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바람 Oct 18. 2023

해설 단군신화(53)

고조선시대 말기(삼한춘추전국시대 5 ): 제자백가와 헬레니즘

  헬레니즘(Hellenism)은 삼한춘추전국시대 말기에 발생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B.C.334년)에서부터 로마의 이집트 병합(B.C.50년)까지 그리스와 오리엔트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긴 역사적 문화현상”을 의미한다.  헬레니즘이 동서문화교류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춘추전국시대보다는 제자백가시대로 명칭하는 것이 정확하다. 


 역사적으로 제자백가시대 초기에도 동서문화교류 창구로 실크로드가 있었다. 그렇다면 헬레니즘의 시작은 제자백가시대 초기의 실크로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헬레니즘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 비단길과 헬레니즘과 문화교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1. 비단길(Silk road)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는 근세 이전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의 지중해 세계를 잇던 동서 교역 루트, 또는 이러한 교역 루트를 통해 연결되었던 교역망을 이른다.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Desert)의 남북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Pamir)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총길이 6,400㎞에 달하는 길이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 1905)이 처음 사용했는데, 이 길을 통해 동서 간의 문물이 왕래했으며 비단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이 생겼다. 유사한 고대의 국제 교역로로 중국, 티베트, 인도, 네팔 등을 연결하던 차마고도가 있다.

 실크로드의 원형은 기원전 10,000년 전후 빙하기가 끝난 후, 문명이 발생하고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생겨난 몇 갈래의 교통로로서 지금까지 문명 간 교류의 통로로 기능하였다.   

    

 실질적인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8~9세기부터 만들어져 근대 이전까지 기능한 동서 문명 교류의 통로를 지칭한다. 실크로드 중 가장 중요한 길은 초원길과 오아시스길로도 불리는 사막길이다.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사막길)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나 유라시아의 유목국가들에게는 부와 국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1) 초원길


 비단길 가운데 가장 먼저 발생한 교역로로, 제자백가시대 초기인 기원전 8~9세기부터 흑해, 아랄해, 카스피해 일대에서 살던 스키타이인들이 개척하였다. 유라시아 북방 스텝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이며 선사 시대부터 이용되었다. 오아시스로가 개척되기 전부터 초기 문명 전파의 주요 통로로 기능했다.

 같은 시기 몽골 고비 사막 부근에서 흉노가 성장하면서 광활한 초원지대가 단일한 정치 체제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초원길 경영이 이루어졌다. 이 초원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흉노의 선우에게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는데, 통행증이 없다면 이 길을 우회해서 가야 하므로 신체적, 경제적인 한계가 굉장히 많이 따랐다. 그러나 흉노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의 비단이 헐값 혹은 공짜로 흉노에 유입되었고, 흉노는 이 비단을 그대로 서부 지역에 전달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2) 사막길 (오아시스길)


 가장 널리 이용되었던 비단길의 중심 루트로서, 좁은 의미의 비단길은 바로 이 사막길을 의미한다. 


 사막길의 서쪽 루트는 헬레니즘 제국 시기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파미르 고원 서쪽에서 인도 간다라 지방까지 교통로를 건설하면서 개척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헬레니즘문화에 해당하는 길이다. 


 사막길의 동쪽 루트는 제자백가시대 직후인 전한(前漢) 한 무제(武帝: BC 206~ BC 87) 때 대월지(大月氏), 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 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파미르 고원의 동쪽에서부터 돈황을 거쳐 서역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여 활성화 되었다.  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빈번히 교류하였다. 그러므로 실크로드는 상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편 많은 스님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인도의 승려들도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많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2.제자백가와 헬레니즘


 헬레니즘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저서‘헬레니즘사’에서 처음 해석해 사용하면서 생긴 용어이다. 그러나 헬레니즘에 대한 드로이젠의 이런 해석은 수정되어야 한다. 헬레니즘에 대한 이런 해석은 알렉산더 이전에 동서 문화교류가 전혀 없었다는 오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헬레니즘은 비단길의 2번째 사막길의 서쪽 루트를 통해 일어난 동서 문화교류이다.  

 헬레니즘에 대해서는 고전적으로 오리엔트 문화를 통한 그리스 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해석이다. 즉 동서문화교류로 인한 오리엔트문명의 변화와 그리스문명의 변화를 동시에 일컫는 용어인 것이다. 


 드로이젠의 헬레니즘에 대한 해석대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헬레니즘이라고 가정했을 때, 미술과 문예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전쟁 이후 “그리스의 정복지에 그리스 문화 전파를 위한 의도적인 식민 정책이 펼쳐지고, 이를 통해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가 현재 중동지방,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 지방에 퍼지게 된 점과 이 영향이 생각보다 강력해서 훗날 로마 제국이나 파르티아 제국에서도 그리스어가 널리 쓰였고, 또한 인도에서는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알렉산더가 헬레니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알렉산더에 의한 헬레니즘을 이야기 할 때 간다라미술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나라는 동양과 서양의 교차지에 있는 고대인도이다. 

