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원 원장을 3년간 지냈다. 지역보건사업을 해보고 싶어 보건소에 들어갔으나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위치로 가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의료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의사 둘 있는 의원에 부부가 일하기는 좀 그랬다. 고삼 형님들은 “그 집 부부 싸움하면 그날은 농민의원 문 닫는 거 아녀?”라고 하기도 했다. 하긴 부부가 같이 휴가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 근처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상가를 분양받아서 ‘연세가정의원’을 열었다. 개인의원이지만 조금 다른 모습으로 하고 싶었다. 진료실에서만 해결할 수 없는 건강문제가 많았다. 거동이 불편해서 병원에 오실 수 없는 분들도 있었고 몸이 안 좋은데도 해로운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있는 분들도 많았다. 건강강좌를 하여 모임도 꾸려보고 왕진도, 독거노인 주치의 사업도 했다. 간호사를 구해 그런 일들을 함께 하고 1주에 한 번은 대진의를 구해 진료를 하도록 하고 나는 왕진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혼자 신나서 할 때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지만 내가 지치면 여태 하던 일은 한순간에 모래성이 되고 마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안성 의료 협동조합 2대 이사장을 지내고 있던 송창호 이사장님이 찾아오셨다. “그렇게 혼자 애쓰지 말고 같이 해요. 의료 협동조합 지점을 만들면 어떨까 해요. 이쪽은 아파트 지역이니 주부들이 많이 활동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어요.” 아, 지점. 그 생각은 왜 못했을까.
바로 조직을 통합하는 일에 들어갔다. 같이 일하던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도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다. 그중 두 사람은 17년이 지난 지금 차장으로 승진을 하여 의료 협동조합의 의원 실무를 꽉 잡고 있는 중진이 되어있다. 박한나, 정순아 선생님. 나와 함께 입사동기가 된 이들이 나하고만 일을 했다면 이렇게 오래 있었을까 싶다. 조합의 다른 의료기관에서도 일을 해보고 여러 회의에 참가하면서 어떤 원칙으로 조합을 운영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을 했던 것. 그러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함께 했던 것이 그들의 뼈를 굵게 하고 지금의 그들이 있게 한 듯하다. 지역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도 의료 협동조합에 있다고 하면 좋게 봐주는 시선도 한몫했으리라.
통합하고 나서 어려운 일도 많았다. 내가 잘하지 못해서 생긴 일들이었지만 조합원들이 잘 참아주고 사랑해 주셔서 살아왔다. 2층에서 1층으로 옮길 때도, 길 건너편으로 옮길 때도, 1일 찻집을 열어 출자 운동과 홍보를 하고 내 집 옮기듯 했다. 조합 실무자와 간호사는 해당 지역의 조합원들 가가호호 방문을 하고 노인정마다 찾아가서 건강체크를 했다. 어린이집 건강검진, 가정간호, 왕진 등 의료에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다. 조합원들은 직접 건강학교를 만들었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우리 마을 꿈 지도’를 작성하여 위험한 것들이 발견되면 시청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모여서 워크숍을 하며 이런 것을 하면 좋겠다 저런 것을 해보자 꿈을 꾸었다. 3동에만 소모임이 20여 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