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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예 Jan 23. 2019

촛불도 유난이었다

유난 좀 떨면 어때? 세상은 유난스럽게 변화해 왔는 걸.

      촛불로써 정권을 심판한지 어언 2년이 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 촛불집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 촛불집회는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하지만 촛불이 과연 처음부터 국민들에게 이렇게 환영받는 존재였을까. 아니었다. 촛불도 처음엔 유난이었다. 


      “정치 외교학과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유난이냐. 너만 잘났냐?”

      어떤 행사를 무사히 마무리 하고 촛불집회에 가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을 때 들은 말이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투표를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으며 현 시국이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굳이 지금 가야하냐. 너만 잘났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정치외교학과인 것과 내가 집회에 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관련학과 학생이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누가, 어떻게, 그렇게 말했냐며. 하지만 그 당시 그 곳에 있었던 다수는 침묵으로써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끝내 나는 그 날 집회를 참여함으로써 그들에게 유별난 사람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인 ‘모든 구성원의 평등과 기본 인권의 보장, 동등한 참정권의 제공’에 대해 역사적으로 큰 기여를 했던 사건들도, 발단은 누군가의 유난스러운 행동이었다. 일례로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인종차별 금지를 위한 운동은, 버스 안의 백인 칸에 꿋꿋이 앉아있던 한 흑인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짐 크로우 법이 시행된 지 무려 78년이 지나서야 일어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긴 세월동안 차별에 대해 울분은 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순응했을 것이고, 그들의 입장에서 자리를 비키지 않은 여성은 유별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여성의 참정권 역시 여성도 평등한 존재라고 외치기 시작한 유별난 소수의 여성에 의해 구해졌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능력이 떨어지고, 가정을 지키는 것이 본분’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을 그들의 ‘유난스러운’ 생각으로 깬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어찌 보면 ‘유난’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누군가에 의해 세상은 변화해왔다. 

  

    요즘 한창 이슈인 청소년 선거권, 페미니즘, 특수학교 설립 등 특정인들에 대한 권리보호, 권리구제에 대한 기사엔 언제나 이런 댓글이 달린다. “별 걸 가지고 유난이다.”, “왜 너네만 이렇게 유난을 떠냐.”, “왜 이리 불편하냐.” 그런 댓글을 남긴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유별난 사람에 의해 변화해왔고, 인종차별 금지나 여성의 인권 신장 같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모두 그런 유난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이 모든 유난스러움은 ‘모든 구성원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설령 누군가의 어떠한 유난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세우는 것과 전혀 무관해 보일지라도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의사결정체제에 절대 진리란 없으며 많은 이들이 선택한 것이 무조건 옳지도 않고, 이 속에선 억지 같은 의견일지라도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해 칼 포퍼는 ‘가장 나쁜 국가 형태를 피하는 수단’이라 표현했다. 최선이 아닌 차악의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함부로 ‘유난 떨지 말라’고 하지 말자.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받는 촛불도 처음엔 유난이었다. 유난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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