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바람 Oct 20. 2023

해설 단군신화(55)

삼한시대 2(한민족 한반도 이주) : 초한 쟁패기와 한나라 건국

  초한쟁패기는 진(秦)의 첫번 째 황제인 진 시황제가 죽은 뒤 불안정한 상태가 되자, 초(楚)의 항우와 한(漢)의 유방 두 명이 반란 주동자가 되어 다시 18개의 제후국으로 갈라진 중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했고, 그 결과  중국의 두번째 통일 왕조인 한나라가 통일국가를 건설하게 되기 까지의 시기인데, 한국역사에서는 이때를 삼한시대 초기 혹은 오가통치시대라 한다. 




1. 진나라 멸망기 

 

 진나라(BC 221∼BC 206) 멸망기는 진시황 이후 진나라가 멸망하기 까지, BC 210∼BC 206 사이 약 4년간의 짧은 역사이다. 기원전 221년 통일제국은 이룬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환관 조고에 의하여 빠른 속도로 멸망하였다. 


 조고(趙高)는  본래 조()나라의 먼 왕실 자제였는데, 그 어머니가 죄를 지어 진나라로 망명하였다. 진시황은 조고가 부지런하고 법률에 정통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중거부령() 겸 행부새령사()으로 발탁했다. 조고는 진시황과 호해에게 온갖 아첨을 떨어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한번은 중죄를 저질러 사형당할 뻔했지만, 진시황을 말로 현혹하여 죄를 벗고 원래 직위로 복직까지 했고, 

 이후로도 시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시황제 말년에는 부새령이 되어 옥쇄를 담당하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50살이 되던 해, 외지로 5번째 순시를 나갔는데 평원을 지나던 도중에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진시황은 아들 부소에게 태자 자리를 상속한다는 조서를 써 조고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소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던 조고는 승상 이사 (李斯)와 짜고 조서(詔書)를 거짓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황제의 우둔한 막내아들 호해(胡奚)를 2세 황제로 삼아 마음대로 조종하였고, 이어 진나라의 공자(公子)·공녀(公女) 24명을 죽였다.


기원전 209년, 이세황제는 조고를 낭중령(郎中令)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국사(國事)를 맡겼다. 이 때 대규모 토목 사업과 환관 조고()의 전횡()으로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그해 7월에 이르러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는 구호로 유명한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하였고, 이무렵에 초나라 장군 항우가 거록대전에서 진나라 명장 자안을 격파하자. 진나라에 별망했던 연(燕)' 조(趙)' 제(濟)' 초(楚)' 한(韓)‘ 위(魏) 등 제후국들이 모두 부흥을 위하여 다시 왕조를 세웠다. 

 조고는 이세황제가 아직 젊고 미숙하여 만일 실수라도 저지르면 대신들에게 단점만 보이게 된다고 주장하며 이세황제를 조정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황제의 명이라며 조고가 모든 일을 결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승상 이사가 이세황제를 만나서 간언을 올리려 하였으나,  조고는 만나지 못하게 두사람 사이를 이간질해 간언을 막거나, 이세황제가 미녀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기려 할 때에만 이사의 접견을 허용하였다. 


 기원전 207년 조고는 이세황제에게 이사가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모함했고, 이사를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결국 이사는 반역죄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호해의 신임을 줄곧 받아왔던 터라 조고는 자연스럽게 승상의 자리에 올라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조고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해 8월 기해일, 자신의 말이 곧 황제의 말이라고 생각한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막중한지 시험하기 위해 사슴 한 마리를 이세황제에게 바치면서 이를 말이라고 주장했다. 이세황제는 웃으면서 "승상이 잘 못 본 것이 아닌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니?"라 하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조고의 말이 맞다고 말하였다.그 중 몇몇 사람들은 이세황제의 말이 맞다고 하였으나 이들은 훗날 모두 조고에게 모함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일화에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이는 곧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는 뜻으로, 조고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주장하며 이세황제를 농락하였듯이, 아랫 사람이 권세와 거짓말을 동원해 윗 사람을 농락하며 권세를 휘두르는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속담이 되었다.

 조고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주장하는 광경을 본 이세황제는 사냥으로 소일하였다가, 조고에 의해 모살(謀殺) 당했고, 조고는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옹립하여 진왕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곧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3족도 함께 처벌되었다.      


