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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Oct 17. 2023

해설 단군신화(52)

고조선시대 말기(삼한춘추전국시대 4 ): 제자백가의 서양의 철학사상

 제자백가의 서양철학사상


 제자백가시대에 서구에서는 기원후 역사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문명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철학사상가와 철학파와 종교와 학문들이 탄생하였다. 

제자백가시대의 서양의 학문과 종교와 철학사상은 동양의 학문과 종교와 철학사상 상호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제자백가에 사양철학사상은 해당되지 않는 것이 공식적인 학설이다. 


 제자백가시대의 서양의 학문과 종교와 철학사상을 역사 순으로 정리하여 간력하게 설명하였고, 동양철학사상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은 그에 대한 동양철학사상적인 해석을 붙여보았다. 




1. 구약성서(Old Testament)


 구약성서는 기원전 1,000년경 무렵부터 9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쓰여진 우르(Ur)로부터 시작되는 히브리인들의 종교서이다. 우르는 빛이란 뜻으로,  남부 메소포다미아에 위치한 고대 바벨론의 성읍으로 아브라함의 옛 고향(창 11:28, 31)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곳(창 15:7; 느 9:7; 행 7:2)이며, 우상의 도시(달신 숭배가 성행한 곳, 수 24:2)요 바벨탑과 관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구라트가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곳이다.


 구약성서는 제 1부 율법서(Torah)와 제2부 예언서(Nebiim)와 제3부 성문서(Kethubim)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늘의 신 야훼와 인간들 사이에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이 지상에서 인간들의 사명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본래 헤브라이어로 쓰여진 24권의 책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39권으로 재편집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성서 최초의 5권의 책, 즉 모세 5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외경을 구약성서와 동등한 권위로 수용하였다. 


 (1) 제1부 율법서

유대교도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모세5서(Penta teuch)라고 부르는 제1부 율법서로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의 다섯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

 창세기는 우주의 기원, 인류와 민족의 기원, 초자연적 존재의 계보, 세상의 미래에 관한 예언 등 주로 신()의 활동상에 관해 기록해 놓은 서술이다. 창세기에는 구약성서의 창세기, 한국의 창세기 신화, 이집트 나일강 문명의 신화, 중국의 반고 신화, 그리스의 가이아, 우라노스 신화 등 각각 문명별로 독특한 고유의 창세신화가 있다. 구약의 창세기가 가장 대표적인 창세기로 인식되어 있는데, 객관성을 중시하는 철학사상적 입장에서 볼 때는 부도지의 창세기 신화에 미치지 못한다. 보통의 경우 창세기라고 할 때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이야기 한다. 


  창세기는 신의 천지창조 과정이 장엄하고 웅대한 스케일로 그려진 "빛이 생겨라!"는 말로 시작하는 창조신화다. 신은 하늘, 땅, 바다, 식물, 천체의 순으로 차례차례 창조하고, 6일째에 동물을 만들었으며, 그 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한 7일째를 안식일로 정한다. 신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고 이브를 아담의 조력자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브는 뱀에게 속아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을 배반하게 된다.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당한다. 그 다음에는 그들의 아이인 카인과 아벨, 대홍수, 바벨탑의 일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인 이삭, 손자인 요셉을 중심으로 한 족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도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한 많은 일화가 서술되어 있다. 현재까지 이런 일화들은 기독교 사상의 핵을 이루는 부분으로써 살아 숨 쉬고 있다. 


 ② 출애굽기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과정과 시나이산에서 야훼와 계약을 맺을 때 그들이 약속한 율법들을 나타내 주고 있다. 

 ③ 레위기

 여러 가지 희생제의의 율법과 규정들, 안식일 지키는 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④ 민수기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조사와 그들이 광야에서 방랑하는 이야기이며,

신명기

 모세의 유언과 개정된 율법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 제2부 예언서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서·열왕기서·예레미야 ·에스겔·이사야·소 예언서 등이 있다. 그리스어 번역인 70인 역본에서는 사무엘·열왕기를 상·하권으로, 소예언서 12편을 각기 1책씩으로 분리하여 편집하였다.      


 (3)제3부 성문서(聖文書)

 시편·욥기·잠언·전도서 ·아가·애가·다니엘·에스더·에스라-느헤미야·역대기·룻기 등의 11권의 책이 있다. 이 책들은 거의 대부분 운문(韻文)들이며, 다니엘서와 역대기 등의 일부는 역사를 서술한 서사시들이다.      


 우리 한국에서 최초의 구약성서의 번역은 1882년 존로스와 배킨타이어가 주관하여 의주청년 서상륜, 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아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펴낸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서’이다. 존로스는 누가복음을 펴내는 과정에서 신(God)에 딱 접합한 ‘하느님’이란 단어가 한국인들에게 있는 것에 놀랐다고 전해지고 있다. 

 본격적인 번역은 1900년 신약성서의 번역이 끝난 뒤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가 1907년 이후 레이놀즈(Reynolds,W.D.李訥瑞)·이승두(李承斗)·김정삼(金鼎三)을 중심으로 박차를 가하여, 1910년 번역이 완성되어 이듬해 발행되었다. 

 광복 후에 한글이 성서를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맞추어야 한다는 요청이 일어나 1952년 맞춤법을 통일한 신·구약전서가 간행되었다. 성서의 번역에 있어서 성서 원전의 내용에 충실하여 변역하느냐 아니면 한국인 중심으로 번역하느냐 하는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천주교가 한국사회의 대중 종교로 정착한지도 이미 200년이 넘었다. 성경에 대한 한국인 중심의 번역을 넘어서서 한국인 중심의 해석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2. 조로아스터(Zoroaster:B.C.628년경)


조로아스터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 개혁가로 20세 경에 종교생활을 시작해 30세 경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 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로아스터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식 표기이며, 현대식으로 표기하자면‘자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된다. 실존인물로 전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B.C.1500년 ~ 1300년 경 태어났다고 추정된다는 설도 있으며, 조로아스터의 삶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빈약한 자료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Avesta)의 ‘야스나 46의 14’에 등장한다는 그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비쉬타스바로 불리는 왕이 유력한 단서인데, 그 역시 페르시아왕조의 어느 왕인지 확실하지가 않을 정도여서 역사적으로는 단군보다도 더 불확실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기보다는, 다신교인 고대 인도의 종교와 유사하였던 기존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의 관습을 보다 체계적인 형태로 재편한 종교로 보고 있는데, 조로아스트가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아후라 마즈다’는 지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이며, 정의의 수호자이다.  마즈다는“현명한 주님”이라는 뜻으로 특히 현명함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어서, 훗날 조로아스터교는 ‘마즈다교’로도 일컬어지게 되었다. 


 조로아스트교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불을 숭배하여 우리에게는“불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뜻의 ‘배화교(拜火敎)’라는 명칭이 더욱 친숙하다. 

 조로아스터교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라고, 거짓된 종교를 버리고 진실한 종교를 택하라고, 데바를 숭배하는 과거의 신앙을 버리고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는 새로운 신앙을 택하라고 설파하고 있다. 심지어 악한 자들을 향한 성전(聖戰)까지도 주장했고, 아후라 마즈다가 모든 악을 제압하는 날이 오면 선악의 심판과 사자의 부활과 지옥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직선적 역사관은 훗날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 및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헤겔은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이 역사성을 포함하고 세계사의 시원으로서 동양과 서양의 가교를 놓았다고 평가하였다. 조로아스트교는 인류역사에서 고조선의 신교 이후 2번째로 생겨난 종교이자, 인류역사에서 3번째로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생겨난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영향을 준 종교이기도 하다. 즈로아스트교의 창조주' 주님' 현명함을 상징하는 아후라마즈다와 그를 상징하는 불은 신교를 많이 닮았고, 창조주' 주님을 상징하는 아후라마즈다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하나님과 같은 의미이다. 다만 신교의 역사관이 홍익인간 중심적인 곡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들 종교와 확연히 구분된다. 

