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페팽의 [만남이라는 모험]
나다워지는 일이 나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온전히 내 속에서 끙끙대며 혼자 앓아야 하는 장염이나 독감 같은 건 줄 알았다. 마침내 약 기운이 돌아 차츰 기력을 회복하게 되면 답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지 그것만 쏙 빼고 생각했다. 답은 하나였다. 바로 ‘만남'. 만남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소통이 되어야 비로소 ‘만남'이 된다. 스치는 게 만남이 될 수는 없다. 관계하는 게 만남이다.
최근에 넷플릭스를 몇 편 보았다. 그중에 [팬텀 스레드]를 보며 사람과 맺는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마침 그때 나는 샤를 페팽의 [만남이라는 모험]을 읽던 중이었다. 저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평생 경험하게 되는 모험의 중심에 ‘만남'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하고, 마주침이 필요하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의지가 되기도 한다. 위 영화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런던 왕실과 사교계의 드레스를 만드는 의상실 우드콕 디자이너 ‘레이놀즈'와 젊은 식당 종업원인 ‘알마'와의 만남이 나온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통해 창의력을 발산시키고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랑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예술가와 뮤즈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새로운 발상의 예술적 감을 주지만 거슬리는 부분도 많다. 예를 들면 먹을 때 소리 내는 일 등이다. 그럴 때마다 싫은 티를 팍팍 낸다. 알마는 이런 사랑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더 빠져들어가고 결국 레이놀즈가 자신만을 의지하게끔 만드는 영화다. 두 인물은 만나면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서로에게 깊은 영향력이 행사되었으며 그들 각자가 서로를 만나며 변화했다.
“때로 타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그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도 하는 법이다.” p.73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p.91
나의 시각으로는 레이놀즈가 소시오패스적인 사람으로 판단된다. 필요할 때 취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내치는. 예술가나 정치가 어디에든 소시오패스들은 많다. 단지 이 영화에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이상한 만남과 사랑, 결혼 속에 각자의 ‘나 자신'이 녹아 있다는 거다. 나는 평론가는 아니다. 단지 내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일 뿐이고 해석이다. 느낀 대로 말하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이렇듯 나를 보는 관점으로 바뀌면 영화는 또 색다른 해석이 된다. 레이놀즈는 끊임없이 엄마에 대한 사랑 갈구가 있다. 자신이 십 대 시절에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서 아이 같은 모습이 나온다. 누나 시릴은 그를 늘 돕고 있다. 엄마, 그리고 누나, 그다음은 알마로 마음의 이동을 보인다. 알마를 통해 비로소 내적으로 갈팡질팡 떠돌던 모습이 안착된다. 그것은 ‘나 자신'으로의 변화다. 알마도 마찬가지다. 식당 종업원으로 있던 그녀에게 새로운 만남이 찾아왔고, 그 만남이 더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있는 재능과 끼 그리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의 ‘나'가 아닌 것이다. 새롭게 탈바꿈되었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식당에서의 그녀만 보았더라면 이후의 모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 누구세요?”를 외쳤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것이 깊은 사귐일 경우 더하다. 우정이든 밀접한 관계이든 매일 보며 대화하는 관계이든 말이다. [만남이라는 모험]에서도 영화나 책 속 주인공을 예로 많이 들었다. 피카소의 이야기도 나온다.
“피카소는 주로 여인들의 육체와 얼굴을 그림에 담았지만, 엘뤼아르를 만난 후 사회적인 투쟁에 동참하게 되면서 여인의 초상화 속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엘뤼아르와의 만남이 피카소로 하여금 불러일으킨 변화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던 그런 인간적인 유약함까지 드러나도록 베일을 벗긴 것이다.” p.154
저자는 좋은 만남은 나를 성장시키고 과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나란 존재를 세상 밖으로 활짝 펼쳐지게 만든다고 했다. 물론 만남에는 나쁜 만남도 있다. 먼 길을 돌아 제자리에 오더라도 어떤 만남이든 우리는 타자성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나를 나답게 이끄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한다. 혹시 다른 예들을 더 듣고 싶다면, 샤를 페팽의 책을 추천한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나다워지는 것에 마지막 기여를 했던 건 책이었다. 책 속의 만남을 통해 진지해졌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으며, 나의 생각이 단단해져 가는 것을 목격했다. 한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굉장한 것은 없다. 게다가 절제되고 뼈를 깎아 만든 문장과 생각이라면 더더욱 듣고 싶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