 진나라가 이처럼 멸망의 위기에 다다랐을 때, 유방과 항우(項羽)와 한신(韓信)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1) 유방


 유방(劉邦)은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펑현(豊縣)에 해당하는 패(沛) 땅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업을 돌보지 않고 유협(遊俠)의 무리와 어울렸다. 

 진(秦)나라 말기에 이르러 진승(陳勝)·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였으며, 유방도 BC 209년 향리의 지도자와 청년층의 추대를 받아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를 일으켜 패공(沛公)이라 칭하였다. 

 이듬해 북상하여 항량() ·항우()의 군대과 만나 연합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뒤 항우의 군대가 동쪽에서 진군()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이는 사이, 그는 남쪽으로 관중()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여 항우보다 앞서 수도 함양(陽)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또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을 폐지하고 법삼장()을 약속하여 인심을 수습하였다.

약 1개월 늦게 셴양에 도착한 항우가 유방을 살해할 목적으로 이른바 홍문(鴻門)의 회(會)에 불려가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유방은 부하인 장량(張良)과 번쾌(樊噲)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BC 206년 진나라가 멸망하자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였고,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2) 항우 


  항우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 하상(下相)에서 태어났다. 

  항우의 할아버지는 항연(項燕)이라는 사람으로 초나라 대장군을 지낸 인물이며, 진나라와 전투에서 패해 자결하였다. 항우가 태어난 시기는 전국시대였으며 그가 장성하였을 때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였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 항량(項梁)에게 맡겨져 가난하게 자랐다. 젊은 시절 키가 8척에 이르렀고 큰 솥을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문자는 제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이란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이라 하여 공부를 하지않았는데 오로지 병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항우는 이미 검술과 전투에 능했으며 각종 병장기를 잘 다루었다고 전한다. 삼촌 항량이 살인을 저질러 가족 모두가 회계(會稽, 현재의 쑤저우 蘇州)로 달아나 그곳에 정착하였다. 마침 회계군으로 행차하는 진나라 시황제의 성대한 행렬을 보고 '내가 저 녀석을 물리치고 황제 자리를 대신해 줄 테다'라고 호언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진나라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세원년(기원전 209년) 항우가 24살이 되던 해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나 진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 항우도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 태수 은통(殷通)을 참살하고, 회계군수가 된 항량고 함께 진나라 병사를 휘하에 모아 세력을 형성하였다. 항량과 항우가 거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에서 호걸들이 모여들었다. 진승과 오광이 내부 반란자에게 피살되자 더욱 세력이 확장되었고 책사 범증(范增)의 건의로 초나라 왕족 웅심(熊心:초나라 회왕의 손자)을 추대하여 봉기의 명분과 민심을 얻게 되었다. 항량이 진나라와 전투에서 사망하자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후 초나라 송의가 최고 사령관을 맡아 지휘하였지만 진군하지 않자,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앞장서 진나라 장한의 군사를 격파하고, 진나라 정예병을 패퇴시켰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가장 강력하고 유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항우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동쪽 성문인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했지만, 항우에 앞서 관중에 들어와 있던 유방(劉邦) 군사의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함곡관에서 유방을 물리치고, 관중(關中, 현재 산시성 위수)으로 쳐들어갔다. 

 항우는 홍문(鴻門)에서 유방을 만나 사죄를 받았고,  유방을 가소롭게 여겨 오히려 그의 계략에 속아 놓아주고 말았다. 항우는 BC 206년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을 파괴하며 황궁을 약탈하였고, 진나라 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도성 함양(咸陽)을 불사른 뒤에 팽성(彭城:徐州)에 도읍하여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으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항우는 초한쟁패기에 지휘관으로서 유방보다 더 뛰어난 면모를 보였던 초나라의 군주였고, 한(漢)의 유방과 함께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룬 초한전쟁의 주요 인물이었다. 만인지적(萬人之敵), 패왕(霸王),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가 모두 항우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어마어마한 무력과 고대사에서 적수가 없을 만큼 뛰어났던 천부적인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의미한 표현이었다. 


(3) 한신 


 한신의 출생일과 그의 집안에 관한 내력은 분명하지 않으며 진(秦)나라 때 사람으로, 회음현(淮陰縣:江蘇省)에서 출생하였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기록에 의하면 어려서 매우 가난했으며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끼니조차 제대로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 남창(南昌) 정장(亭長)의 집에서 밥을 얻어 먹다 쫓겨나, 강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사람들은 한신을 거렁뱅이에 무능력한 인물로 취급했다. 