  



3. 탈레스(Thales of Miletus, BC 624년 ~ BC 545년)


 탈레스는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 밀레토스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최초의 유물론 학파인 밀레토스학파의 창시자이자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서구 최초의 철학자였는데, 자연철학이라는 세계관을 발생시켰고, 기하학과 수학과 천문학에 정통하였음은 물론 정치 활동도 하였다. 


 탈레스는 젊었을 때 이집트에 가서 그곳의 신관(神官)들과 함께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한테서도 따로 학문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그의 사색의 깊이와 현명함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탈레스의 사색에 대한 이야기는 별을 관찰하려고 노파의 시중을 받으며 집 밖으로 나갔다가 하루는 하늘만 쳐다보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도랑에 빠져서 노파가 "탈레스여, 당신은 발아래 있는 것조차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늘에 있을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로 남아 있으며, 그의 현명함은 묘비에 새겨진 “ 비록 여기 이 무덤은 작으나 그 명성은 하늘에 닿았으니, 보라. 가장 지혜로운 자인 탈레스의 무덤을“이라는 글귀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탈레스의 현명함은 리디아와 메디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무렵 하늘에서 태양이 사라지는 놀라운 일식 현상으로 인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는데,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피라미드의 그림자 끝과 자신이 세운 막대기의 그림자 끝을 일치하도록 한 후 비례식을 만들어 계산한 피라미드의 높이 측정이었다.  그의 경제 능력에 대한 일화도 전해진다. 올리브가 풍작이 되리라는 것을 미리 예측하고는 사용하는 철이 아닐 때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를 대량으로 헐값에 빌려두었다가, 풍년이 들자 비싼 값에 재임대해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탈레스는 78세의 노쇄한 나이에 무리하게 운동 경기를 구경하다가 더위와 갈증 때문에 쇠약해서 죽었다. 


 탈레스의 가장 큰 업적은 탈레스의 정리의 발견과 한달과 1년의 설정이다. 

 텔레스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수학의 이치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탈레스 정리(定理)를 발견하고 증명했고,  고대로부터 달력에서 한 달을 30일로 정하고 일년을 365일로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여 주장한 것도 그가 맨 처음이다.

탈레스의 정리는 5가지로 " ① 원은 지름에 의해 2분 된다. ② 이등변삼각형의 밑변의 두 각은 같다. ③ 교차하는 직선의 맞꼭지각은 같다. ④ 반원에 내접하는 각은 직각이다. ⑤ 두 개의 삼각형에서 두 각과 그 사이의 변의 길이가 같으면 합동이다."의 5가지로 요약된다.   


 탈레스의 사상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서양철학의 아버지라는 명성과는 달리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단 세 마디뿐이다. 이 세 마디 중에 그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한 말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주장이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은 의미 없는 엉터리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 역사로 볼 때 이 주장은 매우 가치 있다. 철학 역사에서 최초로 던져진, 눈에 보이는 여러 사물과 변화를 넘어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답하는 본질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가 되는 만물이 나오고 다시 되돌아가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물질을 근원이자 원소라고 생각하여 아르케(arche)라고 상징하였다. 그러나 아르케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답을 내놓은 철학자는 없으며, 탈레스는 우주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한 첫 번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탈레스의 대답에서 물이 정말로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아르케)인지 아닌지는 '철학적'으로 중요하진 않다. 그의 대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우주 속의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인간의 사유에 의한 이해로 접근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전까지는 자연 현상의 원인을 신의 의지나 변덕 같은 초자연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탈레스는 신에서 벗어나 그 원인을 자연 안에서 찾으려고 했고, 여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사유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이를 철학자라고 부른다. 


 탈레스가 이집트의 신관(神官)들과 함께 했던 젊었을 때의 행적으로 보아, 신관으로부터의 배움을 통하여 학문의 바탕을 완성하여 서양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탈레스가 서양의 철학 역사에서 의미 있는 점은 오직 그가 논리를 따져 사회에 퍼져 있는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관찰 결과를 종합하여 세상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 결론 내리는‘철학적인 사고’를 했다는 사실이다. 

 철학은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인 답을 제공하는 것보다, 어떤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논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사고는 개념과 논리를 체계화시키면서 다른 학문들의 탄생을 이끌었고 인류의 보편적 지식을 확장시키면서 인간 문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 왔다. 바로 그 시작이 탈레스였으며, 그가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불린 이유인 것이다. 종교도 세상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종교는 ‘신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라고 선언하듯 주장해 버리고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권한다. 반면 철학은 주장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철학에서는 받아들일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면 어떤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논리와 합리적인 근거에 비추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이 점에서 철학은 종교와 다르다. 


 탈레스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훈계를 준다. 

 많은 현대인들은 정신적 근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끝없는 경쟁 가운데 상대를 이기려고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정작 세상의 의미는 무엇이고 진정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치열한 노력과 경쟁 끝에 돌아오는 것은 대개 공허함과 허탈감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만, 사실 현실에서 종교가 해결해주는 것은 믿음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선진국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못사는 나라들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은 정신적 근시들의 영리함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탈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답게 우리에게 충고를 건넨다. 너무 종교에만 집착하지 말고, 때로 치열한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서서 넓고 깊게 세상과 삶에 대해 통찰해 보라. 무엇이 진정한 세상의 모습인지를 고민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릴 때, 우리는 다람쥐가 쳇바퀴 위에서 경쟁하듯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탈레스는 우리에게 철학적 반성의 가치를 일깨운다. 

  다만 탈레스의 세상과 삶을 통찰하라는 훈계와 충고가 세상과 삶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은 주지만, 어떤 사실이나 사고의 근원에 대한 물음 즉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결국 신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탈레스는 젊었을 때 이집트 신관과 함께하며 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철학적 사고관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당시 이집트 신관의 신에 대한 관념이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사상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종교가 철학사상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객관성을 담보하기는 어려운데, 세계에서 신에 대한 관념이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사상적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은 이 경우 외에는 고조선의 선교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4. 피타고라스(BC 570 ~ BC 495)


 피타고라스는 보석 세공사 므네사르코스의 아들로 태어난 사모스 섬 출신의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을 '수'로 보았으며,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최초로 증명했다.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만물의 원리는 하나(monas)이다. 그리고 하나에서 한정되지 않은 둘이 생긴다. 그 둘은 마치 질료인 것으로서, 원인이 되는 하나의 바탕에 있게 된다. 그리고 하나와 한정되지 않은 둘에서 수들이 생긴다. 또 수들에서는 점들이 생긴다. 점들에서는 선들이, 선들에서는 평면들이 생긴다. 평면들에서는 입체들이 생긴다. 이것들에서는 감각이 되는 물체들이 생긴다. 그리고 감각이 되는 물체들의 원소들은 넷으로 불, 물, 흙, 공기 등이다. 이 원소들은 서로 변화해서 완전히 바뀌며, 이것들로부터 영혼이 있고 지성을 가진 구형이고 중심이 되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가 생겨나며, 지구 자체는 구형이며 두루두루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구조와 형식 혹은 수학적 관계들을 바탕으로 세계를 파악한다. 그는 수학을 통해 자연의 "빗장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수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의 하나는 직각삼각형과 관련된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a, b라 하고, 빗변의 길이를 c라 하면 a2+b2=c2이 성립한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이다. 

 사실 피타고라스 이전의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람들도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나타내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피타고라스가 수학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를 중심으로 그의 학파가 수학을 진리로 믿고 수학적 사실들을 전승해 온 공로까지 부정할 순 없다. 참고로 당시 그리스에서는 모든 수는 분수로 표현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이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 증명의 과정에서 그 이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무리수의 존재를 알려주게 된다. 이 일로 인해 학파의 사람들이 무리수를 발견한 그를 죽였다는 얘기도 있다.      


