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서로가 무엇을 먹을 건지 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성격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지난번 친구 M을 만났을 때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물론 나는 듣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진짜 먹는 거에 목숨 안 걸고 아무거나 다 괜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열정 다해 말하는 M에게 힘 빠지는 소리를 툭, 건넨 셈이었다.
설명은 이랬다. 식사 메뉴를 정할 때 항상 뭘 먹든 상관없다는 듯 일관하는 사람이 받는 피해는 선택의 권한에서 제외된다고 말이다.
“나는 상관없어. 먹고 싶은 거 정해.” 나는 주로 이런 말의 대표주자였다. 뭐 먹을까? 물을 때 아무거나 정말 괜찮은 사람. 그런데 이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나중에는 결정권도 없이 늘 남의 말에 따라다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M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을 먹든 상관없거나 먹는 일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상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어느새 슬쩍 결정권은 상대에게 가 있고, 무의식으로 그 사람은 무얼 해도 상관없는 사람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문제라고.
사실 이런 대화는 연애하면서 많이 생긴다. 대부분 배려 차원에서 남자가 여자의 말을 들을 때가 많고, 나중에는 식사 선택을 온전히 여자가 떠맡아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여자의 입장에서 이런 남자는 처음에 좋은 것 같아도 시간이 오래되다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불만이 쌓이게 된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많은 연애를 한 건 아니어도 대부분 선택 면에서 남자들이 한발 물러나는 태도 때문에 속이 터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나 온 모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길치인 데다 무엇을 먹든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니. 그렇다고 내가 똑 부러지게 나의 주장을 펴며 남을 리드하는 사람의 타입이 아닌 게 더 문제였다. 나도 버거울 마당에 남의 선택까지 떠안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상대를 가볍게 본다거나 어쩌다 하는 그들의 생각이나 주장을 박탈시킨 적은 없다. 어쨌든 만나는 사이 시간은 그럭저럭 흘러갔고, 내 옆에 남아있는 R은 함께 무엇이든 조율하며 서로를 배려하기도 하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가정에서 결정권 행사자가 구분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부엌일에 대해서는 내가 우선권이 많다. 무엇을 고르고 살지 혹은 물건을 놓는 위치적인 부분에서 압도적인 나의 취향을 발휘하게 된다. 거실이라면 상의를 해야 하는 부분이고, 아이의 방은 아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물어가며 꾸미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선택의 양과 그에 대한 책임이 많아진다는 소리다. 그 안에 ‘좋아함'을 넣는 일은 이렇게 서로에게 삶이 된다.
처음으로 돌아가 메뉴 선택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생각이 변했다. 메뉴를 상대에게 늘 미루고 나는 무얼 먹든 괜찮다는 건, 나의 권한이 사라진다거나 ‘그들’ 머릿속에 내가 쉽게 정리되는 건 아니라고. 실제로 종종 만나는 에이미는 자기 취향을 드러내지도 않고 늘 밋밋한 사람이다. 자신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또 잘하는 게 뭔지 마흔이 넘도록 잘 모르겠단다. 그건 아직 자신에 대해 발견이 덜 된 것뿐이다. 내가 나이가 좀 더 많다고 충고나 꼰대 같은 지침은 싫었다. 단지 에이미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관찰했고, 흘려 말하는 것조차 새겨들은 다음, 만남이 있을 때마다 그녀의 기호를 선수 쳤다.
자신이 주장을 잘 하지 않는다고 권리가 빼앗기는 만남이라면(그게 회사이든 친구이든 모임에서든) 글쎄 조금 생각해 볼 만한 사이가 아닐까. 사회생활을 하는 회사에서도 밥은 좋은 사람들끼리 뭉쳐먹는다. 아무거나 정말 괜찮은 사람이 상대의 메뉴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먹는 일은 즐거울 것이고, '가뭄에 콩나듯'이라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사이는 좋은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