  진나라 말 나라의 국운이 기울면서 난세가 되자, 항우가 군사를 일으켰을때, 한신은 초나라의 무장으로 이에 가담하였다.

  항우의 휘하에서 한신은 미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요직에 중용되지 못하고 한직(閑職)으로 전전했다. 한신이 불우하던 젊은 시절에 시비를 걸어오는 시정(市井)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는 일화 때문에 과하지욕(胯下之辱)이라는 고사가 생겨났으며, 이 일로 자신의 재능보다 무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뿐만 아니라 항우의 성품이 거만하여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자, 결국 항우를 떠나 유방(劉邦)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한신은 유방의 휘하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군법을 어긴 죄로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하후영이 한신의 탄식을 듣고 살려주었다. 하후영은 한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승상 소하(蕭何)에게 추천하였고, 소하는 한신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소하는 유방과 함께 군사를 일으킨 사람으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소하는 한신을 데려와 유방에게 천거하였고, 유방은 한신을 파격적으로 삼군 총사령관인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그후 한신은 무수한 군공을 세워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주고 자신은 제(齊)왕과 초(楚)왕의 자리까지 올랐다.



2.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유방의 한(漢) 항우의 서초(西楚)가 대립한 끝에 기원전 202년 12월 항우의 패배와 죽음, 그리고 한나라의 승리와 천하 통일로 끝나는 전쟁이다. 초한쟁패(楚漢争覇)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초한상쟁(楚漢相爭)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이는데, 이 시기를 별도로 초한쟁패기라고 하기도 한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는 초나라의 팽성에 도읍한 후 서초 패왕이라 칭하였고,  회왕(懷王)을 받들어 의제(義帝)라 일컫고 침(郴)에 옮긴 후에 이를 죽였다.  

 이 때 항우에게 참모 한생이 “관중은 뛰어난 요충지이자 비옥한 곳입니다. 이곳을 근거로 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습니다.” 라고 간하고 나섰다. 그러자 항우가 “성공하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비단옷을 입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하였다. 항우의 이말에서 금의환향(錦衣還鄕)과 금의야행(錦衣夜行)이란 고사성어는 생겨났다.  

 그러나 항우가 귀국한 후 유방은 관중 서쪽의 파와 촉 땅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우며 관중으로 진격였다. 중국의 중심인 북부의 관중을 차지하고도,  중국 남부에 위치해  한참 떨어진 초나라의 고향으로 귀국한 항우의 이 행동이야말로 천하를 유방에게 넘겨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항우는 진나라에 의해서 비롯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중국 전토에 여러 장수들을 봉건(封建)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구질서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택했는데, 자신은 강소(江蘇), 안휘(安徽) 등지의 9군(郡)을 지배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 대해서는 군공(軍功)과 협력의 정도에 의거하여 각 지역을 분봉(分封)했다. 유방에게는 파군, 촉군, 한중군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이라 하고, 기원전 206년 4월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각 봉국(封國)으로 철수시켰다. 

  항우가 실시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많은 불만을 남겼는데, 특히 회왕(懷王)의 약속에 위반하여 벽지(僻地)의 한왕에 봉해진 유방은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이었다.


 원전 206년 4월, 유방은 산지이자 귀양지인 파촉에서 천하통일의 최고공신인 한신을 얻고, 그해 8월 마침내 항우가 의제를 죽여 찬탈했다는 명분으로 관중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항우는 한과의 전투에서 언제나 승승장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안대학살 등으로 민심을 잃는 등 정치에 있어서는 무지렁이에 가까운 처신을 보였다. 또한 인재 기용에 있어서는 적들이 입을 모아 비웃을 만큼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항우의 부하들이 숱하게 이탈하여 유방 밑에서 항우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다. 그렇게 소하의 필사적인 보급과 팽월의 유격전으로 악착같이 버티는 한나라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채로 실속 없는 승리만 쌓아가는 도중, 별동대로 출발한 한신이 북방을 모조리 평정해 버리고 말았다. 

 

 한신의 기세가 날로 커지자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기원전 204년, 한신이 위나라, 조나라, 대나라를 차례로 격파하고, 제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에 한신 곁에 괴통(蒯通)이란 인물이 관상을 봐주겠다며 접근한 후, 한신을 설득하며 “유방을 믿지 말고 독립해 항우, 유방, 한신의 3국정립” 을 권유했다. 말하자면 천하삼분지계인데, 고통은 진나라(秦)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나라의 학정으로 인해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에서 진승의 부장 무신의 책사로 처음 등장했던 안물로 원래 이름은 괴철이었다. 