 인도는 서구의 입장에서 동양 문화로의 진입로이며, 동양의 입장에서 동양문화의 마지막 보루가 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침공 루트 역시 카불을 넘어 힌두쿠시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는 북부 인도를 횡단하여 서북 일대를 석권하고, 탁실라(Taxila)와 제룸(Zerum)의 두 왕국을 붕괴시켰으며, 계속 동남쪽으로 진군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군기가 해이해지고, 휘하의 장병들은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회군을 결정한 그는 1년 후인 기원전 326년경부터 철수를 시작하였다. 

 인도는 그 넓이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만큼이나 역사 또한 복잡한 나라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외부로부터의 침략과 이리저리 쫓겨 이 땅으로 들어온 다양한 종족들이 모여 구축한 사회가 바로 인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인도 땅에서는 백인종과 황인종, 흑인종 등 모든 인종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또한 복잡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도 토착민인 드라비다인도 유럽계의 인도원주민인 인도아리아인도 모두 고조선의 신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인도의 토착민이 어떤 인종이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 인도의 주류를 이루는 인종은 드라비다어를 사용하는 아시아계의 인도토착민인 드라비드인과 인도아리아어를 사용하는 유럽계의 인도원주민인 인도아리아인이다. 인도아리아인의 아리아란 고귀한 존재라는 뜻인데, 힘으로 드라비드인을 제압한 그들은 스스로를 고귀한 존재로 각인시켰다. 아리아인이 인도 땅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인도 북부에서 발달한 인더스 문명권의 쇠퇴기를 이용해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급속히 그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이로써 인도가 아리아인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유럽계의 인도아이라인이 원주민이 되었고, 카스트제도라는 계급제도가 형성되었다. 이 말은 반대로 아시아계의 인도토착민이었던 드라비다족의 문화가 아리아인들의 문화에 흡수되었다는 설명이 된다. 


 인도드라비다족의 문화는 한국고기에 의하면 고조선 소태단군의 신교 문화와 관계가 깊다. 즉 고조선의 단군이었던 소태단군이 건너가서 왕조를 세우고 불교를 탄생시킨 지역이었는데, 당시 삼한춘추전국의 전란 속에서 고대인도에서도 16대국이 일어나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기원전 6세기부터 강성한 세력을 키워 왔던 페르시아는 인도의 서북부를 계속 침공하였으며, 마침내 서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서 기원전 327년에 인도의 서북부를 침략하여 대규모의 침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증거로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드라비다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 한글과 매우 흡사한 산스크리트어라는 학계의 연구결과도 있으며, 지난 1996년 3월 8일 중앙일보 기획시리즈 “아시아 10만리” 19편에서는 구자라트 문자에 대하여“인도 구자라트 지방의 드라비다족의 언어는 한국어와 비슷해서 무려 600 개가 넘는 단어가 같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등의 수많은 단어가 같다고 한다.”고 소개된 바 있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드라비다족의 혈통도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닌 특유의 인종으로서 한국인과 공통으로 북방계 몽골리안의 유전자(HLA-B-59)를 갖고 있다고 한다. 충청북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인골(人骨)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이 보이고, 고조선의 과하마(果下馬, pony)와 매우 흡사한 조그마한 말들이 놀고 있는 점도 공통된 모습들이다. 통상 드라비다인은 인도 아시아대륙의 토착민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메르와의 언어적 유사성이 발견되며, 신석기 시대에 토착되어 인더스강 유역에서 농경을 시작하여 인도 아대륙 전역으로 아리아인과 혼혈하면서 퍼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아리아인들은 드라비다인들과 달리 자신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안다˙지식˙지혜˙성스러운 지식˙종교적 지식을 뜻하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비드(vid-)에서 파생한 말인 베다(Vedas, véda)다. 따라서 인도의 역사는 베다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베다의 주해서이자 야즈나 의식(儀式)의 정확한 수행 방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힌두교 경전을 브라마나(Brahmanas) 또는 범서(梵書)라고 하는데, 십육대국 시대(BC 700~ BC 300)에 얼마나 많은 브라마나 문헌들이 있었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금은 최소한 총 19권의 브라마나가 현존한다. 이들 중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기초로 윤회, 해탈, 종교적·철학적 문제를 탐구한 내용은 고조선의 천도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범서 중의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교의 성전에 속해 있으면서도 브라만교의 형식적이고 폐쇄적인 교리에 대한 반하고 있으며, 훗날 자이나교나 불교가 발생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알려져 고조선의 천도사상인 신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주목되는 부분이다. 즉 고조선의 신교문화가 아리아인에게 흡수되었다는 이야기와도 같은 것이다.   