 피타고라스는 또한 철학이라는 말을 맨 처음으로 사용하고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단체이자 종교 단체 성격을 가진 철학공동체를 만들어 수학뿐만 아니라 철학, 자연과학 등을 연구했다. 결국 피타고라스에 의해 탈레스 역시 서구 최초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에게 플리우스의 참주 레온이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자, 피타고라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os; 철학자)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번번이 제자들에게 “어디에서 나는 길을 벗어났는가?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또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나는 완수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하라면서 훈계했다고 한다.      

 또한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윤회하면서 각기 다른 동물과 엮인다고 생각하여 윤회설을 주장했는데, 사람의 영혼이 동물에게도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기에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채식을 시켰다. 다만 그는 콩을 삼가라고 명했는데, 콩은 영혼의 윤회에 방해될 뿐더러 소화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는 "친구의 것은 공동의 것이고, 우정이란 동등함이다"라고 말하며, 그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의 재산들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관리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제자들은 5년간 침묵을 지키고 스승의 강의를 듣기만 할 뿐, 승인받기까지는 결코 피타고라스를 보는 일이 없었다. 


 피타고라스에 관한 일화로 그는 원래 전생에 주신(主神) 제우스와 거인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 태어난 전령의 신이자, 여행' 상업'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헤르메스가 피타고라스에게 불사를 제외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간직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그가 나중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아의 장수 중의 하나인 에우포르보스로 환생했을 때 그는 전생에 관한 기억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죽어 헤르모티모스로 태어났는데, 전생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메넬라오스가 바친 방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헤르모티모스가 죽고 다시 델로스의 어부 퓌로스가 되었고, 퓌로스가 죽자, 그는 마침내 피타고라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위엄있어 보였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으로 태양, 음악, 시, 예언, 의술, 궁술을 관장하는 신인 아폴론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또 언젠가 그의 맨몸이 일부 드러났을 때, 허벅지가 황금으로 된 것이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 그가 네소스강을 건넜을 때, 그 강이 피타고라스에게 인사했다고도 한다.      


 피타고라스가 만든 철학공동체를 피타고라스학파라고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적 구조가 모든 사물의 근본이라고 믿었고, 실재가 모든 감각적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 수학적 형식들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감각이 아니라 이성(ratio)을 통해서 실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자신들이 우주의 수수께기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합리적인 논변에서 더 나아가, 수학이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은 합리주의적 수학에 기반을 둔 종교적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논변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사물들은 사라지지만 수학적 개념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 속에서 불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 지식은 그 대상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다. 나아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수학적 정리들이 논리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나온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이중적 의미에서 합리주의자들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음악에서도 음률의 수학적 원리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높은 도와 낮은 도의 음정 비율은 1:2, 솔과 도의 비율은 2:3, 파와 도는 3:4, 미와 도는 4:5, 파와 레는 5:6 등이다. 피타고라스의 음률에서 나오는 화음은 기타에도 응용된다. 

 피타고라스의 제자 중 하나로 B.C 6세기~5세기에 활동한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생각되는 크로토네의 테아노가 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피타고라스는 테아노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최소 5명을 두었다고 한다. 자식들 또한 피타고라스 학파 학자들이 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책은 전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비밀결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타인이나 타단체에게 함부로 저작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의 저작이 피타고라스 학파 밖으로 처음 유출된 것은 필롤라오스로부터 였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학설을 세상에 내놓았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한데, 그는‘교육에 대하여. 정치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3권을 저술했다. 그 3권의 책을 플라톤이 거금을 주고 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철학사상의 영역에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만큼 영향력이 큰 경우는 더 없을 터이다. 플라톤의 철학사상이 세상과 삶과 종교에 대한 철학사상적 의문을 제기했다면, 피타고라스는 세상과 삶과 종교에 대한 의문의 답을 수를 통해 찾았다는 차이가 있다.  플라톤 사상처럼 보이던 점이 분석을 거치고 나면 실제로는 피타고라스 사상으로 드러난다. 지성에는 드러나지만 감각에 드러나지 않는, 순수하고 영원한 세계의 착상은 피타고라스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수를 통해 세상과 삶과 종교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한 것은 피타고라스가 최초는 아니다.  고조선의 선교 역시 율(양)과 려(음)과 율려(태극)으로 세상과 삶과 종교의 문제에 대한 답을 하였다. 율(양)은 ―로 1에 해당하고, 려(음)은 = 로 2에 해당하며, 율려(태극)은 0으로 줄이면 점이 되고 늘리면 구체가 되어 면에 해당한다. 



5. 아테네 민주주의(Athenian democracy)


 아테네 민주주의는 B.C. 500여년 경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인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한 아티키에서 시작된 정치 체제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적 정치로 평가되고 있다.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가져온 대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B.C. 495(?) ~ B.C. 429)는 기원전 431년,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장례식 연설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우리의 정치 체제는 이웃 나라의 관행과 전혀 다릅니다. 남의 것을 본뜬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이 우리의 체제를 본뜹니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 실로 우리는 전 헬라스(그리스)의 모범입니다.”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 체제로서 입법과 행정에 대한 결정이 유권자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참정권이 모든 주민에게 부여되지 않아서 유권자는 미성년자·여성·노예·외국인 등을 제외한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이에 따라 아테네의 주민 총 25만에서 30만 명 정도에서 3만에서 5만 명 정도 만이 투표에 참가할 수 있었으니, 결국 전체 인구의 상위 17% 정도만 참여한 기득권층의 민주주의로써 오늘 날의 민주주의와는 많이 달랐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1990년대 근대적인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고전적인 아테네의 정치제도가 새롭게 변형, 수용된 제도이다. 


(1) 부르주아와 자유민주주주의(自由民主主義)


 근대시민사회가 대두되면서 당시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대두하였던 부르주아는 그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귀족의 전제군주적인 절대체제와 맞서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게 되었다. 

 부르주아들이 내세웠던 자유민주주의는 일종의 의회주의적인 것으로, 이것은 시민적인 자유를 바탕으로 하여 정치참여의 기회를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근대시민사회에서 논의되었던 자유민주주의는 결국 시민으로서 일정한 재산을 보유한, 그러므로 정치권을 장악하여 지속적인 지배세력으로 유지될 수 있는 계급적인 성격이 전제되고 있었다. 당시의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의미에서 바로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논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 프롤레타리아와 자본민주주의(資本民主主義)


 근대시민사회는 그 후 산업화로 경제적으로 급속한 사회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결과 도시의 산업노동자의 수적인 증대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대두하였던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자본민주주의가 탄생되었다. 

 당시 자본민주주의는 가치배분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여기에서 노동자들의 욕구의 분출이 나타났고, 그것은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체제에 대한 정면공격까지 감행되었다. 즉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의 갈등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으로 바뀌어 나타나 새로운 계급투쟁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에 의한 이러한 공격은 우선 급격한 계급혁명의 형태로 분출되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공산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등장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도전은 사회구조에서 구 중산계급에 속하는 일부 인사와 극우파적인 사회세력에 의하여 노동자의 도전을 차단하려는 우파적인 파쇼체제로의 도전이었다. 

 당시 부르주아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도전에 맞서서 중우정치적인 성격의 대중민주주의를 다원적 엘리트 민주주의로 변형시키면서 사회복지정책 등을 통하여 노동자의 생활을 향상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도전을 극복하려 하였고, 극우파쇼적인 도전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인종주의적인 편견의 공박과 전체주의의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한 국제적인 연대에 의한 전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완벽한 정치체제도 아니고 불변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사실은 각각의 사회에 그것이 어느 정도로 적실성을 가지는가의 문제이다.      