 한신은 미루면서 차마 한을 배반하지 못하였고, 또한 스스로 공로가 많다고 생각하여 한이 끝내 제를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괴철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자기가 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괴철은 거짓으로 미친 척하면서 무당이 되었다. 

 한신은 결국 제()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때 외교술로 전투없이 공략하려던 유방의 뜻과 달리 무력으로 제나라를 굴복시켰다. 한신은 군사면에서 크게 공을 세우자 유방에게 제나라 왕() 자리를 요구했다.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할 수 없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고, 후일 이 일로 한신과 유방이 등을 돌리게 되었다. 


 삼징왕과의 전쟁' 팽성대전 등 수많은 전쟁을 겪어오던 양국은 결국 기원전 203년 8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내용은 항우는 동쪽, 유방은 서쪽으로 다시 들어가고, 태공 등 유방의 가족들을 유방에 넘긴다는 내용이였다. 

 당시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던 항우는 이 제의를 당연히 수락하지만, 유방은 이를 어기고 서쪽으로 물러가지 않은 채 병사를 훈련시켰다. 항우가 이 소식을 듣고 서서히 군사를 훈련시켰고, 결국 유방은 선전포고문을 항우에게 보냈다. 그렇게 협정은 완전히 깨지고 다시 양국은 전투에 들어갔다. 그렇게 발생한 미지막 초한대전이 해하전투이다.  

  항우는 마지막 전투인 해하(垓下)의 결전에서 한왕(漢王) 유방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유방은 항우를 죽여온 자에게 제후로 봉해주겠다는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고, 항우가 이를 알고 있어서 여마동에게 상을 받게 하려고 고의로 여마동 앞에서 자결했다. 항우가 자결하자 여마동을 비롯하여 왕예, 양무, 양희, 여승 등 여러 장수들이 항우의 영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통에 항우의 영구는 사지가 찢어졌고, 왕예가 항우의 머리를 들고 달아나자, 나머지 장수들이 각자 팔과 다리를 하나씩 가져갔다. 이후 항우의 육체를 획득한 장수들 전원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항우가 사방이 적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사랑했던 여인 우희(虞姬)와 헤어지는 모습을 두고, 사면초가(四面楚歌)와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고사가 전해져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후 항우를 두고 후대의 사람들은 병법에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숙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한편 유방은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중 정도 부근에 이를 무렵,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이미 전쟁도 끝난 마당에 갑작스러운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었다. 

 이와 동시에 유방은 한신을 본거지인 제나라에서 항우가 다스리던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邳)에 정하게 하였다. 제나라는 폐지해서 한나라에서 1년간 직접 다스리다가 BC 201년에 부활시켜 자신의의 서장자 유비에게 맡겼다.



 3. 한나라


 초한쟁패기는 결국 유방(劉邦)이 항우를 물리치고 승리했고, 유방이 중국 두 번째의 통일제국 한나라(BC206~AD9)를 세워 한고조(漢高祖)로 등극함으로써 끝났다.

 한(漢)나라(B.C.202~A.D.220)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중국역사의 기틀을 세웠다. 한은 400여 년 동안 중국 대륙을 지배했는데, 오늘날 중국의 기초가 이때 자리를 잡았다. 한이 중국을 지배하는 동안 문화가 번창했고, 이것은 이웃 나라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윤리가 성립되었고, 제각각 사용하던 글자의 모양과 뜻을 통일해 완성했으며, 수많은 책이 출간되었다. 유명한 역사책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반고의 한서(漢書), 수학책인 구장산술(九章算術), 의학책인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인들을 뜻하는 한족(漢族)이나 중국의 글자인 한자(漢字)는 바로 한나라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천하통일을 이룬 한고조 유방은 장안에 미양궁을 지어 통일왕조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으며, 공신들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낙양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큰 연회를 개최하였다. 연회 자리에서 유방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항우를 꺾고 천하를 얻게 된 까닭에 대해 공신들에게 마음껏 이야기해보라고 하였다, 

 당시 소하(蕭何)와 장량(張良)과 한신 3명의 개국 공신이 초한쟁패기에 유방의 참모로서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자 분위가 풀린 공신들이 유방과 항우의 장단점을 마음대로 늘어놓으며 유방이 승리한 이유를 시끄럽게 늘어놓았다. 유방이 공신들의 이야기를 쭉 듣고 있다가 공신들에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일이라면 나는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달래고 전방에 식량을 공급하고 양식 운반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내가 소하만 못하다. 100만 대군을 통솔하여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틀림없이 손에 넣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그러나 이 뛰어난 인재 3인을 내가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만 있었으면서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사마천의 사기 한고조본기에 나오는 유방의 이 유명한 말은 삼불여(三不如)라는 고사가 되어 인사가 만사이고 인재를 등용하여 잘 활용하는 리더가 성공한다는 사례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한편 한신은 유방과 참모들의 견제를 받았다.  

