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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담서(韓民談書) 10

우장춘 전기

by 솔바람

우장춘 전기


2025년 2월 민주국가 대한민국에는 너무나 친일파 뉴라이트들이 득세하고 있다.

뉴라이트의 역사는 이승만과 이승만의 자유당의 친일 경찰독재 세력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근원은 전제 왕국 조선의 기득권층에 해당되는 왕과 권력층에 해당하는 양반귀족들 중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되는 되는데, 박정희 공화당의 군사 독재 세력- 전두환 노태우 민주정의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의 군사 독재 세력-민주자유당- 한나라당으로 기득권의 역사를 이어왔고.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세력 정권에서 힘을 펴지 못했지만,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슬금슬금 나타나 기득권을 누리다가, 문재인 정부 때 조금 주춤했으나 윤석열 정부에 들어 요직을 차지하면서 한국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친일파 뉴라이트들은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감추기 위해 민주세력들을 용공 좌익 빨갱이로 몰면서 은근슬쩍 일제 강점기 역사를 왜곡(歪曲)하여 왔는데, 윤석열 정부에 들어선 최근에는 노골적인 친일행각과 역사 왜곡은 물론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에 대해서까지 흠집 내기를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땅에서 나서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 흘린 수많은 순국 선열들 덕택에 그들의 선대 어른들이 친일해서 남긴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아왔고, 그들도 그 자손들도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아갈 것인데, 한국인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 선조들의 친일행각에 대한 죄의 값을 치르기를 요구하지 않고 심지어는 법으로 그 재산을 되찾는 것을 막지 않고 보기까지 하는데, 일본인이 될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일본의 편을 들어 국익을 해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친일파 뉴라이트들에게 “ 대한제국 말기에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 아버지 때문에 일본에서 태어나 괄시받으며 일본인으로 살다, 한국인 2호 농학 박사로 한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농업발전에 큰 공(貢)을 세워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씻어 낸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먼저 우장춘 박사와 같은 해에 친일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1호 농학 박사인 임호식(林浩植)도 함께 살펴보았다.


1. 임호식 박사(1,898년~?)


임호식(林浩植) 박사는 한국인(당시 조선인) 2호 농학박사인 우장춘에 앞선 한국인(당시 조선인) 1호 농학 박사이다.


임호식 박사는 3년제 법학대학이었던 양정의숙(양정고등보통학교. 1,913년 설립), 수원고등농림학교(1,904년 개설 1922년 개칭. 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홋카이도제국대학(현, 홋카이도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조수를 거쳐 1935년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1936년 2월 24일 곰팡이를 이용한 식품 연구로 교수회에서 논문이 통과된 직후 홋카이도제국대학의 농학 박사 학위 취득했으며, 같은 해 4월 14일 정식 학위를 수여했으며 1936년 4월 1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 대대적으로 " 수일 전에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후일, 도쿄도 스기나미구에 위치한 엔도제약소(遠藤製藥所)에서 연구를 계속했다고 하는데, 그 외의 가족관계나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임호식 박사는 1898년 대한제국(고종 16년)에서 태어났는데, 가족관계나 유년 시절을 알 수 없지만, 1910년 한일합방과 1945년 해방된 사이의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홋카이도제국대학을 나온 후 일본인으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인 1호 박사로 조선일보에까지 났음에도, 그의 유년기 학력이나 아버지와 가족관계가 알려져 있지 않은 고학력자인 것으로 보아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건너간 부유한 환경의 친일파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엔도제약소 근무 이후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이었기에 크게 출세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살았기 때문인지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전반적인 행적으로 보아 만약 그대로 한국에 살았다면 아마도 그와 그 가족들과 그 후손은 뉴라이트에 속했을 것이다.

2. 우장춘 박사(1,898년~1,959년)


우장춘 박사는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생물학자·농학자·원예학자이자 한국인(당시 조선인) 2호 농학박사이다.