 사실  헬레니즘 문화의 가장 큰 성과는 종교가 아닌 학문에 있다. 여러 종교와 철학사상이 밀물처럼 흘러들어와 재래 종교와 철학사상과 혼합되어 광범한 종교 융합(融合)을 야기시켰다. 융합이야말로 모든 헬레니즘 문화의 기조 현상이었다. 

 헬레니즘의 중요성은 동서 문화교류로 서구권 인본주의 문화의 모태이자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 있지, 언어교류나 미술적인 부분 등에 있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 시기에 서구에서는 세계 시민주의ㆍ개인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고 자연 과학이 발달하였으며, 동양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사상이 탄생하였다.  서구의 헬레니즘에서는 개인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었고, 개인의 영혼 구제가 철학의 핵심 주제가 되어 철학이 종교화하였다. 공동체의 공적 제사(올림푸스 12신)는 이미 신앙(信仰)으로 사람들을 묶어 두지 못했고, 사람들은 구역성서의 완성을 통하여 보다 강렬한 신앙을 통한 구원의 증명을 찾았다.

 서구의 헬레니즘에서 갑자기 수학·실험과학·천문학·해부학 등의 소위 자연과학 분야에서 확실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오늘날 생각하더라도 일류급의 수많은 학자들이 뜬금없이 배출되고, 창조주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생겨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철학사상과 학문발달은 좀 더 폭을 넓혀 동양의 학문발달과 동질화하여 깊이 있게 이해하여야 하며, 헬레니즘 또한 알렉산더가 아닌 삼한제자백가에 접근하여 동서 문화교류라는 핵심적 주제를 중심으로 재해석하여야 그 진정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헬레니즘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제자백가시대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서 오늘 날의 문명문화의 바탕이 되는 수많은 학문들이 탄생하였던 이유를 통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헬레니즘에 대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라는 해석에 의해서, 헬레니즘의 기준이 되는 시기를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이 아닌 춘추전국시대로 확장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이런 해석에 의하면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은 삼한춘추전국시대 전쟁의 대미(大尾)가 되고, 알렉산더에 의한 헬레니즘은 천도사상의 변화와 인구이동을 통해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사상이 나타나 제자백가가 형성되는 동서문화교류의 완성이 된다.    


 제자백가세대 전체가 헬레니즘에 해당된다는 사실은 도로에서도 알 수 있다.  

 헬레니즘의 원인이 전쟁이나 상업에 의한 도로에 있다면, 헬레니즘의 발달 순서는 제자백가시대 초기의 초원길에서 시작되어, 제자백가시대 말기의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기에 사막길로 완성되고, 제자백가시대 직후인 전한기에 활성화 된다. 따라서 제자백가세대 전체가 헬레니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천도사상이라는 공통점으로 보면 헬레니즘시대가 제자백가시대가 되던, 아니면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기가 되던 결국은 고조선문화와 관계가 있다. 

 즉 중원을 중심으로 중국과 고조선의 관계 속에 생겨난 철학사상이 제자백가가 되고, 인도를 중심으로 서구와 중국과의 관계 속에 생겨난 철학사상이 또한 제자백가의 일부가 되며, 고조선의 문화와 동서양의 문화와의 관계 속에 동서 문화교류인 헬레니즘이 일어나서 생겨난 서양의 철학 사상들 또한 제자백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이 삼한춘추시대의 대미가 되고, 알렉산더에 의한 동서문화교류로 부터 일어난 동서양의 철학사상과 문화가 제자백가의 대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헬레니즘 시기에 동양의 수많은 철학사상은 물론 서구에서 세계 시민주의ㆍ개인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고 자연 과학과 함께 구약성서의 천도사상이 완성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기에서 제자백가시대 전체로  헬레니즘시대를 확장됨으로써, 고조선의 천도사상이 끝나고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철학사상과 함께 서양의 철학사상들이 탄생하는 동서방의 문화전환기와 일치할 수 있다. 즉 헬레니즘은 단순히 동양 내에서의 문화변화만 아니라, 동서 문화교류까지 포함하는 세계적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삼한 춘추전국을 통일하면서 제자백가 시대는 끝이 나고, 한국역사에서는 종교 나라 고조선이 멸망기에 접어들고 중국 역사에서는 본격적인 전제군주 시대가 열리며, 서양 역사에서는 오늘날 민주주의와 기독교' 천주교의 바탕이 되는 철학사상과 종교가 시작된다. 





 - 해설 단군신화(54) "삼한시대 1(고조선 멸망) : 진시황의 춘추전국 통일과 분서갱유 " 편에서 계속됩니다. -

작가의 이전글 해설 단군신화(5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