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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담서(韓民談書) 11

윤한덕 전기

by 솔바람

윤한덕 전기


윤한덕(尹翰德, 1,968년~2,019년)은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한국 병원 응급실의 틀을 구상한 인물이다.


1. 출생과 학교생활


윤한덕은 1968년 8월 8일 전남 해남군에서 아버지인 해남윤씨 윤재태(尹在台)와 어머니인 경주 최씨 최차남(崔次南) 사이의 3남 4녀 중 늦둥이 아들인 장남으로 태어났고, 1974년 국민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재직하던 해남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1979년 해남중앙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에 전남 광주로 일가족이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이사해 그곳에서 자랐고, 1983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입학했는데, 어릴때부터 라디오를 분해해 조립할 수 있었을 정도로 기술에 관심이 많아 서울대 공대로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의과 대학에 가고도 남을 정도로 점수가 좋아 집안에 의사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의대를 택했다.

1986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의과 대학에 진학했는데, 의 의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호방한 성격이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들이 얼차려로 오리걸음을 시키자 못 하겠다고 들고 일어난 적이 있고, 의대 2학년 재학 중이던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 참여하기도 했다.

1988년 의대 본과에 진학했지만, 애초에 원했던 대학이 아니었던 터라 의대 특유의 학습량이 버거워 본과에 진학한 1991년 중도 휴학을 하기도 했고, 같은 해 전남대에서 열린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분신한 식품영양학사 박승희 열사가 세상을 떠나자 추모하는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3년 전남대 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94년 응급의학과 인턴과정을 수련했는데, 그가 초창기 수련의를 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응급의학 부문(部門)은 현재의 통념적 응급실이 없어서 각과 인턴 레지던트들이 당직을 서면서 응급상황 발생 시 내려가 보는 의료 사각지대에 가까웠고, KTAS(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같은 공식 환자 분류체계도 없었으며, 응급실이라는 게 고작 대형 재난이 터지면 환자들이 병원 복도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치료를 기다리다 진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기도 하는 열악한 곳이었다.


2. 응급의학과 의사생활


1995년 군의관으로 입대해 1998년 복무완료로 군복무를 마쳤고,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에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들어갔으며, 2002년에는 동 센터 응급의료기획팀장에 선임되었고, 2003년 이란 지진구호를 위한 응급지원단으로 파견되었으며, 2005년~2010년까지 응급의료지원 기본 정책 수립에 참여했고, 또 2005년~ 2018년까지 응급의료정책 기획에도 참여했는데, 이 사이인 2006년 스리랑카가 쓰나미로 피해를 입자 의료지원차 파견되었다.


2008년 4월 7일 보건의 날 기념행사 때 국무총리상을 표창받아 수여하였고, 2008년~ 2011년까지 대한 응급의학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2012년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에 취임했다.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재임 시 아주대학교 의료원 외상연구소장으로 있던 이국종 교수와 함께 닥터헬기를 도입하는 등 응급의료정보 및 중증외상환자 이송망(移送網) 체계구축 사업에 착수했고, 전국에 76개 중증 응급질환 특성화센터를 구축했으며, 또한 전국에 17개 권역 외상센터를 건립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응급의료종사자 교육에 앞장서 응급의료실의 틀을 구상했는데,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2020년 한국 병원 응급실을 마련한 건 전벅으로 윤한덕 교수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그룹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응급의료와 중증외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어 중증 응급환자 발생 시 119는 어느 쪽이든 가까운 곳으로 가게 되고, 필요할 때 서로 환자를 주고받기도 한다. 응급의료센터는 응급처치 후 필요한 경우 일차적인 치료를 시행하고, 수술이 필요한 경우 응급수술로 이어지는데, 이 경우 하나의 과에서 검사 및 치료가 진행되기보다는 응급의학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일반외과, 마취통증의학과 등으로 구성된 중증외상팀에 의해 진료가 이루어진다. 중증외상센터 역시 응급실이 있어 전체적으로는 응급의료센터나 다름이 없다.


