 영을 통해 만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다윈이 생각해 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은 무엇일까요? 다윈은 다양한 가축의 품종, 즉 350여 품종이나 되는 개들의 다양한 품종을 인위적 선택(Artificial selection)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사람이 의도를 갖고 품종을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 종의 다양성은 누가 개입되었을까요? 다윈은 이 세상에서 종이 다양하다는 생각을 자연이 선택했다는 개념을 갖고 설명합니다. 믿음과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 자연은 보이지 않는 자, 그분에 의해 지구에 다양한 생물들이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리처드 도킨슨은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타주의도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발현된 현상이라 주장합니다. 심지어 그는 인간을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운반체에 불과하며, 애당초 신은 없었고 '만들어진 신(되God Delusion)'이라 주장합니다.
세속현자 (2022)
하나님 = 영
성경은 ‘곧 하나님이 빛이시라(요일 1: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빛이라는 용어가 196번이나 등장합니다. 빛은 현대물리학에서 에너지를 가진 작은 알갱이(광량자)라고 부릅니다. 생물학에서는 빛은 광합성에 쓰이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빛이라 하는 순간 이 작은 알갱이는 움직입니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약 30만 km에 달합니다. 아직 이 세상에는 실존하는 물체 가운데 이 보다 더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1초에 30만 킬로를 달리는 이 작은 알갱이를 예리한 칼로 잘라낼 수 있다면 그 순간 그것은 실존하지 않는 물체로 바뀝니다.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로 움직이고 계셨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을 '생명을 주는 영, 지혜와 깨달음을 주는 영, 방향을 잡아주고 힘을 부어 주는 영, 지식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불어넣어 주는 영'(사 11:2-3)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세속현자이자 동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슨의 말대로 '만들어진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가 연구하는 동물들은 숫자로 부르시고 계시지만, 우리를 이름으로 부르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롬 9:27). 그래서 성경(요 12:6)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도 없으시고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있다면 오로지 현재라는 찰나뿐인데 그 현재조차 '지금은 현재'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시간 개념 속에 가두었을 때 등장하는 어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누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할 일을 알고 계신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내가 내일 할 행동을 알고 계신다면, 나에게는 그와 다르게 행동할 자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우리처럼 시간 개념에 매여 사는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은 앞일을 미리 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그 위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날이 '지금이라는 이 순간'뿐입니다.
태초에 영으로 존재하셨던 하나님은 예수가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성령이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요 16:7)"의 말씀을 보면, 그 성령은 지금도 시간개념을 초월하여 메시아인 예수께서 이미 내 속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한 분임을 알 수 있는 구절 하나가 눈에 띕니다. 베드로(벧후 3:8)는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고, 그것을 초월한 분입니다. 바로 그분은 영으로만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인간들을 간섭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의 개념 속에 살 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성경에는 기적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2:1-10)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가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보이십니다. 시간의 개념 속에서 살펴보면 포도를 갖고 발효시켜야 포도주가 됩니다. 발효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개념이 모두 생략된 채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시간의 개념이 생략된 채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육신의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은 바로 이런 시간 개념이 없는 곳임을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고 계십니다.
내 순례길의 전도자
자연과학자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잠시 이 세속현자에 현혹되어 무거운 짐이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걸어갔을 때 나에게 도움을 준 참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대학시절 만났던,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인 김용기 장로(1909~1988)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근검절약, 땀 흘려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기독교 정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때는 한국사회가 너무 못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생활물자가 부족해서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살아갔던 시기였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3:10)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 치약도 새끼손가락 손톱크기를 넘지 않게 아껴 쓰도록 교육도 했습니다. 세끼 중 한끼는 고구마를 먹었습니다. 지금은 고구마가 간식거리였지만, 그때는 주식이었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성경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부지런히 일을 하며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그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5.16 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그는 가나안농군학교에 직접 오셔서 교육을 받고 대통령이 된 다음 국민들을 대상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 후 한국의 근대화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202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 6:10-13). "사람들을 앉게 하여라."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오천 명 정도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들어 감사를 드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가지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이 사건에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이분은 분명 그 예언자다. 하나님의 예언자가 바로 이곳 갈릴리에 오신 것이다!" 모인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붙들어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그 자리를 피해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적은 가난한 백성에게 배부름으로 채워주시는 기적도 되지만, 지금과 같이 잘 살고 있을 때는, 작은 자와 작은 것들의 가치로 읽힙니다. 근대화 과정을 겪은 이 시대는 크고 많고 거창하고 복잡한 것들을 좋아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 험난하고 복잡한 시대에서 무시당하는 작은 것들을 택하십니다.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배가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작은 자와 작은 선물을 나눌 때 하나님의 후한 은혜가 계시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나는 점심 한 끼를 먹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면 지하철이 있고 지하철 입구에는 '빅이슈'잡지를 팔고 있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빅이슈' 잡지를 판매하는 아저씨들은 모두 노숙인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잡지 가격은 7천 원입니다. 그 잡지를 팔면 그분들이 3천5백 원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내 점심 한 끼를 저렴한 음식으로 아껴 이 순례길을 걷고 있는 동안 그 잡지를 사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2주에 한번 꼴로 찾는 곳은 바로 지하철 입구 '빅이슈'잡지를 파는 아저씨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프신걸까? 아니면 잡지가 팔리지 않아 판매를 접으셨나? 별의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는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있는 모녀가 묶음으로 된 양말을 팔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쳐 갔을 뿐 잠시 우체국 볼일을 보고 돌아왔을 때는 차도로 안쪽엔 하얀 박스형 경차 한대가 주차돼 있었습니다. 장사가 안 됐던지 중도에 자판을 접고 그 양말을 차에 싣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연으로 양말을 팔러 나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냥 내 아머니가 한평 남짓한 길가의 가게에서 명찰을 새기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그런 모습이 너도 나도 못 사는 때였으니 예사로운 일이었지만, 지금의 내 눈에는 이 모녀의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달려가 돈을 내고 양말 몇 켤레라도 팔아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이미 그 모녀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늘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를 늘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오늘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 수 없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 순례길을 다시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에라도 꼭 이 모녀를 만나면 지체없이 달려가 양말을 사주겠다는 마음으로 지갑에 들어있는 만원권 지폐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