참고로 박사 학위 수여일 기준으로는 우장춘이 2호 박사이나, 논문 통과일 기준으로는 우장춘이 1호 박사인데, 우장춘은 임호식의 논문이 통과된 1936년 2월 24일보다 약 한 달 앞선 동년 1월 23일 논문이 통과되었고, 임호식이 박사 학위를 받은 동년 4월 14일보다 약 20일 늦은 5월 4일 문부성에서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1) 우장춘의 출생과 아버지 우범선


우장춘은 임호식과 같은 해인 1879년 대한제국(고종 16년) 출생으로, 아버지는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고종 13년) 무과에 급제했던 우범선이다.


우범선(禹範善)은 1881년(고종 18년) 일봉에 밀행했다 돌아온 경력이 있는 온건 개화파 무관(武官) 관료로, 1894년(고종 31년) 6월 일본군이 대원군을 앞세워 무력으로 경복궁에 침입하여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김홍집 내각을 세웠을 때, 김홍집 내각에서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의 우대 부령관(右隊副領官)에 임명되어 친군장위영 정령관(正領官)으로 승진했고, 2개월 후인 그해 8월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갑오개혁에 참여한 후 승승장구하여 1895년(고종 31년) 3월 참령(參領)까지 올랐으며, 1895년 4월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건의로 조선군 훈련대가 창설되자 제2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1895년(고종 31년) 5월 우범선은 재차 일본으로 잠시 망명하였는데, 당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 확립에 반발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일군의 정치 집단이 대두하여 김홍집이 사임하고 박정양 내각이 집권하게 되었고, 이때 명성황후가 이를 이용하여 박영효를 축출하려 하자 박영효 등 친일세력들이 훈련대 병력을 이용하여 왕궁을 점령한 후 고종을 폐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 음모가 곧 누설되어 체포령이 떨어졌는데 이때 우범선도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7월 명성왕후 세력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력하여 친일세력을 축출하고 그 대신 친러 세력을 등용하려고 하여 조선군 훈련대를 해산하려 했다.


같은 해인 1895년(고종 31년) 9월 일본 공사에 이노우에 가오루의 뒤를 이어 새로 미우라 고로가 부임했고, 미우라가 우범선을 만나 난국을 헤쳐 나아갈 방도를 묻자 무력으로 명성왕후를 쫓아내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성립하길 주장하였다.

결국, 9월 20일 미우라는 친일정권 성립 계획을 구체화하였는데, 일본 공사관 일등서기관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와 일본 공사관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지도자로 하는 일본 낭인 그룹과 공모한 뒤 해산위기에 처한 조선훈련대의 쿠데타로 위장하고, 서울에 있던 일본인 대륙 낭인들을 앞잡이로 해서 대원군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살해한다는 명성왕후 시해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미우라는 일본군이 양성한 친일군대인 조선훈련대의 간부들인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전 군부 협판 이주회를 포섭하고, 훈련대 동원 책임을 우범선에게 맡겼다.


같은 해인 1895년(고종 31년) 10월 7일 고종이 조선훈련대 해산 명령을 내리자, 미우라는 계획을 앞당겨 다음날인 8일 새벽 4시 대원군을 사인교에 태우고 명거왕후를 시해하려 궁궐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궁궐에 침입한 주력부대인 낭인들은 대부분이 일본 옷인 하오리 하카마 차림에다 긴 일본도를 차고 한성 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가 지휘 아래 앞장섰고, 그 뒤를 일본 공사관의 수비대가 장총으로 무장하고 따랐으며, 그 뒤를 참령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훈련대가 그들 특유의 군복 차림에다 역시 장총으로 무장하고 좌익 측면에서 엄호하며 뒤따랐다.

명성왕후의 용모를 몰랐던 일본낭인들은 한참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명성황후를 발견했는데, 낭인 데라자키 타이키치(寺崎泰吉)라는 자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郎)와 마키(木熊虎) 두 사람의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성황후를 칼로 내려쳐 시해했고, 미우라 공사가 경복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의 시체를 확인하였다.