윤한덕 교수는 지하철 내 제세동기(除細動器)에 심쿵이라는 이름을 붙여 응급의료의 위기를 알리는 홍보를 하기도 했고, 이후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해상에서 일어났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도 사고 피해자를 위한 응급의료 지원을 계속했으며, 2018년 보건의 날 기념행사 때 대통령상을 표창받아 수여하였으며, 같은 해 연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사퇴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반려되었다.

결국, 2019년 2월 설 연휴 중 사무실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심정지(急性心停止)로 사망하였고, 같은 해 정부로부터 4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으며, 8월 18일 정부는 응급의료정책발전에 힘썼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였는데, 이는 민간인 국가유공자 지정으로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 당시 숨진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와 이준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이후 처음이었다.

같은 해인 2019년 전남대 의대 총동창회에서 윤한덕 추모실무위원회를 발족해 모인 기금으로 ‘윤한덕 상’을 제정했고, 다음 해인 2020년 ‘의사 윤한덕 1.2’를 발간했으며, 2021년 2월 초대수상자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선정되었다


3. 홍익인간 윤한덕


윤한덕 교수를 홍익인간으로 칭한 이유는 자신이 응급의료와 응급의료 전반 정책에 대한 최후의 보루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응급환자를 살리는데 일생을 바쳤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응급의료는 중증외상과 함께 병원의 입장에서는 수지가 맞지 않아 정부 지원이 없으면 운영하지 않으려 하는 돈 잡아먹는 하마와 같은 의료 부문이고, 정부입장에서는 필수 의료부문이어서 권력 유지를 위해 써도 될 예산을 재원으로 투입해서라도 보존해야 할 계륵과 같은 부문이며, 의사 입장에서는 정부 지원이 있지만 직접 수익을 낸 것이 아니기에 개고생을 가장 많이 하면서도 병원과 수익을 내는 다른 의료 부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열악하고 힘든 의료 부문이다.

사실 의사가 돈 되는 다른 의료부문이 많음에도 이런 과를 지원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하고, 더군다나 뛰어난 실력으로 참고 인내하며 괄목할 만한 실적을 낸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결국 홍익인간의 특성인 맑은 영성과 높은 영력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윤한덕 교수는 응급의료에 일생을 바쳤던 인물답게, 생전에 고단한 삶에서 숨돌리기 위한 유일한 취미로 초경량 무인동력기(초소형 미니드론, 초소형 미니RC비행기)를 좋아했고, 온라인 RC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아주 잠시라도 짬이 나면 병원을 안 떠나고 쪽방 구석에서 손바닥만한 초경량 무인 동력기를 조립하고 비행시키는 것을 즐겼는데, 응급의료 닥터헬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국종 교수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를 만나러 갔을 때 “ 당신이 이러는 동안 응급환자가 오면 누가 수술하느냐?”라며 꾸짖었다고도 하고, 이국종 교수 일생의 좌우명이라고 하는 “ 죽는 날 가져갈 것은 일생동안 치료한 환자의 명부다.”를 말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윤한덕 교수가 사망한 지 불과 6여년이 지나간 2,025년 2월 현재 그가 애써 만든 응급의료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4년 2월 2,000명 규모의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발표해 의료대란이 일어나 응급실 뺑뺑이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응급환자들이 늘어가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의 기재부에서 고대 구로병원 중증외상센터 예산 9억원을 0로 삭감했고, 결국 2024년 12, 3 비상계엄 내란을 일으켜 윤석열이 직무 정지되면서 권한 대행인 최상묵 체제의 윤석열 정부가 2025년 5월 말 예산지원을 중지하여 중증외상 전문의를 육성하는 국내 유일의 수련센터가 사라져 응급의료의 미래가 사라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서울시 재난관리기금 5억원을 지원해 해결했다고는 하나 임시미봉책이며, 응급의료와 중증외상에 대한 정치권과 국민들의 인식변화가 따르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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