(3) 국민주권과 대의 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


 대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대의 민주정치라고도 한다. 일당 독재정치의 반대 개념으로,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 형태이다. 

 

 대의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대정치가 페리클레스의 "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라는 정신을 그대로 살린 민주주주의이다. 

 아테네 민주정치에서 민주정치의 이상은 시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직접민주주의(直接民主主義)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공공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든 시민이 한곳에 모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채택한 것이 간접민주정치(直接民主政治)로, 간접민주정치는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 등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대신 공공의사를 결정하게 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사상 또는 정치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대의민주주의 제도하에서는 사실상 주권이 온연히 국민에게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비록 제도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의 변용을 보여주고 있다 해도, 사상체계만은 어느 경우에나 이념적인 동질성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것은 첫째가 경제적 자유의 실현이며, 둘째가 생존적 평등의 보장, 그리고 셋째가 인도적 박애 가치의 추구이다. 

 자유·평등·박애의 세 가지 가치체계는 인간의 개인적인 존엄성 즉 참나의 실현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발전을 동시적으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된다.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인  이념의 동질성 추구를 위하여 필요한 3가지 가치체계와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개인의 참나와 공동체의  발전 추구는 결국 홍익인간심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종교적 체제로 구현한 것이 고조선의 선교이다. 


    

 6. 소크라테스(B.C.470년)


 소크라테스(Socrates)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토론을 통하여 남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소크라테스의 처 크산티페를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이 갖는 의미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철학사에서 남다르지만, 그의 고유한 사상은 직접 남긴 저작이 없기 때문에 제자들이 남긴 기록과 그 안에 담긴 언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되고 있을 뿐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소크라테스의 학설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지(實踐知)를 중시하여 참된 지(知)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귀납법에서 찾았고, 사람들과의 대화에 의한 문답법에서 잘못된 지식을 비판하고 제거하면서 윤리적인 진리를 찾았다. 이처럼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을 통하여 무지를 깨닫게 해서 해답을 찾아나가는 대화법을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고 부르는데, 그는 이것을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산파술(産婆術, maieutikē)이라 칭하였다.‘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격언은 스스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로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하였던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주장과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과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권유, 덕과 앎의 일치 주장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려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제자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7. 레우키포스(B.C. 5세기 경)


 레우키포스(Leukippos)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원자론의 창시자이며,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와 함께 고대 원자론의 창시자로 불린다. 제자 데모크리토스의 명성을 통해 전해오는 철학 사상 이외에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다.      


 레우키포스는 세상을 비어있는 공간(케논, Kenon)과 이를 채울 충만한 원자(아톰, Atom)로 나눴고, 케논과 원자를 우주를 이루는 두 개의 구성요소라고 확신했다. 

 원자(아톰, Atom)는 비어있는 공간 케논(Kenon)을 움직이고 있으며, 무수히 많으며, 아주 작아 분할할 수 없고, 단단하다. 즉 허공 안에서 일어나는 원자의 재배열로 세상이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원자론에 기반 한 레우키포스 우주론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형태의 원자들이 무한으로부터 분리되어 빈 공간으로 이동하고 떨어져 나온 원자들은 다시 한 곳에 모여 소용돌이를 만든다. 그 회전 속에서 원자들의 충돌과 뒤섞임이 일어나고 비슷한 것들은 모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다시 허공으로 빠져나간다. 

 모여 있는 원자 집적물들은 결국 태양, 달, 지구와 같은 별의 성질을 갖게 되고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며 비어있는 공간인 하늘에 떠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 가까이에서 돌고 있다면 태양은 그 둘레를 가장 큰 궤도로 돌고 있고 달은 작은 원을 그리며 돈다. 태양과 달 사이에는 다른 별들이 중간 궤도로 돌고 있다. 또한 집적물들은 처음에는 습한 것이었으나 지속적인 회전으로 불이 붙고 빛을 갖게 된다. 별들의 빛은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더 밝은데 달은 불이 적고 빛도 적다. 


 끝으로 그는 구체화하지는 않았지만 우주의 생성, 발전, 소멸이 필연적인 힘의 작용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하나 혹은 몇 가지 근원 물질들이 변화하여 나머지 다양한 사물들을 만들어 내고 소멸과 생성을 반복한다고 생각한 밀레토스학파와 불변하는 하나의 실재를 주장하였던 엘레아 학파가 있었는데, 레우키포스의 철학사상은 엘레아 학파의 견해와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레우키포스는 엘레아 학파로부터 불변하는 원자에 대한 영감을 얻기는 했으나 원자의 운동과 다원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엘레아 학파는 하나의 절대적인 실존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운동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레우키포스는 빈 공간에서 일어나는 원자의 움직임과 집산을 만물의 근원으로 파악했다. 한편, 데모크리토스와 레우키포스는 전자가 후자의 사상 상당 부분을 흡수하였기 때문에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기란 어렵다.     



8. 데모크리토스(BC 460년 ~ BC 380년)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그리스의 고대 철학과 근동의 사상이 모여들었던 그리스 북동부 트라케 연안의 압데라(Abdera)에서 태어났으며, 원자론을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나중에 레우키포스의 제자가 되었다.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하였던 원자론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우주 전체의 근원은 원자와 허공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관습적으로 믿어지는 것들이다. 세계는 무수하며 생성하고 소멸한다. 어떤 것도 있지 않은 것에서 생성되지 않으며 있지 않은 것으로 소멸하지 않는다. 

 또한 원자들은 크기와 수에 있어서 무수하고 우주 전체 속에서 회오리치며 이동하고 그렇게 해서 혼합물들인 불, 물, 공기, 흙을 낳는다. 이것들도 어떤 원자들로 이루어진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원자들은 단단한 성질이 있어 영향받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 태양과 달은 그런 미세하고 둥근 입방체들로 합성된 것이고 영혼도 비슷한 방식으로 혼합된 것이다. 영혼은 지성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상들이 우리 눈에 떨어지는 데 따른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정원에 일부를 떼어 내 쪽방 하나를 만들고 거기서 사색과 집필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철학뿐 아니라 문학, 천문학, 수학, 물리학, 의학, 농학, 지리학, 사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에 박학자라 불렸지만 명성을 하찮게 생각해서 남에게 알려지는 데 열을 내지 않았다.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 가서 그가 한 말이 유명하다. "나는 아테네로 왔으며,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최고목적이 쾌활함에 있다고 생각하여 별명이 웃음의 철학자로 불렸으며, 모든 일에서의 온건함과 문화적 고양을 통해 그것이 잘 성취될 수 있다고 믿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여행에 모두 쏟아부었다. 그는 기하학을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 가서 사제들을 만났고, 페르시아로 가서 칼다이오스들을 만났으며 홍해에도 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인도에서 나체 현자들과 교류했으며 에티오피아에도 갔었다고 말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쾌활함'은 이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여행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너무 가난해져서 형제인 다마소스에게 생계를 지원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미래의 일을 예언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자신의 책 ‘대우주 체계’를 사람들에게 낭독해주고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된다.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으며, 심지어 생전에 청동상까지 세워졌다. 백세 넘게 장수하다가 죽을 때는 국가에서 장례를 치러줬다.      


 데모크리토스는 중세시대에 이르러 무신론자나 사탄과 비슷하게 취급되어서 그에 대한 언급이 거의 금기시되었다. 때문인지 그가 저술했다는 책들은 현재 거의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남긴 “나는 우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의 왕국을 갖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원인설명을 찾아내길 원한다. 사람은 작은 우주와 같다. 세계는 무대, 삶은 한편의 연극, 그대는 와서, 보고, 떠나네, 광기 없이는 그 어떤 누구도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없다.” 등의 어록에서 그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9. 히포크라테스(BC 460년 ~ BC 380년)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고대 그리스 시기 활동했던 의사로서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적 신비주의의 일환으로 다루어졌던 의술을 학문적 개념으로 분리하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서양에서 의학의 아버지(Father of Medicine)로 불리고 있다. 