을미사변에 성공한 미우라는 명성왕후를 시해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 경찰관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郞)에게 급히 화장하라고 명령하였고, 오기하라는 낭인들을 인솔하여 옥호루의 동쪽에 있는 솔밭에서 명성황후의 유해를 불태웠으며, 명성왕후의 유해가 우범선의 지시로 윤석우(尹錫禹)에 의해 정전(正展)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지고 가서 땅속에 묻힘으로써 을미사변은 끝이 났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전국에서는 국모가 당한 만큼 되갚아 준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기치 아래 반일(反日) 분위기가 무르익어 의병의 봉기가 일어났고 그해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의병 전쟁이 전개되었으며, 이듬해인 1,896년(고종 31년) 우범선은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이두황, 장석주, 유길준, 유혁로, 권동진, 이진호, 정난교, 황철(黃鐵)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갔다.


일본으로 도망간 우범선은 도쿄 혼고(本鄕)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라는 일본인 여성을 알게 되어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우장춘을 낳았으며, 박영효가 경영하는 고베의 조일신숙(朝日新塾)에서 한국의 고학생을 지도하며 살다. 조일신숙이 해산되자 1903년에 히로시마 근처의 쿠레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우범선을 비롯한 이른바 '을미 망명객'들은 국내에서 그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자객을 파견하였기 때문에 늘 암살당할 위험 속에서 살았고, 결국 우범선은 만민 공동회 사건과 폭발약 음모 사건으로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전(前) 만민 공동회 회장 고영근에게 1903년 쿠레에서 암살되어 타국에서 국모 시해에 대한 심판을 받았는데, 그를 살해한 고영근과 그의 종자 노원명은 즉시 히로시마 경찰서에 자수하여 국모 보수의 문구를 보여 주었다.


(2) 우장춘의 성장과 일본 생활


우장춘은 아버지 우범선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어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후일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구제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고, 당시 농학실과에 가면 학비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으며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하였는데, 실과는 학사학위를 받는 과정이 아니라 제국대학에 부설된 구제전문학교 수준의 과정이었다.

우장춘의 어머니는 자신이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장춘을 조선인으로 키운 것으로 보이는데, 도쿄제대를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유학생 신분으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우장춘은 도쿄제대 농학실과에 다녔던 1918년 무렵 본인이 조선을 배반한 역적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사건을 겪는데, 당시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도쿄제대 강당에서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던 중,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유학생 김철수(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단상에 뛰어올라 "당장 이따위 연설을 멈춰라! 네놈이 그러고도 조선인이냐!"라고 일갈하며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그가 충격을 받아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러 가서였다.

처음에 우장춘이 도지사의 연설 내용과 멱살잡이 사건에 대해 일본어로 묻자, 김철수는 일본인으로 알고 "조선어도 모르는 녀석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냐."고 다소 날선 반응을 보였지만, 김철수는 우장춘이 아버지가 조선인이라고 하자 관심을 가지며 아버지의 성함을 물었고, 우범선이란 이름을 듣자 우장춘에게 “당신의 부친 우범선은 역적이고 매국노요, 당신이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당신이 배운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하고 절대로 당신의 조선인의 성을 갈지 마시오.”라며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주었고, 이후 우장춘 박사와 김철수를 자주 만나 친해져서 우장춘 박사가 먼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자식이 부모의 잘못이나 죄를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고, 따라서 우장춘의 이런 행동은 결코 쉬운 용기가 아닌데, 그의 영이 맑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우장춘은 그후 1920년에 도쿄제대 농학실과를 졸업하였고, 농림성(현 농림수산성. 한국의 농림축산식품부에 상응하는 행정 기관.)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여 나팔꽃의 유전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4년에 어머니 친구의 아들 가정교사를 하다 어머니 친구의 고종 사촌 동생인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코하루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우장춘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코하루는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코하루는 3년 후인 1927년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양녀가 되어 스나가로 성씨를 바꾸었고, 우장춘은 그 일본인의 데릴사위로서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여 스나가 성을 사용했으나, 우장춘 본인은 계속 우씨 성을 사용했다. 그의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주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인데, 단 이름은 그가 쓴 영어 논문에도 저자가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나와 있어 서양에서는 다들 일본인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당시 우장춘은 한국을 확고히 조국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애국심이 투철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의 가족이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1936년, 우장춘은 위에서 처음에 소개한 대로 과학계에서 호평을 받은 논문을 발표로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조선이었기에 무려 16년 동안 농사시험장의 기수(技手)라는 하위직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변적인 연구주제로 간주된 원예 분야만을 맡았을 뿐 그의 공식적인 위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37년, 결국 1년 만에 농사시험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후 곧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타키이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그곳에서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퇴사했으며 이후 4년 반을 실업자로 지냈다.


