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하기,에 대해 글을 쓰라는 과제가 주어진 적이 있었다. 남들과 같은 시선이 아닌 나만이 가진 표현법으로 느껴지는 모든 감각에 대해 서술하는 건데, 생각보다 내가 그런 훈련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다 큰 성인이 묘사쓰기를 좀 못하면 어떤가, 생각했고 별일 아닌 일이었다.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가늠하는 일은 매우 사소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친 묘사를 미친 듯이 적어간 책 한 권을 알게 되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필사를 결심했다. 사실 김영하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여행의 이유]는 1/3만 베끼고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그런 내용의 책이 아닌 이유가 컸고, 아름다운 문체를 만나고 싶은 게 이유였다. 그리고 제격인 책 한 권을 찾아냈는데, 그게 바로 [자전거 여행]이다. 이 책을 밀리의 서재 전자책과 도서관 서재 온라인 오프라인 등 이 잡듯 찾았지만 내 손에 들어오는 건 힘들었다. 그러니 안달이 더 났다. 그러다 친정집 동네에서 재고를 발견하고 이곳 미국 집까지 모셔가지고 오게 되었다. 귀했다.
맛난 디저트를 눈앞에 둔 것 마냥 침이 고이고 설렜다. 드디어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김 훈 작가의 낯선 묘사가 신비로워서 문장을 외우고 싶을 정도, 라면 이해가 좀 갈까.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p.17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p17
나에게 산수유는 산수유였다. 멀리서 보면 무슨 개나리꽃 같기도 하고, 노란 게 참 이쁘게 피네, 가 전부였다면 김 훈 작가는 그 안에서 거의 신선놀음을 하고 노래 한 곡과 시도 읊었다. 그 작가의 앞에 무얼 가져다 놓아도 색다른 세계가 열릴 것만 같았다. 아, 그래서 동경이란 게 있구나! 그의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는 글을 읽고 있으면, 마흔에도 사물에 또 생명에 감탄이 이리 자연스러울 수 있구나 싶었다.
언젠가 목련꽃이 그 생을 다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툭'
정말 찐~한 무게감이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이 이어졌고, 가끔 새가 지저귀었으며, 함께 있었던 아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별일 아니라는 듯 사방은 그렇게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거기에 그저 목련도 한몫을 하며 한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내 가슴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을까. 무언가 철렁한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목련이 지는 모습은 그 이후로 피하게 되었다. 피어 있을 때는 존재감을 팍팍 내며 활짝 웃고 있지만, 거지같이 스러지는 모습은 정말 별로였다. 김 훈의 표현 중에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라는 표현은 좀 억지감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는 그 목련의 꽃짐을 통해 아, 봄이 시작되었구나, 생각했었으니까.
아무튼 그의 창의적인 생각과 표현이 만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의 통로를 열어 주기에 독자로서 나는 기쁘다.
지금은 이미 봄이 다 가고 초여름에 접어들었다. 이런 꽃 이야기가 생경하게 들리지는 모르겠으나 혹시나 자전거 여행을 하며 여름 꽃, 원추리 혹은 찔레꽃, 맨드라미, 배롱나무꽃에 대한 묘사가 있는지 계속 뒤적거려봐야겠다.
나는 김 훈 작가처럼 자전거 타기에 몰입해 본 적은 없다. 탈 줄은 아나 즐겨본 적이 별로 없다고 해야 옳다. 그저 고등학생 시절 대전 인근의 신탄진 대청호를 혼자 돌았던 기억이 있다. 미국에 와서는 워싱턴 디씨의 포토맥 강 주변으로 한두 번 돈 게 다다. 나는 왜 그 재미를 잊고 살았을까.
'아, 무슨 운동이라도 좀 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은 많이 해보았을 거다. 그럴 때마다 스트레칭 위주의 필라테스를 접했다. 몸이 워낙 굳어있다 보니 나이 들어 아차 싶을 일이 생기기도 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커서였다. 그리고 또 해보니 골반이 균형을 이루어 좋았다. 고정된 자전거 머신으로 페달을 몇 십분 돌리고 나면 골반이 틀어지는 걸 몇 번 경험했다. 가뜩이나 비틀어진 몸이 내가 익숙한 체형으로 발을 굴리다 생긴 작은 사고였다. 그리곤 그나마 조금 했던 자전거 운동도 그만두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꾸준한 골반 스트레칭과 함께 자전거를 병행하면 바른 자세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씩 이 책을 읽으며 자전거가 그리워졌다. 네 살 아이의 자전거를 보며 내 자전거도 하나쯤 가져도 되지 않을까 욕심이 났다. 내가 일곱 살 무렵에는 그렇게 옆집 친구의 자전거가 부러웠다. 친구의 엄마는 나의 사정을 알고, 일부러 아무 때나 빌려 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자전거도 없는 내가 무상으로 빌려 악착같이 그 기술을 배웠다.
"자전거 탈 줄 알아요?"
"네. 어릴 때부터 탈 줄은 알았어요."
"아, 자전거가 있었나 보다."
"아니요. 자전거를 머리털 나고 가져본 적이 없어요."
"네?"
십중팔구 놀란다. 실력이 월등히 좋지는 않지만, 기본은 편안하게 타니까. 커서 배우려 했으면 넘어지는 게 무서워 아마 더 꺼렸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지금 딱, 자전거를 가져볼 만한 시간이 온 건 아닐까? 아이 핑계로 같이 타보기나 하지 뭐, 라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