 그는 초승달 구적법을 증명한 수학자 히포크라테스와는 동명이인이었다. 따라서 출신지를 붙여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코스의 히포크라테스'로, 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로 구분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조상이라는 야사도 있다. 그 또한 고대 그리스의 의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자 의술의 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야사가 퍼진 듯 한데, 동 시기의 사람이었던 플라톤도 그런 언급을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간략하게 정리한 그의 삶은 이와 같다.      

 히포크라테스는 코스 섬에서 태어나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을 여행하여 학식을 쌓았다. 이후 그는 코스 섬에 돌아와 학교를 세워 제자들에게 그의 의학을 가르쳤으며 의학서를 남겼다. 그의 의학서는 이후 <히포크라테스 문헌>으로 엮여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히포크라테스 문헌은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저작들이 집성되어 후대에 히포크라테스가 쓰여진 것으로 널리 알려진 고문서들을 이른다. 그 중 어느 것이 히포크라테스가 직접 쓴 것인가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히포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한 모종의 학문적 공동체에 의해 향유된 것은 분명하다. 


 히포크라테스 문헌의 여러 저작은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데, 바로 '의학을 학문의 영역으로서 연구하였다'는 점이다. 히포크라테스 문헌에는 "의학은 과학이다"라는 일관된 사고방식이 드러나 있다. 각 문헌에는 질병의 본성과 원인에 대해, 인체와 우주에 관해, 나아가 처방과 치료의 원리에 관하여 나름의 관점, 즉 어떤 자연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들이 질병에 관해 사색하였던 사상가나 철학자였든 아니면 당시에 환자들을 치료했던 내과의사였든, 이들은 모두 자연철학과 치료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히포크라테는 기본적으로 환자가 가진 고유의 치유력을 통한 치료를 중시했다. 그리고 악령이 들어 병이 드는 것이란 사고에서 벗어나 환경과 병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져 환자에 대한 임상 관찰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당시의 의술은 전반적으로 매우 미성숙한 것으로, 인체의 4가지 체액의 밸런스가 무너져 병이 발생한다는 체액론을 중심으로 환자를 치료하였고, 히포크라테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피를 뽑아내 치료한다는 방혈 개념을 의술에 도입한 것이 히포크라테스였다. 열이 높은 환자에게 이뇨제와 하제를 투입하여 "불순물"을 제거한 후에도 차도가 없으면 피를 뽑았다. 히포크라테스는 방혈에 크게 의존하진 않았으나 후대로 가면서 이에 대한 믿음이 너무 확고해졌고,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혈은 주요한 치료법이 되어 남용되었다. 물론 이것 모두 미신에 가까웠으며 병에 걸린 사람에게 이뇨제와 하제를 투입해 탈진하게 한 뒤 대량으로 방혈하게 만드는 것은 치료는커녕 죽음으로 끌고 가기 쉬웠다. 

 히포크라테스는 감정이 뇌에 기반한다는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감정이나 생각이 심장에서 생겨난다고 믿었는데, 머리를 다친 환자를 많이 봐왔던 히포크라테스는 감정, 생각, 기쁨, 고통이 전부 뇌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저서 잠언집(Aphorisms)에 “인생은 짧고, 의술(의 길)은 멀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불완전하고, 판단은 어렵다. 따라서 의사는 스스로 옳은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환자와 수행원, 외부인 모두가 협조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모든 과도한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다. 질병을 대할 때는 두 가지를 명심하라. 처치를 하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는 말라. 수면과 각성은 모두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질병을 일으킨다. 때로는 아무 처치도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처치이다.”는 어록이 있다. 

 잠언집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생긴 오역 때문에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며“의 의술이 예술로 바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으로 잘못 받아들어져 마치 히포크라테스가 인생을 불사른 예술가였던 것처럼 오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잠언록의 내용은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을 따 오늘날에도 전 세계 의과대학의 졸업식에서 시행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되었다. 잠언록이 어느 시기에 선서로 쓰여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 여러 주장이 나왔으나, 대개 기원전 5세기나 4세기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밖에도 현재 전해져 오는 것이 과연 원본인가 하는 점이나 훼손이나 가필되었을 가능성, 또 그것이 의무 이상의 구속력을 가졌는지, 누구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 누가 선서를 하였는지, 또 선서를 한 이가 모두 의사였는가 하는 여러 의문들이 남아 있다. 


 현재 낭송되고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문은 히포크라테스가 선서한 원문이 아니라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2차 세계의사협회 개정 선언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기존의 선서 내용이 고대 그리스 시대의 관점에서 작성한 글이다 보니 현대의 도덕 윤리나 사회 요소와는 어긋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료직에 입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 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나는 마땅히 나의 스승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나는 양심과 위엄을 가지고 의료직을 수행한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하여 고려할 것이다. 나는 알게 된 환자의 비밀을 환자가 사망한 이후에라도 누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능력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의료직의 명예와 위엄 있는 전통을 지킨다. 동료는 나의 형제며, 자매다. 나는 환자를 위해 내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나이, 질병, 장애, 교리, 인종, 성별, 국적, 정당, 종족, 성적 지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 나는 위협을 받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그 시작에서부터 최대한 존중하며, 인류를 위한 법칙에 반하여 나의 의학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약속을 나의 명예를 걸고 자유의지로서 엄숙히 서약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비슷한 것으로 한의사들의 허준 선서와 약제사들의 디오스코리데스 선서 및 간호사들의 나이팅게일 선서, 그리고 수의사들의 선서인 수의사의 신조가 있다.   


  

10. 플라톤(BC 427년 ~ BC 347년)


 플라톤(Plato, Platon)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30여 편에 달하는 대화록을 남겼는데 그 안에 담긴 이데아론(형이상학), 국가론 등은 고대 서양철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플라톤은 스무 살 무렵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제자가 되었으며, 소크라테스 처형으로 큰 상실감을 겪고 다른 제자들처럼 아테네를 떠났다. 

 그는 마흔 살이 지나 고향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메이아(Acadēmeia)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80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는데 보냈다. 그의 사후 플라톤 아카데미라고 불린 이 학교는 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총 30여 편이 넘는 플라톤의 저작과 사상의 대부분은 대화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의 주요 저작들은 연대와 사상적 흐름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초창기 대화록인 변론(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e)˙크리톤(Kriton)˙프로타고라스(Protag

oras)˙고르기아스(Gorgias) 등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립하는 면이 강하며 윤리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② 여행 이후 플라톤이 독자적인 사상을 완성해 나가던 시기에 작성된 문서들인 메논(Menon)˙파이돈(Paidon)˙파이드로스(Phaidros)˙국가 등에서는 이데아론과 국가론이 전개 된다. 

  ③ 심오해진 노년기의 철학을 보여주는 티마이오스(Timaios)˙폴리티코스(Politikos)˙법률 등은 이데아와 그 반영이라는 입장에서 우주와 땅 위의 생명에 관한 자연철학적 논의가 전개되며, 다양한 정치형태와 통치자들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교육, 기관, 국방, 국가윤리 등이 제시된다.      

 플라톤의 저작과 사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대 서양철학의 정점이라 평가받는다. 

