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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슬 Dec 10. 2021

[아내일기] #1. 말을 이쁘게 하는 남편

다소 말이 없는 편.


요즘 우리부부는 퇴근 후 좋아하는 드라마나 유투버의 브이로그를 보며 '어머머 세상에 이런것도 있네'하고 방구석 세상 구경에 흠뻑 빠져있다. 달콤한 신혼 생활이라기 보다는 익숙한 아늑함을 즐기고 있다. 


평생을 같이 산 가족에게도 말 수가 적은 남편은 퇴근 후 쇼파에 앉아 종알종알 하루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혹여나 내가 집안일을 하다가 좋아하는 장면 하나 놓칠까 내 귀에 들리게 그 장면을 세세하게 설명하기 바쁘다. 가끔은 그런 남편이 귀엽기도 하고, 놓친 장면 하나가 아쉽다기보다는 귀에 들리는 그 자상함이 반가워 더 사브작 부산스럽게 움직이기도 한다. 


어제는 같이 요리 관련 유투브를 보고 있었는데, 요리를 취미로 즐기는 남편이 아내와 지인들에게 요리해주는 내용의 영상이었다. 단순히 영상미가 이쁘고, 허당끼가 조금 있는 유투버가 재밌어서 요즘들어 보기 시작한 영상인데,남편이 가만가만 보더니 언젠가 저렇게 요리를 하고 싶단다.


뭐 이 말이 감동스럽데는건 절대 아니다. 신혼집에서 처음 남편이 해줬던 계란볶음밥을 먹으며 왜 그렇게 자취할 당시 남편이 버거킹을 자주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사회초년생 요리에 소질없는 남자들은 인프라 좋은 곳에서 요즘 같은 세상의 좋은 환경을 잘 이용해야 건강하게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장난스럽게 내가 쳐다보자 어쭈우~? 하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그는 웃음 가득한 목소리와 장난끼스런 눈빛으로 저렇게 요리하려면 어여 돈벌어 파이어족이 되어야 한다는 둥, 주택으로 이사를 가야한다는 둥 제법 그럴싸한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말수가 적은 남편인데, 영상 하나에 이렇게나 수다스러워진다. 

"자기가 나한테 왜 결혼했냐는 질문에 게으른 나를 아침 일찍 일어나게 하는걸 보고 내가 자길 많이 사랑하는구나 라고 느껴서 결혼했어 라고 답했지만 그게 아니었어" 

엥? 갑자기? 이게 뭔 말인가 싶어 "왜?"라고 묻자

"그냥 단지 게으른 날 부지런하게 만든게 아니라 내가 지금 저거 보면서 생각했는데 
시간이 있네 없네, 장소가 어떻네 저떻네라고 따질게 아니라 그저 자기한테 맛있는거 해주고싶다, 내가 만들어주고싶다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게으른 나를 부지런하게 만드네가 아니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이었어 여보는"



아, 그때.. 갑작스럽게 입원을 한적이 있었다. 우스겟소리로 남들보다 통증을 느끼는 강도가 강하다 어쩐다했는데,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의 아픔이란 걸 응급으로 입원한 후에야 알았다. 언제 이렇게 몸이 망가졌는지 나름 잘 관리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연애를 시작한지 6개월쯤,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것만 같아서 괜히 서글펐다. 근데 남편은 입원한 나를 보기 위해 집에서 1시간 거리를 버스타고 와서 내 얼굴을 잠깐 보고 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어떤 시간이든 퇴근하면 날 보러 왔다. 누우면 레드썬 3초면 잠드는 사람이자 흔들어 깨워도 꿈쩍 않는 사람이었단걸 그땐 몰랐다. 


남편은 이 때, 결혼을 결심을 했단다. 이렇게까지 본인을 일으키고, 부지런하도록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랑 결혼을 하라는건가 싶었단다. 지금 집에서 보는 유투브 영상 하나로 이 남자, 여기까지 말한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서버개발자로 하루 종일 코딩에 빠져살고, 심지어 경상도 토박이 남자. 말주변 없기로 소문나고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따지며 감정적인 말보다는 이성적인 냉정함이 더 표정에 드러나는 저 남자가 내게 공감을 하고 감성을 논하며 내 삶의 풍요를 채운다. 


이 사람의 자상한 말 한마디가 내게 그렇다. 전혀 부족하지 않은 가족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나만의 소사를 이루며 누구에게라도 아쉬운 소릴하더라도 전혀 억울하지 않은. 나만의 단단한 인생이라고 살아왔지만 그런 내게도 가끔은 한 없이 으스러지고 녹아지고 싶은 그런 기분일 때 보통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온전히 둥근 문장들이 나를 모질지 않도록 만든다. 


아주 어릴적부터 이상형에 대한 물음에 나는 항상 '말을 예쁘게 하는 남자'라고 대답해왔다. 내가 완벽한 남자와 결혼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해와 배려, 그리고 공감이 얼마나 귀하고 쉬운게 아닌지를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건 내겐 다시 없을 행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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