1947년 해방 2년 후 한국에서 우장춘 박사 환국 운동이 경남도 농림국장 김종의 주도로 일어나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가 세워졌고, 우장춘 환국 추진 위원회는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불하받아 연구부지를 마련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는 정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을 추진해 1949년 마침내 우장춘이 학수고대하던 연구소가 출범했는데, 이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후신이 지금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다.

다만 당시 우장춘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살고 있었기에 망설였는데, 이 때 일본에서는 뒤늦게 우장춘을 보내기가 아쉬워서 “ 우리는 우장춘을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며 여러 수를 동원했으며, 끝내는 그를 감옥에 가두려는 꼼수까지 부리며 귀국을 말렸다.

결국, 우장춘은 1950년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한국 정부에서 보내 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송환선에 탑승하는 방식으로 감옥생활을 감수하며 고국으로 돌아왔고, 이때 한국 정부는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어서 우장춘과 같은 농학 인재가 대단히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현재 물가로 20~30억 원 정도의 가치인 100만 엔을 이적비로 지급했는데, 우장춘 박사의 환국에는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를 필두로 한 정부의 적극적인 우장춘에 대한 지원 약속이 꽤나 주요했다고 볼 수 있다.

(3) 우장춘 박사의 한국생활

우장춘이 사람들의 큰 환영을 받으며 부산항으로 환국했던 당시에 김병규 위원장은 "우리 역시 우장춘을 대마도와 바꾸지 않겠다."라고 대우하며 그의 귀환을 뜨겁게 반겼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돌아와 주셔서 고맙소"라는 말을 전하며 크게 대우했다. 이에 대해 우장춘은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라며 귀환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그의 정체성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자, 우장춘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다만, 당시 말이야 대우를 해 줬다고 하지만, 열악한 한국 사정상 그야말로 자리만 내준 거여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영력이 높지 않았다면 결코 한국 생활에서 제대로 된 삶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장춘이 농림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농림부가 돈이 없다며 거절했는데, 좋은 말로 거절한 것이지 매국노 아들이라는 주홍글씨와 한국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무시한 것이었고, 우장춘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서 하소연했더니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을 불러 질책했기에 해결되었는데, 고생은 심했어도 그나마 다행히 대우마저 엉망은 아니었으나, 오늘날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보리고개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질책은 오히려 모자라고 뒤늦은 처사였다.

또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받고 일본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면서 이승만에게도 발급을 도와달라고 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받지 못하고 한국에서 임종 소식을 들어야 했던 악연도 있는데, 이에 우 박사가 일본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여권을 발급해 주지 못하도록 대통령이 일부러 막은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국 우 박사는 한국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식도 어머니 시신 없이 한국에서 빈소를 차려 치를 수밖에 없었다. 주장춘 박사는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의 자유천(慈乳泉)이라 이름짓고 돌에 새겨진 글씨도 친필로 써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우장춘 박사는 이적비 100만엔을 모두 다 한국에 뿌릴 우량 종자를 사는데 써버렸을 정도로 조국의 발전에 진심이었고, 6.25 전쟁 중엔 대한민국 해군 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했을 정도로 조국을 사랑했으며,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지내며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의 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한때 대통령에 의해 농림부 장관에 내정되었으나 거절하였고,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한여름철에도 평지에서 재배가 가능하게 된 평지여름 무와 고랭지 여름 배추, 최초의 중간 잡종에 의한 다다기성 품종인 애호박, 당도가 높은 참외 신품종 금싸라기, 겹-페튜니아 등을 개량하기도 했고, 또한 제주도와 거제도와 욕지도 등 남부 지역에서의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며 연구에 몰두했는데, 실제로 결과가 뛰어나 현재 감귤 산업이 바로 우장춘의 공로다.