 ① 플라톤 사상에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뿐 아니라 고대 자연철학˙엘레아학파˙피타고라스학파˙소피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고정된 존재˙생성과 다원성˙윤회와 정화˙구원˙영원성˙영혼 등 모든 것들이 플라톤을 통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② 플라톤 사상은 기존 그리스 전통을 뛰어 넘는 면모를 보인다. 그는 아테네 정치이론에 회의를 품었으며, 그리스 예술과 문학적 전통의 가치에 한계선을 그었고, 인간을 탐구하는데 있어 고대 인도철학과 유사한 요소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③ 이데아론을 비롯한 플라톤의 철학은 중세 기독교 철학 및 근현대 사상체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중세시대 지배 논리인 세 위계 이론(성직자, 귀족, 제3신분)을 바탕으로 세계를 신의 나라(이데아)와 인간의 세상(그림자)으로 나누는 아우구스티누스(Aurélius Augustīnus, 354~430)의 신국론(神國論)과 3~6세기에 로마제국에서 성행했던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11. 아리스토텔레스(BC 384년 ~ BC 322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의 그리스 철학자로서 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2천여 년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위인이다. 그는 형이상학˙논리학˙정치철학˙윤리학˙자연철학˙과학˙생물학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통달하고 그것들의 기초를 마련한 철학사의 거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 때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이아'에 들어가기 위해 아테네로 유학을 갔고,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여년간을 그의 제자로서 수학했으며,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카데미의 정신이라 부르며 칭찬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은 소중한 벗이다. 하지만 진리는 더 소중한 벗이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스승과 학문적으로 결별했으며 누차에 걸쳐 스승의 이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플라톤이 죽은 후 한 때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필리포스 2세의 궁전에 머물면서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제자로 가르쳤으며, 50살의 나이에 아테네로 돌아와서 아폴론 신전 경내의 공공운동장이던 리케이온에 자신의 학원을 차리고 1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원 초기에 그는 리케이온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오가면서 학생들과 함께 철학을 논하곤 했는데, 이것으로 해서 '소요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기 제자들의 강의 노트이다. 그는 물리학, 형이상학, 시학,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저술하였지만, 현재는 다 소실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63세가 되었을 때 이전에 지었던 헤르미아스의 죽음을 기렸던 찬가가 아폴론 신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양식의 찬가라는 이유로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당했다. 이 때 은퇴를 결심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원 리케이온을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물려준 뒤,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라는 작은 섬나라로 도망가서 그해 질병을 얻고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스승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이데아론에 반기를 들어 형이하학적인 자연탐구를 중시하는 현실적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물리학, 생물학, 철학, 윤리학, 미학, 정치학 등 문과와 이과 가리지 않고 전 방위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서양 학문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 어느 학문의 개론서를 봐도, 학문의 역사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먼저 나오지 않는 학문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적 증거를 쌓아가면서 연역적으로 정의하기보다 목적론적 세계관에 따라 결론을 정해놓고 추론했기 때문에 과학자가 아니라고 격하하는 견해도 있지만, 과학에 대한 학문적 분류가 미미했던 당시 상황에서 귀납논증을 창시하여 학문적 토대를 마련해냈다는 의미에서 과학발전에 공헌한 위대한 학자로써 존중을 해야 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사가 슈퇴리히에 따르면 거대한 사설 도서관을 세워 세계 각처의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과학적 자료를 수집했다고 했으며, 그의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각지의 동식물 표본들을 모아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명한 삼단논법의 창시자이다. 삼단논법은 귀납적 관찰로부터 자연에 대한 공리를 얻고 그 공리로부터 사실을 연역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a=b이고 b=c임에 따라서 a=c 라는 수식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예시를 들어 풀어 보자면 “인간은 포유류이다. 포유류는 동물이다. 고로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수식으로 치환하여 설명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를 닦아놓은 삼단논법의 논리학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형식논리학'의 틀을 이루게 되며, 수사학에서 문장을 서론-진술부-논증부-결론의 4문단으로 논술문을 구성한 방법인 4배열법은 삼단논법과 함께 오늘날의 서론-본론-결론으로 구성하는 논술문의 시원이 되고 있다.  


    

12. 에피쿠로스(BC 341년경 ~ BC 270년경)


 에피쿠로스(Epikouros)는 아테네의 식민지였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고대 그리스시대 쾌락주의 철학을 펼쳤던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이다.      


 에피쿠로스는 18세에 아테네로 넘어가 2년간 군복무를 했고, 학교 교사로 잠시 활동하다가 데모크리토스의 책을 만나고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했다. 

32세에는 레스보스 섬의 뮈틸레네와 람사코스에서 학파를 세우고 5년을 지냈고, 그 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서 철학공동체인 '정원'을 세우고 35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원'의 구성원에는 여자와 노예는 물론 심지어 창녀도 속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에피쿠로스를 비웃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를 비웃던 사람들도 에피쿠로스와 제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제자와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72세까지 살다가 요로결석과 이질로 14일간 앓다가 죽었다. 그때 그는 따뜻한 물로 데워진 청동 욕조에 들어가 물을 섞지 않은 포도주를 가져오게 해 한 번에 들이켰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기억하라고 지시하고서 숨을 거두었다. 

 에피쿠로스 사후 아테네 사람들은 동상을 세워 그의 명예를 기렸다. 그의 친구들은 하나의 도시국가를 넘어설 정도로 그 수가 많았으며, 그의 모든 제자들은 그의 학문적인 매력에 단단히 붙들렸다. 평소에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가 있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친구들이 도처에서 그에게로 와서 그의 정원에서 그와 함께 살았던 덕분인지, 다른 학파들은 계보가 거의 끊어졌지만 그의 학파는 계보가 언제나 계속 이어지면서 무수히 많은 제자들을 차례로 배출하였다. 

 당대에 에피쿠로스가 남긴 저서는 300편이 넘었으나,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지은‘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나오는 핵심 교설과 3편의 편지뿐이다.      


(1)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사상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사상에서 쾌락의 의미는 술을 먹거나 성관계를 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 등에 있지 않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단지 몸과 영혼에 있어서 '고통의 부재'를 의미할 뿐이다. 몸에 대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욕망을 충족하여 '몸에 괴로움이 없는 상태'(ἀπονία)가 될 것을 추구했었고, 영혼에 대해서는 망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인간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기 때문에 우주와 죽음, 욕망 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영혼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ἀταραξία)가 될 것을 추구했었다. 이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한다. 즉 에피쿠로스는 육신의 쾌락보다 사유의 쾌락을 더 높게 평가였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데모크리토스를 계승하여 이를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에서의 감각과 자연학에서의 원자론적 관점이 유사하며, 윤리학적 면에 있어서도 데모크리토스의 '쾌활함'과 에피쿠로스의 '쾌락'이 정적으로 절제된 쾌락(쾌활함)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복된 삶의 목적은 몸의 건강과 영혼의 평정에 있다. 따라서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할 때, 방탕한 자의 쾌락을 말한다거나 관능적 향락에서 주어지는 쾌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괴로움이 없고 영혼에 동요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고통이 제거될 만큼의, 몸과 영혼에 꼭 필요한 쾌락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단, 지속적으로 최소한의 필요한 쾌락이 충족되고 그 삶에 익숙해져서 그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간혹 찾아오는 '사치스런 쾌락'을 즐기는 것을 에피쿠로스는 막지 않는다. 따라서 쾌락에 절제를 요구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서 쾌락을 선택하는 개인의 사유가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사유를 통해 육신의 목적과 한계를 깊이 헤아려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단계로 까지 발전한다. 육신의 쾌락은 사유를 통하여 선택할 수 있고, 사유의 쾌락은 죽음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를 통해 육신의 목적과 한계를 깊이 헤아려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에피쿠로스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죽음을 미리 예상함으로써 괴로워하는 것은 아무 근거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올바른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죽게 되어 있는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삶에 무한한 시간을 부여함으로써가 아니라, 불사에 대한 동경을 제거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즐기더라도 결국 끝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이처럼 죽음으로 감각을 상실하게 되지만 우리의 사유에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우정이 있다면, 우정의 힘으로 불안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모든 이웃들이 서로 가장 즐거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사유는 영원할 수 있다.      