 당시 한신은 팽성 근처인 하비에 수도를 삼아 항우의 서초 지역 대부분을 통치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과거 항우의 본거지에서 항우의 백성들과 부하들을 모으는 짓을, 그것도 황명까지 어겨가며 벌이고 있었다. 한신의 말이나 행동을 종합해보면 정말로 유방에게 반기를 들고 대적하려는것은 아니였을듯 싶지만 그건 한신 생각이고, 이미 제나라 사건 등으로 눈밖에 나있었던 한신이 이런짓을 한다는건 사실상 자신의 명을 재촉한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유방이 황제로서 제후국을 순회하며 초나라를 방문하자 한신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으로 짐작하였다. 한신은 유방을 안심시키고자 자신에게 의탁해온 종리매(鐘離昧)의 목을 베어 유방에게 바쳤다. 종리매는 항우 휘하에 활약했던 유명한 장수로 유방의 진영을 괴롭혔던 인물이었다. 그는 항우가 죽자 친구 한신에게 의탁하여 초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한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민심을 잃었고 유방은 한신을 모반죄로 체포하여 장안(長安)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한나라가 성립되었지만, 새롭게 성립된 한나라는 진나라때의 폭정과 거듭된 통일전쟁으로 오히려 매우 허약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 때 중국 대륙의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지도자였던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가 유라시아 초원의 동쪽지역의 민족들을 차례차례 정복하고 있었다. 

 한고조(재위: 기원전 202~ 기원전 195년)는 북쪽 국경을 통해 흉노와 거래되던 막대한 양의 한나라산 철제 무기를 걱정했고, 결국 무역 금지 조치를 내렸다. 비록 무역 금지 조치가 내려졌지만, 흉노족은 그들에게 몰래 무기를 팔 상인을 찾았다. 이에 기원전 121년, 전한 무제는 흉노족과 무기 밀매를 계속해온 상인 500여명을 처형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는 국경지대에서 무역을 하던 흉노족을 공격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흉노족은 기원전 200년에 지금의 산시성 지방을 침입했고 백등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198년에 흉노와 한은 화친조약을 맺었고, 흉노의 지도자 묵돌선우와 한의 황제는 결혼을 통해 동맹관계가 되었으나, 실제로 비단옷이나 음식 등의 공물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다. 

 묵돌선후의 통치기 말에 그는 만주와 몽골 고원, 타림 분지등을 지배했고, 사마르칸트 동쪽의 20개 이상의 지방을 예속 하에 두었다. 사기 조선 열전을 보면 한나라의 통일전쟁 때부터 연나라와 제나라, 조나라 출신 유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사가 나오며, 덕택에 그동안 연나라에게 눌러지냈던 고조선이 그 덕을 톡톡히 보며 연나라 시절에 상실당했던 영토도 상당수 회복하고, 세를 다시 떨치게 되면서 중흥기를 맞았다. 전란이 끝난 직후인 서기전 194년에 위만이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에 위만조선을 세우게 된 계기도, 이 유민 세력 중 위만 세력을 조선이 흡수하고 위만 세력이 조선의 정권을 차지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나라는 제7대 임금인 무제(B.C.141~B.C.87) 때 지휘관이었던 곽거병과 위청을 앞세워 흉노족은 물론이고 동월과 남월(베트남), 위만조선과 삼한의 유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 적인 정복 전쟁에 나섰고, 이 후 서쪽으로도 진출해 정복 전쟁을 이어가며 전성기를 이루었다. 

 전술했듯이 이 때 중국과 서방의 교통로인 비단길(실크 로드)을 개척했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이 공히 차이나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고, 실크로드가 알렉산더 때에 이미 힌두쿠시까지 연결되었음을 감안하면 한나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며, 한나라가 실크로드를 개척했다는 의미는 기존에 있는 산책로를 닦아 신작로로 새로 만드는 작업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제자백가와 헬레니즘 편에서 이미 설명했던 내용이다. 

