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턴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일정한 형태나 양식 또는 유형,이라고 나와있다.
‘패턴’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편집적 강박증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예술가 야요이 쿠사마다. 끊임없는 물방울무늬, 동그라미 패턴은 그녀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녀의 정신적인 불안이 패턴으로 위로받았다면, 우리는 그녀의 연속되는 동그라미를 통해 예술을 보고 가치를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녀의 아픔이 작품으로 승화되었다고 본다.
삶에도 이런 패턴이 있다. 바로 나에게 익숙한 것이 내면에 들어와 똑같은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오래 지속되어 온 것이기에 나도 모르게 그 패턴 안에서 안정을 느끼게 된다.
조카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가끔 그 남자친구에게 놀라곤 한다고 했다. 언니는 조카와 나눈 대화라며 이야기해 주었다.
조카 : 남친이가 서류 가져가는 거 잊지 말라며, 혹시 모르니 한 장은 가방 안에 다른 한 장은 여기, 또 저기 이렇게 넣으라는 거야! 그런데 그때 누가 생각이 났는지 알아?
언니 : 누군데?
조카 : 아빠!
언니는 예상했던 답이었다고 했다. 꼼꼼함과 다시 확인하는 버릇은 자상한 형부의 성격이었다. 왜 사람은 항상 그런 만남이 계속 이어질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저 희한한 일이라고 넘겨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패턴의 문제임을 얼마 전에 책 한 권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저자 이두형 출판심심발매2020.06.03.
바로 정신과 의사 이두형 작가의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라는 책이다. 수의사가 되려고 하다 정신과 의사가 된 사람의 책인데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을 통해 차 안에서 오며 가며 듣게 되었다. 오래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런 패턴의 반복 문제가 여럿 나온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만나는 남자마다 그런 기질의 사람을 매번 만나게 되는 사연도 그 한 예다. 도대체 자신의 인생은 왜 늘 이런 만남이 지속되는 걸까, 하며 괴로워한다. 나도 늘 살면서 그런 이유가 궁금했다. 나를 포함해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볼 수 있는 예다. 대체 왜? 귀가 솔깃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타하는 ‘패턴'이 내적으로 각인된다… 그가 만나왔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폭력적임을 깨닫는다. 패턴의 함정, 익숨함의 함정이다.
p.76
가치체계,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마음에 자리 잡는 패턴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무의식 속에 숨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을 훼방 놓는 고약한 경향성이 반복강박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잘 안된다'라는 표현도 이 패턴의 고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p.76
어떻게 하면 반복 강박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하는 해결책도 나온다.
“반복되는 슬픔의 굴레를 벗기 위한, 한 가지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있다. 바로 ‘지금은 달라졌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p.77
역시나 답은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오은영도 이 알아차림에 대해 [화해]라는 책에서 여러 번 강조했다. 비슷한 계열의 책, 그러니까 심리학 책 위주로 여러 권을 읽다 보니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이 겹치기도 한다. 그래서 다독의 좋은 점은 생각의 폭과 여러 가지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나를 알아차리려면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에 대한 ‘나'의 감정을 인정해야 해요. 부모에 대한 미움과 싫음도 인정해야 합니다…나를 알아차려야 ‘나'에게 다가올 수많은 나날을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요.”p.417
패턴과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반복되는 무의식 반복 상태에서도 타자성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바로 헤겔의 철학이다. 나를 안다는 건 타인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비로소 발견될 수 있으며 불완전성, 불확실성 속에서 결핍의 모습을 찾고 욕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 만남의 행동을 통해 나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게 그가 연구한 인간의 삶이다. 즉 패턴은 내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더 두드러지게, 무지의 감정(나의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이라든가 경험한 것들의 대본을 가지고 있고, 성인이 되었을 때도 그 대본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의 세계와 흡사한 것들, 잘 알고 있어서 익숙하고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에 끌린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 동안 아이가 미디어 시청을 할 때, 자기 전 책을 읽을 때, 미로 찾기를 할 때 틈틈이 읽었던 전자책 샤를 페팽의 [만남이라는 모험] 속에서 나는 위 본문을 발견했다. 아니 이렇게 기쁠 수가! 철학 책이었는데 심오한 인간의 삶 연구 끝에는 심리학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게 재미있다. 헤겔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의 리비도는 고등학생 때 배웠어도 ‘그래서 뭐!’라는 식으로 뜨뜻미지근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만나다니! 사뭇 새롭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카의 사람 보는 눈은 익숙함의 패턴이었고, 자상하게 잘 챙겨주는 타입이 편안함으로 다가왔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그런 모습을 보고 남자친구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는 내면의 패턴이었으니까!
“뭔지 모르게 끌렸어!”
“느낌이 좋았지!”
“말할 때 매력 있어! 그 사람 목소리가 좋아.”
“잘생겼잖아!”
“키가 커서 마음에 들었어.”
종종의 연인의 만남의 이유에는 위의 이유들 속에 숨겨져 진짜 감정을 보기 힘들다. 그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이끌렸다고 믿을 뿐이다. 만약 내 안에 나의 조카처럼 긍정의 패턴이 있다면야 문제 될 것 없겠지만, 그것이 부정적인 이미지라면 나의 진짜 감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똑같은 실수 속에 내 상황이 처해지는 것을 막고 싶다면 말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라는 책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결론을 맺는다면 이 구절이 도움이 된다.
“지금부터는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할 능력과 권리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그래야만 했었던 것'이라 믿었던 선택들의 많은 부분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면 된다. 그리고 과거의 나와는 상관없이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똑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부정적인 과거에 익숙하더라도 일찍 자신을 깨우치고 밝은 미래를 붙잡은 사람도 많다. 나는 오프라 윈프리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 유명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찾아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몇 있다. 자신과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서 이런 모습은 확연히 드러난다. 깊은 만남은 우정, 사랑 속에 있으니까.
그러면 이제 ‘나'를 생각할 때다. 나는 어떤 사람과 관계하며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얼마큼 알고 있다고 믿는가? 그래서 나와 대면하는 일은 피하지 않고 잘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