 

(2) 에피쿠로스의 역설


에피쿠로스는 유명한 에피쿠로스의 역설로 인하여 고대 서양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다. 신(神)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신성(神性)이 선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악의 문제 중 대표적인 예로 항상 언급되는“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는데 능력이 없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다면, 신은 악한 것이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과연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하는 역설을 통하여 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에피쿠로스가 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은 불멸하며 살아 있는 지복의 존재이기에 행복하기 위해서 믿어야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듯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고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그런 신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우주의 운행에 관여하지 않으며, 영혼 또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어 죽은 이후에 단지 흩어질 뿐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신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세상을 주무르는 초월적인 인격신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에피쿠로스를 '유신론자를 가장한 무신론자'라고 보았고, 그 때문에 중세에 이르러선 그의 책들은 대부분 다 불에 태워졌다.     



 13. 스토아학파(BC 334~262년)


 스토아학파(Stoicism)는 헬레니즘 시대에 발생하여 전기 로마 시대까지 성행한 철학의 한 유파이며, 로고스(logos)로 대표되는 보편적인 이성을 중시하여 후에 스피노자를 비롯한 합리주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로는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키티온의 제논,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로마의 오현제 중에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있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경에 페니키아 출신의 제논에 의해 시작되었다. 

 스토아학파는 윤리학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유기적 유물론 또는 범신론의 입장에서 금욕주의와 극기주의를 통하여 자연에 순종하는 현인(賢人)의 생활을 이상으로 내세웠다. 스토아라는 말은 폴리그노트라는 벽화로 장식된 아덴의 채색 강당(스토아 포이킬레)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강당에서는 스토아 학자들이 강의했다. 

 스토아학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학파와 스토아학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일반적으로 스토아학파는 자연관에 있어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변화에 관한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윤리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퀴닉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사도 바울의 전도 행적을 다룬 신약 성전의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를 할 때 에피쿠로스학파의 일원과 스토아학파의 일원이 바울과 함께 논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스토아 학파의 핵심 사상은 '불행은 결코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없다'이고, 스토아 철학은 불행을 이기는 철학이다.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 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이성만이 영원한 우주 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 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전 세계가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자연세계에 관한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낙관주의적이며, 형이상학의 내용은 유신론과 유물론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듯한 사상들이 교묘히 결합된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한 우주의 참모습은 자연의 이법(理法)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잘 조화되어 변화하는 코스모스로 파악하였다. 우주는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시간 속에서 발생했고,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끝없는 세계이다. 자연 속의 사물들은 공기, 물, 흙, 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요소는 불이다. 불은 물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생동하는 신적 원리, 즉 로고스(logos)로서 세계의 모든 존재 속에 스며 있는 세계영혼이다. 자체로 완전하고 영원하며 질서정연한 물질적인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이성은 곧 신이라고도 불리운다. 프네우마, 예견, 운명도 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스토아철학은 신 즉 자연이라는 범신론적인 주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스토아 사상의 신은 최고선이며 인격을 갖추고 인간에게 복과 징벌을 내린다. 그러나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유신론의 대표적인 유일신론에서 말하는 신은 창조주로서 세계 바깥에 자유롭게 존재하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세계를 만들어 내었지만, 범신론에서는 신이 세계 바깥에 초월해 있지 않고 세계 곳곳에 스며들어 내재해 있다. 그리고 창조주로서의 신이라는 개념도 부정한다. 우주를 창조했다는 말은 소위 신의 무한성을 훼손시킨다. 무한한 속성을 지닌 신이 자신 밖에 따로 세계를 만들었다면 창조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의 세계는 신 이상의 것이 된다. 이는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넘어선 세계를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불가능하며, 더구나 무한한 신에 유한한 세계를 더한다는 것은 신의 무한성 개념과 모순되기 때문에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은 신의 무한성을 모독한 결과를 자초한다. 그리하여 범신론은 유일신론과 달리 신은 생성 변화해 가는 자연 과정의 필연적인 실체로서 우주만물에 내재한다고 이해한다. 


 스토아 철학의 인간관과 윤리관은 이와 함께 이성주의와 금욕주의로 대표된다. 즉, 스토아철학자들은 이성의 법칙에 의해 운행하는 자연에 대한 사고와 다르게 인간과 삶에 대하여는 비관주의적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은 신적 이성이 지배하는 자연 속에서 이성을 공유하고 있는 점에서 신의 일부인 소우주이다. 소우주에 해당하는 인간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성법칙에 따라야만 인간의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에 부합된다. 따라서 이성적 영혼 즉 덕이 인간을 지배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하다. 즉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덕을 목표로 삼을 때 행복은 달성된다. 

 이러한 이성에 투철하고자 하는 철학은 헬레니즘이란 무대배경을 통하여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성적인 자연세계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성법칙에 따라 질서롭게 조화를 이루는 결정론적인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세계는 전쟁과 패배,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되는 무질서의 세계로써 일상적인 행복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세속적인 성공과 행복의 성취는 우리의 능력 밖에 머문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행복은 능력의 발휘보다는 인간의 욕구를 억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혼돈의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이성에 따라 통찰하고 운명을 감수하며, 의지의 힘으로 현실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다. 삶의 목적은 오로지 이성의 의한 냉담한 부동심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는 육체적인 욕구, 충동, 정서로부터 해방된 자유이며 인간 영혼의 덕인 것이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개체적 인격이 지니는 긍지에 넘치는 확고부동한 존엄성과 절대적인 윤리적 의무 이행을 역설함과 아울러 엄격한 금욕주의적 윤리를 예찬하였다. 

 스토아철학 초기의 비관적이고 숙명론적인 성격은 그리스로마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에 대한 엄격한 의무감, 동포애, 윤리적인 사명감을 대변하게 된다. 당시에 거리의 평범한 그리스인들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거의 알지 못 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는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토론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대중 철학"이 되었으며, 대중들에게 죽음˙고난˙재산˙가난˙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력 그리고 노예 제도를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를 말해줬다.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스토아학파는 불운에 맞서는 심리적 요새를 제공했던 것이다.     



 14. 유클리드(B.C.330년 경)


 유클리드(Euclid,에우클레이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인 동시에 그리스기하학 즉 유클리드기하학의 대성자이다. 그의 저서 기하학원론은 기하학에 있어서의 경전적 지위(經典的地位)를 확보함으로써 유클리드라 하면 기하학과 동의어로 통용되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유클리드의 생애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초청에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온 학자가 아닌가 상상되고 있다. 

 유클리드는 광학, 음악, 천문학 등에 관한 10가지 정도의 책을 썼는데, 그중 5가지는 아랍어로 번역된 것이 남아 있다. 그는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거의 모든 수학의 지식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그것을 한 이론 체계로 조직하여 저술한 전13권으로 된 대 저작 원론(Elements, 그리스어로는 Stoikeia)으로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원론을 교과서로 하여 유클리드로부터 기하학을 배울 때, 그 엄밀함에 지쳐서, “좀 더 쉬운 방법은 없겠는가?”라고 유클리드에게 물었더니 “기하학에 왕도는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원론의 대체적인 내용은, 제1권은 평면직선도형의 성질을 다루었는데, 삼각형에서 시작하여 면적론,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그 역의 증명으로 끝나고, 제2권은 2차적인 작도문제, 제3권은 원, 제4권은 정다각형의 작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5권은 비례론(실수론), 제6권은 그 응용인 닮은꼴의 이론, 제7-9권은 정수론, 제10권은 특수한 무리수, 제11-13권까지는 입체기하학인데, 제13권에 정다면체가 다섯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작도로써 자세히 논하고 있다.      

