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의 배신
제가 알고 지내던 V라는 러시아 소녀가 있습니다. 만났을 때 만 16세였던 V는 그 나이에 딱 맞는 천진난만함과 쾌활함, 그리고 '러시아인'다운 거침없는 성격까지 갖추고 있는 아주 매력적인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유별나게 사랑하던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바나나였습니다.
점심 메뉴로 친구들이 샌드위치, 초밥, 수프 등을 선택할 때 V는 바나나 딱 하나만 들고서 "이게 내 점심이야"라고 해서 친구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늘 가던 가게에 바나나가 없을 때에는 스타벅스에라도 꼭 가서 '그녀의 점심식사'인 바나나 하나를 사서 나오곤 했습니다. 음료도 없이. 그렇게나 그녀가 바나나만 찾았던 이유는 그녀가 용돈이 없어서도 아니었고, 식사 시간이 부족해서도 아니었고, 체중감량에 뜻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V의 말에 따르자면, 바나나는 아주 훌륭한 과일이고, 바나나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바나나를 식사대용으로 어떤 때에는 3끼 내내 먹는다고 하였죠. 항상 그녀는 바나나와 함께 하였기에 우리는 V를 '바나나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그녀가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이 생긴 가냘픈 소녀처럼 상상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키 160cm 정도에 체중이 70kg는 거뜬히 넘을 것처럼 보였으니까요(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녀의 외모에 대해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도 바나나를 좋아하고, 바나나 이외의 과일들도 다 좋아하지만 과일에 대해서 제가 V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지금부터 여러분께 들려드리려 합니다.
과일에 배신당하지 마세요
새콤 달콤한 과일은 맛도 좋지만 먹기도 편해서 식사 후 디저트, 간식, 그리고 주스로 혹은 바쁠 때 식사 대용으로도 활용됩니다. 또 여러 가지 미네랄이나 영양소도 풍부하고 섬유질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건강식품으로 혹은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많은 분들이 즐겨 섭취합니다. 이때 과일과 함께 언급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채소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금치, 배추 등의 채소 이외에도 딸기, 수박, 참외 등도 채소에 포함되므로 과일과 채소에 대해 많이들 하는 오해 몇 가지를 풀어보겠습니다.
과일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밥, 빵, 사탕, 과일 그리고 채소 모두 크게 탄수화물 식품입니다.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혈당(혈액 중의 포도당)이 올라가면서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그리하여 지금 당장 쓰지 않을 당은 글리코겐이나 지방으로 바꿔서 저장해 두고 혈당을 떨어뜨립니다. 혈당을 빠르게 올리는 음식을 자주 먹게 되면 많은 양의 인슐린이 반복해서 나오게 되므로 점점 인슐린 저항성(인슐린에 세포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생겨서 당뇨나 비만 등을 유발하게 됩니다. 쉽게 생각하면 혈당을 빨리 올릴수록 살이 찌도록 만들 가능성이 높은 음식이라고 여기셔도 됩니다. 그런데 과일에는 섬유질이 많고 과일에 포함되어 있는 과당은 포도당에 비해서 혈당을 천천히 올리기 때문에 과일은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저녁 대용으로 혹은 식사 대용으로 과일을 드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사실이 있습니다. 과일 속의 과당은 근육이 사용할 수 없는, 즉 운동으로 쓰일 수 없는 당의 형태이기 때문에 대부분 간세포에서 처리됩니다. 따라서 오히려 포도당보다 혈중 지질로 바뀌는 비율이 높아서 고콜레스테롤혈증과 같은 이상 지질혈증과 지방간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과당 섭취가 많은 사람은 중성지방의 수치가 높거나 2차적으로 인슐린 감수성이 떨어져 비만과 당뇨병 등 대사증후군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중년 여성분들 중 고지혈증 혹은 지방간 진단을 받은 분들 중 과일 애호가를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해독주스를 마시니 배가 더 빨리 고파져요
과당은 동일한 양의 다른 당분에 비해 인슐린과 렙틴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포만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덜합니다. 즉 과일을 먹고 나면 다른 음식을 또 찾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과일을 주스로 만들어 마시면 섬유질이 파괴되면서 혈당을 빠르게 올려버립니다. 혈당을 빨리 올릴수록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비만이나 당뇨 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소아과학회에서는 과일주스를 소아비만의 원인 중 한 가지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피하고 싶다면 과당의 함유량이 적은 채소의 양을 훨씬 늘려서 주스를 만들어 먹거나, 갈거나 즙을 내서 먹지 않고 씹어 먹는 것이 하나의 해결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레르기 질환에는 신선한 과일을 많이 섭취할수록 좋다?
과당은 단백질에 들러붙어 염증반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증 반응이 일어나기 쉬운 알레르기 질환에는 별 도움이 되질 못하죠. 특히 사과, 바나나, 딸기, 배 등의 과일과 채소가 직접적으로 두드러기나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특히 생채소나 생과일을 섭취했을 때 증상이 생기기 쉬우며, 구토, 복통, 아토피 피부염의 악화, 천식 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유 속의 유당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유당 불내증처럼 '과당 불내증'이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과일이 배에 가스가 차게 만들거나 설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일이 무조건 몸에 해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윌리엄 패터슨 대학교의 식단 연구원인 제니퍼 데 노이야 박사는 어떤 채소와 과일들은 보양식에 버금가는 영양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30가지 과일과 채소의 순위를 매기기도 했습니다.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면 대장암의 발병률도 낮출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단지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과일이지만 오해만 없다면 더욱 건강하게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