우장춘이 이룬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한 것인데, 이는 생물체에서 다른 종 사이의 교잡으로 새로운 종이 될 수 없다는 그간의 과학계의 정설을 깨트리는 결과를 낳았고, 식물은 돌연변이가 아닌 종간 교잡을 통해서도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결국 육종학이나 식물학에서는 물론 생물학 자체에서도 “종의 분화는 자연 선택만의 결과이다.” 라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참고로 우장춘 박사가 한국 내 대중들 사이에서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1959년 정부에서 제작한 대한뉴스 227호의 ‘우장춘 박사 서거’에서도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것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실제로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교토대학 명예교수 키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이고,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한국에 최초로 들여와 보급한 사람이다.

우장춘 박사의 취미는 의외로 바둑, 화투, 마작, 장기 등의 게임이었다. 화투에 몰두한 나머지 일본의 코이코이를 변형한 고스톱으로 만들어 한국에 소개한 장본인인데, 단순히 그걸 유희로만 즐긴 게 아니라 바둑과 화투 등에서 나타나는 수학적 확률 연구에도 관심이 있어 일본에 있던 시절에는 화투 족보의 확률을 연구하고 계산한 책을 내려다가 농업시험장 상관 데라오 박사한테 혼났던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반면 술은 정말 못 마셨다는데, 우장춘이 아직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에 “ 어머니 사카이 나카가 원만한 인간관계를 중히 여겨서 하루는 아들에게 강제로 술을 따라주어서 마시게 했는데, 어머니와 강제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한두 잔 마시고는 그대로 뻗어버린 탓에 어머니가 대노했다.”는 일화가 있다.

우장춘 박사는 생애 막바지를 대한민국을 위하여 바쳤지만, 그의 한국 생활은 녹녹치 않았다. 그가 한국에서 보냈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의 후유증에다 6,25까지 거쳐 정신적 물질적으로 폐허 상태가 된 이승만 정부 시절이었고, 일단 출신부터가 한일 혼혈인데다 그 아버지는 상기한 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우범선이었고, 일본에 오랜 시간 있었던 데다 언어를 습득하는 것보다 연구를 중요시했기에 한국어가 간단한 읽기나 듣기만 가능했을 정도로 서툴렀으며, 따라서 친일파의 자식이라거나 한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냉대받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감싸준 이승만대통령과 한국사 최초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점 때문에 우장춘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우장춘의 연구소에는 우장춘의 명성을 듣고 보수와 근무조건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며, 인근의 여학생들이 연구소 앞에서 대기하다가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때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가족을 모두 일본에 두고 홀로 떠나온 외로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는 고무신 박사'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할 정도로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생활하며 ' 차별화된 전문성을 지닌 연구조직을 효과적으로 구성하고 연구 시스템의 세대 전승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가족이 곁에 없는 외로움을 대신하였다.