 유클리드는 원론에서 선구자들이 발견한 중요한 기하학적 사실을 체계적인 형식으로 기록하였는데, 기하학의 논리전개에 필요한 증명 없이 사용하는 다섯 개의 공준(公準)과 크기의 문제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다섯 개의 공리(公理)에 기초를 두고, 도형의 일반적인 성질을 하나하나 정리(定理)로서 증명하여 나가고 있다. 공준은 기하학적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공리는 일반적 명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원론에 나와 있는 평면기하학의 공준과 공리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섯 개의 공리(axiom)는 “➀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은 서로 같다. ➁ 같은 것들에 같은 것을 더하면 그 합은 서로 같다. ➂ 같은 것들에서 같은 것을 빼면 그 차는 서로 같다. ➃ 서로 포개어지는 것들은 서로 같다. ➄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이다.

 다섯 개의 공준(postulate)은 “➀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점은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 ➁ 직선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➂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임의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➃ 모든 직각은 같다. ➄ 한 평면 위의 한 직선이 그 평면 위의 두 직선과 만날 때 동측 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은 끝쪽에서 만난다.”이다. 

 공준이란 말은 뒤에 공리로 바뀌었으며, 공준 ➄를 특히 평행선공리라 부르게 되었다. 

 유클리드의 원론 또는 그와 비슷한 내용은 2천 년 이상이나 대학 또는 중등학교에서 기하학뿐 아니라 엄밀한 사고법을 가르치는 데 쓰여 왔지만, 결국 2차 대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원론 대신 새 수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15. 아르키메데스(BC 287~212)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다. 그는 기하학에도 능통하였고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하여 기하학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기하학의 원리를 응용한 훌륭한 기술자였고 수학을 실생활에 응용하여 그리스 수학을 한 단계 더 성장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아르키메데스는 젊은 시절부터 절묘한 기술력의 발명품을 선보였으며, 이집트에 유학해 있던 중에 나선의 원리를 응용해 나선식 펌프를 발명했고,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수학자 코논에게 기하학을 배우고 시라쿠사로 돌아와 수학자로서 많은 책을 저술했다. 

 원의 지름과 원주의 길이를 직접 비교하는 방법이 아닌 수학적인 증명으로 원주율의 근사치를 최초로 계산하였으며 그가 발견한 구분구적법은 적분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에는 0이 없었고 당연히 해석학은 개념조차 전혀 잡혀 있지 않았는데도 구분구적법과 무한소 개념을 깨우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수많은 일화로 인하여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지렛대 원리 일화: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로 2세에게 말했다고 전해지는“나에게 긴 지렛대와 지렛목만 주면 지구라도 들어 올려 보이겠다.”고 말한 지레(지렛대)의 원리이다. 지레(lever)의 원리에 의하면 힘점과 받침점 작용점이 있으면 '(받침점과 작용점의 거리) : (받침점과 힘점의 거리)'의 비만큼 적은 힘으로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지만, 반대로 힘점은 작용점에 비해 그만큼 더 먼 거리를 움직여야만 한다. 

 유레카 일화: 순금 왕관의 진위를 밝혀낸 일명 유레카 일화이다. 유레카(eureka) 일화는“어느 날 히에로 2세가 순금으로 왕관을 만들었는데, 장인이 정직하게 순금으로만 만든 것인지 의심을 품은 왕은 아르키메데스를 불러 순금관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게 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목욕탕에 들어간 그는 물속에 몸을 넣자 넘쳐흐르는 물을 보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옷도 입지 않은 채‘에우레카! 에우레카!’를 외치며 뛰쳐나갔고, 왕관과 똑같은 무게의 금 견본을 준비해 각각을 물에 담가서 넘쳐흐르는 물의 양을 비교했다. 실험 결과 왕관을 넣었을 때 더 많은 양의 물이 넘쳐흘렀고, 이 사실로 왕관이 금보다 비중이 낮은, 다시 말해 순금이 아니라 다른 재료가 섞여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공금을 횡령한 장인을 잡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③ 아르키메데스 원리 일화:  “유체 안에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잠겨있는 물체가 받는 부력은, 그 물체가 밀어낸 부피만큼의 유체의 무게와 동일한 크기로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한 일화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Archimedes' principle)에 대한 일화는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2)에서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의 편을 든 탓에 로마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에게 의뢰하여 갖가지 신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렛대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투석기와 기중기, 그리고 잘 갈아 만든 청동 거울들로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로마군의 배를 불태우고 투석기로는 거대한 돌을 마구 날려댔으며 기중기로 로마군의 배를 멀리 던져버리는 가공할 만한 무기들이었다고 전한다. 사실 이 거울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TED에서는 이것보다는 범선을 띄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다가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알아낸 것에 가깝다고 한다.”는 부력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 이다. 일설에서는 히에로 2세가 병사들을 가득 실은 해변 모래톱의 군함을 물에 띄워보라 명하자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군함을 바다에 쉽게 띄웠다는 이야기도 전하면서 지렛대의 원리와 부력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로 설명하기도 한다. 

 ④ 아르키메데스의 묘비 일화: 아르키메데스의 묘비(Archimedes' headstone)에 관한 일화는 “로마의 장군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고, 병사들에게 그를 살려서 데려오라 명했다. 한편 아르키메데스는 그 와중에도 모래판에 원을 그려놓고 연구에 몰두 중이었는데, 마르켈루스의 명령을 전달받은 한 로마 병사가 잠입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가 그 병사에게‘그 원을 밟지 말라!’고 소리치자. 그가 아르키메데스라는 사실을 몰랐던 병사는 격분해 그를 죽이고 말았다.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예의를 갖추어 그를 안장하고 아르키메데스를 기려 "원기둥에 구가 내접한" 모양의 묘비를 세워주었다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동양의 제자백가시대에 서양에서도 수많은 철학사상이 생겨나서 오늘날의 문명문화와 종교사상의 바탕이 된 역사적 현상에 대하여 그 이유가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시원철학사상인 천도사상(天道思想)과 동서 문화교류의 두 가지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만약 제자백가의 탄생이유가 천도사상에 있다면, 고조선시대의 선교사상과 구약성서를 답으로 찾을 수 있다. 세게역사에서 제자백가 시대 이전에 있었던 천도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던 철학사상에는 선교의 홍익인간사상과 구약성서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중에서 답을 찾는다면 종교의 영역에 머문 구약성서 보다는 종교를 인간중심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홍익인간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제자백가로 부터 그 이후에 있었던 동서양의 모든 철학사상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선교사상은 그 발생지인 한국에서 조차 다른 이름으로 겨우 명맥을 잇고 잇는 잊혀진 역사이다. 따라서 동서문화교류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두 번째로 만약 동서 문화교류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헬레니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을 중심으로 동서 문화교류를 논하여 헬레니즘을 정의한다면,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기인 기원전 327년경 이전에는 동서 문화교류가 없었던 것이 되며, 제자백가와 서구철학사상은 별도의 문화가 된다.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문화교류가 일어나는 것은 전쟁과 상업 등의 이유에 의한 인구이동의 경우인데, 특히 문화교류가 대규모로 일어나는 것은 전쟁이다. 전쟁에서 문화교류의 원인을 찾을 때 동양에서는 삼한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하고,  따라서 헬레니즘은 기원전 700~800여년에서 기원전 30여년 경으로 넓혀 정쟁과 인구이동의 양쪽 측면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역사에서 헬레니즘은 서구의 알렉산더 대왕에 해당한다.

따라서 제자백가시대의 문화교류 원인을 정확히 찾기 위해서는 헬레니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해설 단군신화(53) " 고조선시대 말기(삼한춘추전국시대 5 ): 제자백가와 헬레니즘" 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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