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추구의 플롯'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무언가 잘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잘 써지지 않을 때가 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누구도 나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말하자면 가족 외에 시험 감독관이나 자격증 따는 일 등에서 말이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쓰고 싶은 욕망은 누가 뭐래도 내 생각들을 무작정 글로 몇 자 적어보자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는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여행에 대해, 파도에 잔잔히 내 몸을 맡기듯 필사를 하며 읽어(?) 내려갔다. 아니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초입 부분만 조금, 내가 가진 펜으로 적어 내려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 하고 반짝이는 섬광이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가 말하는 ‘추구의 플롯'이란 무엇인가.
태어나 처음 듣는 언어였고, 어쩌면 내 삶을 이상과 현실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이어져 온 게 ‘이것’ 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잠깐, 그럼 여기서 ‘추구의 플롯'이란.
시나리오에서 쓰이는 언어인데, 주인공이 표면적 목표의 밑바탕에 진짜 목표가 있다는 걸 알아내는 것이다. 결국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 목표가 아닌 내면적인 목표, 그러니까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에서 이외의 깨달음을 알아가고 그 여정이 끝날 때쯤에는 주인공이 성장해 있거나 지혜롭게 변해있는 경우의 플롯, 이라고 나름 책에서 이해했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다. - 여행의 이유 본문에서>
이게 인생과 별반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작가의 정돈된 생각은 내가 여태 모르게 축적해 놓았던, 그리고 입으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나도 때로 내가 생각하는 추구의 삶을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온 적이 있었다. 여행처럼 너무나 순조롭고 계획대로 잘 될거라는 야무진 생각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작가도 그렇게 인생과 여행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행이 여행다운 건, 알 수 없는 곳에서 지도 하나를 들고(물론 지금은 그런 시대는 아니지만) 길을 헤매다 뜻밖의 장소로 가버려 더 놀라운 경험들을 할 때 그 진가가 더해진다는 데 있다.
14년 전, 파리 여행 책 하나와 지도를 들고 실제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지하철 데모로 인해 머릿속에 그렸던 시간의 배치와 장소, 즉 계획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무작정 걸어서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야만 했다. 물론 돈을 아껴 써야 한다는 이유로 편리한 교통수단은 절대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또 예상대로 길을 잃고 헤매다 파리 곳곳의 골목을 다 휘젓고 다니는 피곤함을 떠안아야만 했다. 실제로 번화하고 유명하게 알려진 장소 뒤로 유럽인들의 삶이 적나라한 골목골목을 오랫동안 걸어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더 낭만적이고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다. 그렇다. 인생도 그렇다.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보여 질질 짜며 발을 빼려는 곳에서 진짜 나 자신과 마주 서게 되는 일, 그리고 꼭 바랐던 일이 아니었어도 그 안에서 다른 만족으로 나 자신이 채워지는 그런 일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사실 <여행의 이유>라는 책도 마음에 딱 들어 필사를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더 고급진 언어(?)의 훌륭한 책을 베끼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며칠 동안 딱히 찾아내지 못하자 정말 급하게 선망의 대상도 아닌 작가(적어도 나에게는)의 생판 모르는 내용의 책을 감으로 그저 선택했을 뿐이었다. 결단을 무작정 내렸을 때는 마음을 바꿔 겨우 기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책이었다.
‘그래, 이다음 책으로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책을 잘 만날 수 있을 거야!’
그저 바라는 목표 하나를 두고, 뜻밖의 책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상황은 ‘너, 딱 걸렸어!’와 같은 상황으로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하게 찾아 온 획득의 기회는 이렇게 글을 남기게끔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결과는 매우 신선하다. 처음 필사를 시작할 때와 지금의 나는 매우 다른 태도로 이 책의 문자 하나하나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무작정 무슨 말이든, 커서가 깜빡이는 하얀 화면 앞에 마구 써 내려가고 싶은 충동은 지금의 결과로 고스란히 몇 명의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당신에게도 있는 그 추구의 플롯을 아주 사사로운 것이라도 하나 꺼내 봐!’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어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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