우장춘 박사가 '현지처'를 두고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한국에서 그와 함께 살며 그를 돕는 여인이 있긴 했지만 '현지처'라는 소문은 와전이다. 사실은 남편과 사별한 어느 중년 여인이 우장춘을 존경하여 우렁각시 노릇을 했고, 우장춘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재혼을 거부했는데도 계속 그의 살림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살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였을 뿐인데 현지처로 와전된 것이었는데, 그래서 이 소문이 바다 건너 일본의 아내에게까지 전해지자 아내는 아이들이 독립하면 한국에 와서 같이 살려고 했던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우장춘의 아내는 남편의 위독 소식을 듣고 나서야 한국에 왔고, 이때 간호사로 위장해서 우장춘과 면회했는데, 우장춘이 아내를 한눈에 알아보아 그간의 묵은 오해를 풀고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우장춘 박사는 불독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특유의 우직한 성품으로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고 게다가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오만하게 비춰질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대신 그런만큼 공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이어서 가령 해군 정훈장교 신분을 부여받아 연구원들을 관리 자신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연구원들 일부가 6.25 전쟁 발발 후 입대 명령을 받자 직접 윗선에 연락해 청탁해서 그들의 군면제를 성사시켜 위험한 전장에 가지 않고 대신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도록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정치인이나 기타 유력자들 심지어는 한국에서 살던 이복누나까지 군면제 청탁을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충고를 잊지 않고 대인관계를 중시했는데, 그가 한국에 정착하고 나서는 최소 한 번이라도 서로 인사라도 하라는 의미로서 연구소에서도 아침조회는 무조건 참석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 정도였고, 따라서 주변인들에게 늘 호평을 받았다.


(4) 우장춘 박사의 사망

우장춘 박사는 1959년, 국립의료원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었고, 사망 몇 시간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다. 병상의 우장춘 박사에게 문화포장 수여 사실과 함께 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같은 해 8월 10일에 사망했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된 한국인이 되었으며, 그의 묘소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농촌진흥청 뒷 편에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고 그 앞길의 도로명도 우장춘로인데, 환국 후 근무지인 부산원예고등학교(현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를 기념하는 의미로 그 동네에 우장춘의 이름이 남은 것이다.


우장춘 박사의 삶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보통 선조나 부모가 악업을 지을 경우, 반드시 본인이 아니면 그 자손 대에 악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무인 집안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 관료였고, 선대가 무인 집안이었다는 것은 폭력적인 행동으로 수많은 작은 악업(惡業)을 쌓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며, 결국 이런 악업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우범선 대에 이르러 적국인 일본을 도와 조국의 국모인 민비(민비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있으니, 다르게 불러 조국의 국운을 좌우하는 동족 인물인 민비) 살해의 공모자이자 시체를 불태워 묻어 범죄 사실을 감춘 범죄은닉죄라는 큰 악업을 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우장춘 박사는 아버지가 조국을 배반한 역적이자 매국노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였고, 농학박사가 된 것은 물론 조국에 대한 죄스런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조국발전에 헌신하였으며, 또한 자신의 능력과 직위를 결코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사용하지 않고 끝까지 초심을 지켜 스스로를 단속하고 남을 돕고 삶으로써 아버지는 물론 자신까지 대가를 치르며 사는 악업에서 벗어났는데. 그의 넷째 사위가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경영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이나모리 가즈오(1932~2022)인 것으로 보아 자식들까지 악업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5) 홍익인간 우장춘


우장춘 박사를 홍익인간으로 칭한 이유는 임호식 박사를 비롯한 일반인들과 다른 다음과 같은 행보 때문인데, 그가 다음과 같은 행보를 걸은 것은 홍익인간으로서의 맑은 영과 높은 영력을 가졌던 때문이다.


① 임호식 박사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그것도 말년의 흔적도 없을 정도로 비루하게 살아간 것과는 달리,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으로 살다 일본에서 성을 바꾸거나 하며 조금만 굽히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버리고 조국에 돌아와 헌신했다.

우장춘 박사는 순수 한국인이 아닌 한일 혼혈의 일본 태생이기 때문에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그가 자존심을 굽히고 일본에서 생활했으면 상당한 지원을 등에 업고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개인 연구에 투자해 지금보다 학술적으로 개인 경력에서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고, 사적으로는 가족과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걸 포기한 것이다.


인간이 일생에서 정체성을 지키고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버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인데, 임호식 박사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산 것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중시했기 때문이고, 현재에도 대한민국에서는 태어나 순국선열들이 희생한 댓가로 민주주의와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 국민으로서의 삶을 누리면서도 독재와 친일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역시 순국선열이 바라고 바랐던 자유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보면 임호식 박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사는 것으로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택했지만, 오히려 그 말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는 정체성을 지키고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버림으로써 결국 조국의 인정을 받은 것은 물론 아버지의 친일역사를 깨끗이 씻었는데, 고조선의 신교도 철학사상에서는 이런 인성의 인간 유형을 홍익인간이라고 한다.

