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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Mar 22. 2021

딸이 떠났다

실연의 느낌




© JESHOOTS-com, 출처 Pixabay


"나 꼭 실연당한 느낌 딱 그거예요."


그녀는 실연을 당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였다. 이 나이에 실연은 대체 누구에게 당해보겠는가. 지인은 최근에 딸을 멀리 떠나보냈다. 그 멀리는 다름아닌 유럽 국가이다. 나도 한 때 가보고 싶었던 나라. 내 딸과도 같은 그 딸을 위해 언젠가 한 번 핑계 삼아 가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 순간에도 이기적인 마음이 앞섰다.


지인은 딸을 보내는 날에도 나에게 전화해 울었고, 텅 빈 것 같은 마음이 몰려올 때에도 전화를 했다. 나도 울었다. 자식이지만 친구 같고, 엄마 같고, 언니 같고, 동생 같았다는 그 딸. 보낸 후 집에 돌아와 딸의 빨래도 며칠 째 하지 못한 그녀를 보면서 나의 친정엄마를 떠올렸다. 그런 마음이었을까. 나도 혼자서 미국에 가보겠노라고 짐을 싸고 이십 대 시절 떠나왔던 기억이 아련했다. 공항에서 내 손을 잡고 기도하던 엄마. 그 간절함과 눈물이 마음에 고스란히 와 닿지는 못했다. 그저 내가 가야 할 새로운 길에 떨림과 초조함, 설렘이 더 많았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 같다. 그 나이에는 그렇지 않은가. 엄마를 붙들고 엉엉 울어야 하는 이십 대는 아니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엄마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휴! 아주 비기 싫어요! 옷은 다 아무 데나 던져놓고. 몰라. 가든가 말든가."


지인은 딸을 유럽 보내기 1~2주 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 뜻 속에 담긴 서운함과 떠나보냄의 아쉬움은 미처 떨쳐내지 못하고 나에게 들켰다. 애써 웃으면서 뒤에 남는 그늘은 어쩌랴.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딸이라고 해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엄마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다. 알면 큰일이다.


나에게는 아직 코흘리개인 세 살 아들이 하나 있다. 아이가 어릴 뿐이지 내 나이는 만만찮은 세상의 경험이 톡톡히 녹아나 있다. 적지 않은 나이라 자식들도 대부분 크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하나둘 자식을 대학 보내며 떠나보내는 시기를 맞고 있다. 미국에서의 환경이 또 그렇다 보니 고등학교 때까지만 품에 키운다. 부모는 하이스쿨에 들어가면 졸업 1~2년 전부터 영영히 떠나보낼 만만의 준비태세를 갖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래도 아쉽다는 거다.

더 잘해줄걸. 대화를 좀 많이 해둘걸. 시간이라도 좀 같이 보낼걸.

처음에는 나에게 먼 이야기인가 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아이를 처음 학부모가 되어 학교에 등교시키는 엄마의 심정이라든가 프리스쿨 준비물 같은 말들이 더 솔깃해야 한다.


어느 날은 내 아이를 보며 벌써 사회로 떠나보낼 생각에 15년 미리 앞당기어 얼굴도 비비고 머리도 쓰다듬으며 촉촉하게 눈가가 젖어드는 경험을 했다. 그리곤 곧 소스라치게 혼자 놀라기도 했다.

이런, 이건 너무 오버잖아!

지인들, 친구들과 함께 있다 보면 내가 미래를 사는지 아니면 과거를 사는지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내 눈을 뜨고 보면 마냥 해맑은 세 살 꼬마 아이가 있다.


그래도 그런 이별의 소식에, 철없이 그리고 겁 없이 미국길에 나선 내 모습이 간간히 보였다. 지인의 눈물에 애달픈 과거 내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가서 잘하고 있어!"


그게 할 말의 전부인 양 반복했던 엄마. 외할머니도 떠나기 전 날 집에 친히 오셔서 나에게 그랬다.


"잘하고 있어야 한다!"

"네!"


대답은 정말 잘했던 것 같다. 짐을 들고 큰길로 나가는 내 뒷모습을 한참을 보며 서 계셨던 할머니였다. 어여 가라는 손짓과 함께. 사실 그 손짓이 어여 잘하고 있다가 오라는 손짓 같기도 하고 어여 잘 가라는 손짓 같기도 했다. 이제는 그 손짓조차도 그 어떤 것도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한 번 떠나보내면 안 온다."


지인의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본인이 딸네 미국으로 보내 놓고 거기 눌러사는 자식을 경험했기 때문이란다. 그것도 자식 하나가 아닌 셋을.

겨우 한 자식만 같은 지역에 머물고 있다. 지인은 친정엄마의 그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을 것 같다. 한 번 가면 그 나라에 눌러앉기 쉽기 때문에 아주 떠나보낼 때 각오를 하고 보내야 한다는.


지인의 딸도 자식을 낳고 알게 되겠지. 보낼 때의 엄마의 심정을.

딸은 또 아들과 달라서 자기 인생을 살면서 여자로서의 엄마 인생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정말 그런 날이 온다. 나는 아이도 어린데 이런 마음들이 일찍부터 깨우쳐진다. 그래서 싫기도 하고 또 좋기도 하다.


어쨌든 실연당한 느낌, 이라는 지인의 표현은 정확해 보인다.

빈 방에 들어서며 벗어 놓고 간 옷가지 하나 부여잡고 쓰러지듯 앉아서 오열하는 실연. 밤은 이미 한참 전에 왔는데 사각거리는 이불 소리는 아침까지 이어지는 실연. 아, 또 뭐가 있지. 길을 가다가도 숨이 순간 헉! 하고 막혀서 더는 못 걷겠는 실연. 밥을 씹는데 모래알같이 서걱거려 먹던 걸 다 뱉어내고 물도 먹히지 않는 실연. 일은 하는데 정신은 멍 해서 겨우 손놀림만 허우적거리다 퇴근하는 실연.

딱 그 느낌! 그리고 유럽에서 지인의 딸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화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00야, 잘하고 있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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