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살아 행복한 의사 이야기
팩트와 스토리 사이
오늘은 혈압약과 당뇨약을 드시다가 운동하면서 체중도 줄이고 약을 끊은 70대 여성이 간기능수치가 높다는 말을 듣고 걱정에 잠이 안 온다며 내원하셨다. 최근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서 혈압이 갑자기 올라 응급실에 갔다가 혈액검사를 하고 나온 결과였다. “대학병원에 가야 할까요?” “바이러스 간염도 아니고 초음파도 정상이었다니 간에 부담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드시지 말고 지켜봐도 될 것 같애요.” “가족 중에 간경화로 죽은 사람이 있어 걱정돼요.” “ 아 그럼 걱정이 많이 되시겠네요. 몇 주 약 드시고 나서 검사해보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애요. 그것보다는 혈압이 문제인데 전에 드시던 약을 다시 드셔야 겠어요.” “어제 아침 반알 저녁에 한 알 오늘 아침 반 알 먹었어요.” “한 알 드시다가 안정이 되면 반 알 드시는 게 좋겠어요. 혈압이 좋아졌었는데 스트레스가 있지 않으세요?” “남편 때문에 못살겠어요. 이렇게 아픈데 남편한테는 말도 안하고 조카 불러서 응급실 갔어요” 남편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지 장황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금 정리가 되니 “당은 제가 이제 자신 있게 조절할 수 있어요. 어떤 때 올라가고 어떤 때 내려가는 지 확실하게 보이니 그대로만 하면 돼요.” 다음엔 코로나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남편한테 스트레스를 받는데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으니 어디 말할 데도 없어 힘들어요. 전엔 피아노를 치면서 위로를 받았는데 눈이 잘 안보여 그것도 어렵고 너무 우울해요.” 이렇게 길게 이어진 이유가 코로나에 있었구나 한다. 다시 혈압 얘기 당뇨 얘기로 이어진다. 이대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아 적당히 말을 끊는다.
의사들은 팩트만 이야기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수련 받던 시절 환자에 대해 장황하게 보고를 하면 날벼락이 떨어지기도 했다. 바쁜 시간에 얘기가 길어지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다. 그러나 환자가 느끼는 증상에는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라 혈압 높으면 혈압약이라는 식으로 단답형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괜찮던 혈압이 왜 오르게 되었는지 알아야 치료가 되는 것 아닌가. 검사결과라는 팩트도 스토리화 되어서 전달되어야 한다. “엑스레이 정상이니 기숙사 들어가도 되겠어요.”라든가 “혈당이 조금 높네요. 은퇴를 하셨으니 이제 하루의 시작을 운동으로 하세요.” 등등. 의사들은 팩트에 능하지만 스토리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환자의 삶의 맥락에 따라서 팩트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여야 하는 거다. 대학병원에 다녀온 환자들은 궁금한 게 있어도 물어볼 수가 없다며 동네의원에 와서 물어본다. 팩트만 몇가지 전달받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그 환자의 여러 가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주치의가 다시 스토리로 구성하여 이야기해주게 된다.
몇십 년 지역에서 같이 생활하며 의사 생활을 했으니 이제야 의학적인 것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곤 하는지가 조금 알 것 같은데 의학교육만 가지고는 이게 쉽지 않다. 어느 나라에서는 의대생들이 지역사회에 사라고 있는 환자 한 분을 주기적으로 방문하게 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경과를 지켜보도록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병원에서 위중한 환자만 돌보다 나오기 떄문에 감기나 장염 같은 ‘하찮은’ 질환은 우습게 여기게 되는 경향이 있다. 허구헌날 변하지 않는 만성질환자들이 운동을 잘 할 수 있게 안내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 되는 거다. 의사가 나오는 드라마도 죽을 뻔하던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훨씬 멋있지 않던가. 하지만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살면서 어떤 건강문제가 생기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잘 이해하고 안내하는 의사를 키워내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