 한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기원전 139년부터 기원전 125년까지 행해진 외교관 장건의 탐험으로 많은 이웃 국가들과 접촉을 했다. 장건은 대완, 강거, 대하 (박트리아왕국, 전에는 그리스) 등과 접촉했다. 이것은 로마 제국까지 연결된 실크로드의 기초가 되었고, 로마에 비단과 같은 한나라의 상품들을 수출하고 유리제품과 같은 로마의 상품들을 수입해왔다. 기원전 60년 서역으로부터 공격에서 로마와의 실크로드 무역을 지키기 위해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기원전 111년 남월국을 정복함으로써 광둥, 광시, 베트남 북쪽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108년에는 위만조선의 자리에 현도군과 낙랑군을 설치했다. 



  고조선 유민들의 한반도 이주는 진시황의 삼한춘추전국 통일 때 부터 시작하여 분서갱유를 기점으로 절정에 오르는데, 이 때 초한쟁패기로 접어들어 중국땅에서 다시 패권전쟁이 일어났다. 한민족으로선 안그래도 설 곳을 잃는 상태에서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아마도 아비규한의 지옥이었을 것이고, 그 지옥을 털출하기 위하여 한반도로 물밀듯이 몰려갔을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보통의 경우 국가나 나라가 망하면 점령지의 백성이나 국민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탈출하여 그 곳의 백성이나 국민이 되는 것이 상례이다. 한민족의 고조선의 경우는 정치국가 구려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삼한조선이란 나라이름으로 남아 있었고, 고조선이 멸망하여 삼한조선이 사라진 후의 초한쟁패기에도 오가로 무리가 나누어져 오가통치시대를 이루었으며, 그 좌중에 한반도로 옮겨 삼한을 이루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도 이런 경우는 보기 드물다. 물론 유대교를 믿고 그 역사를 잇는 유대민족이 있기는 하나, 신교를 버리고서도 민족의 역사를 잇는 한민족과는 비교할 수 없다. 


 유대인의 경우 이집트에 의해 잔혹한 정복과 학살을 당하자, 출애굽을 거쳐 가나안에 다시 정착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으나, 유다 지역은 이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갔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로마 제국 전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 진출하였다.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 문화적 영향을 끼치며, 오랜 기간 동화되지 않은 채 유대교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다. 중세에도 다수가 동화되지 않고 차별을 겪었는데, 근대에 와서도 차별은 잔존하였고, 유럽 정치의 극단화의 끝에 나치 독일이 주도한 홀로코스트 대학살이 일어나 유럽 유대인의 과반수가 죽고 남은 대부분은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으로 대거 이주하여 흩어져 살고 있다.      

현대국가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서 수립되었으며, 기본법에서도 스스로를 유대국가로 규정하므로 귀환법에 의해 이스라엘 시민권을 요구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국적 취득을 승인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흔히 유대인을 이스라엘인이라고도 부른다. 즉 이스라엘인은 민족명이기도 하고 현대 이스라엘국의 국민(영어로는 Israelis라 하여 민족명 Israelite와 구분한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족으로서 모든 유대인은 이스라엘인이지만, 국적으로 따지자면 이스라엘인이 아닌 유대인도 많고 이스라엘인 중에는 아랍인 등 유대인이 아닌 민족도 많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 중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도 많고, 이스라엘인들 중 유대인과 기독교인 역시 이슬람인들과의 종교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유대민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민족적으로 볼 때 유대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다르고, 종교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인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합작품이다.    


 한민족의 경우 종교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종교적 색체를 가지고 한민족의 역사를 이어왔고, 결국 한민족의단일 국가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단군이 신이 되어 남게한 그 힘, 즉 신교의 유습이 한민족을 하나로 이끈 힘일런지도 모른다. 

 삼한 시대 2기에 해당하는 초한 쟁패기와 한나라 건국 시기는 한민족의 본격적인 한반도 이주가 진행되었던 시기다. 보통 전란이 일어나면 이민족과 다른 나라 국민들이 주된 살육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한민족이 초한 쟁패기의 전란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한반도의 삼한 시대의 계절제와 천군 소도 등의 유습에서 보듯이, 신교의 전통과 선교의 유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앞 진나라 시대에 분서갱유 등의 사건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대단하다고 할 것이다.. 


    



- 해설 단군신화(56) "삼한시대 3( 삼국시대의 전신): 한사군 설치와 한반도 시대" 편에서 계속됩니다. -

  

작가의 이전글 해설 단군신화(5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