실지로 세간에는 우장춘이 명성왕후 시해에 관련한 을미사변의 주범인 친일파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오명보다는, 오히려 조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헌신해 민생에 크게 기여(寄與)했던 그의 아들 우장춘 박사의 공헌 덕분에 애국자 우장춘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② 우장춘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그는 이승만이 그의 공적을 높이 사서 농림부장관에까지 내정한 것을 거절했을 정도로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과학자로서 묵묵히 연구에만 몰두했는데, 우장춘이 존경받는 이유에는 이렇게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고 오로지 과학자로서의 연구에만 몰두한 것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인간이 어떤 위치에서 높은 자리에 도달하기도 어렵고, 따라서 그 자리에 도달했을 때는 부귀영화(富貴榮華) 즉 권력=귀(貴)과 재물=부(富)과 영화(榮華)=행복과 쾌락을 탐하기 쉬운데, 임호식 박사는 높은 위치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려 친일을 하다못해 적국이었던 일본까지 가서 산 잘못된 선택을 한 것 때문에 자신의 조국은 물론 모든 것을 잃었고, 현재에도 높은 위치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해 몰락하는 치르는 경우가 많고 또한 높은 위치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정체성을 지키지 못해 자신은 물론 자손 대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사는 경우도 많다.


결과를 보면 임호식 박사가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사는 것으로 오히려 그 말로가 좋지 않던 것과는 달리, 우장춘 박사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 부귀영화를 멀리함으로써 자신의 분야에서 오히려 최고의 성과를 내 영원히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게 되었는데, 고조선의 신교도 철학사상에서는 이런 인성의 인간 유형 역시 홍익인간이라고 한다.

실제로 “삶이 평안하지 않을 때는 위기로 생각하지 않고 기회로 생각을 바꾸어 노력하며 때를 기다리고, 높은 곳에 올랐을 때는 아래를 바라보며 살고 내려갈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말도 있다.

③ 우장춘은 박사는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공사를 구분해 사생활이 깨끗했으며, 학생과 연구원 등 가까운 사람과의 대인관계를 중시해 좋은 평판을 받았다.


인간이 어떤 분야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는 성과를 이루면 그만큼 큰 부귀영화를 얻게 되고, 한 국가나 사회에는 부귀의 총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누군가 부귀를 얻으면 누군가는 그만큼 부귀 즉 재물이나 권리를 잃게 되며, 따라서 재물이나 권리를 잃은 사람들의 박탈감이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되어 돌아오게 되는데,

그러나 이런 사실을 외면하면 허무감과 이기심에 빠져 결국 권력이나 재물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어 돌파구를 찾게 되고, 결국 영화를 누리는데 치우쳐 진심(眞心)을 잃게 되거나 향락(享樂)에 빠져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망치게 되기 싑다.

결국, 이런 현상은 권력과 부를 가지면 더 많이 원하게 되고 충분히 가졌다 싶으면 허무감에 빠져 향락을 추구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이다.


결과를 보면 우장춘 박사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섰으나 부귀영화 대신 학문의 성취를 통한 조국에 대한 봉사라는 큰 목표를 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속하고 가까운 사람과의 인연을 살려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었는데, 고조선의 신교도 철학사상에서는 이런 인성의 인간 유형 역시 홍익인간이라고 한다.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면 부귀영화를 이룬 사람들이나 그 가족이 하는 짓들을 보면 대부분 성범죄나 마약 혹은 권력 남용에 빠지거나 가족 간에 서로를 무시하고 싸우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제자나 부하직원 등 자신과 가깝고 힘없는 사람에게 성추행이나 폭력을 저지르는 등 자신과 주위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간혹 우장춘 박사처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섰음에도 부귀영화를 이루지 못해도 도리와 인간관계를 지키며 소소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더불어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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