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를 잃어도 나는 여전히 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있었다.
“정은아!” 하고 부르자,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가에 웃음을 지었다.
“나, 내 이름 누가 불러주는 거 정말 오랜만이야. 너무 벅차고 좋아.”
정은이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시댁과 함께 사업을 꾸려가는 사람이었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늘 “○○엄마, ○○엄마”로 불리고, 집안에서는 “사모님, 작은 사장님”으로 불리며 살았다. 정은이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내려놓은 채 살아온 것이다. 나에게는 언제나 그냥 ‘정은’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이름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엄마’라는 정체성은 언젠가 내가 가져볼 또 다른 이름쯤으로 생각될 뿐이었다. 그런데 정은이를 보며 깨달았다. 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데, 아무도 그녀를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다니. 결국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건, 친구구나 하고.
나 역시 아이를 품게 되면서 ‘엄마’라는 이름을 처음 얻었다. 임신 막달, 한국 마트에서 낯선 아주머니가 “저기, 애기 엄마!” 하고 부르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드디어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는 증거 같았다. 그날 기분이 좋아 아주머니가 파는 떡과 붕어빵을 한 아름 사 들고 집에 돌아오던 기억은 오래 남아 있다.
그 후 나의 ‘엄마 계정’은 활발히 작동했다.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고 싶어 사진을 찍고 글을 올리며 SNS에 열심히 매달렸다. 알림창은 늘 분주했고, 다른 엄마들의 게시물도 쉼 없이 올라왔다. 반짝이는 아이들, 멋지게 차려입은 가족, 여행지와 맛집에서의 웃음. 그곳에는 빈틈도, 흔들림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계정 너머에는 다른 얼굴들이 있었다. 미혼모 보호센터에서 만난 아이들은 화면 속 아이들과 달랐다. 초겨울에 여름 샌들을 신은 아이, 웃고는 있었지만 눈빛이 공허하던 아이, 장난감이 앞에 있어도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던 아이. 그 풍경은 SNS 속 ‘완벽한 나라’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만약 그 계정이 사라진다면? 반짝이던 기록이 지워진다면? 그 뒤에 남는 얼굴은 누구일까.
그때 떠오른 작품이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였다. 히치콕이 영화로도 만든 이 고전 속에서, 주인공은 늘 남편의 죽은 전처 레베카와 비교당하며 위축된 삶을 살았다. 마치 우리가 SNS 속 화려한 계정들과 비교하며 불안해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완벽한 여자가 아니었다. 겉으로만 화려했다. 마찬가지로, 미디어 속의 누구도 완벽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저마다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아이디를 잃어도, 계정을 내려놓아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고, 이름 없는 호칭 속에 묻히지 않고, 끝내 나 자신으로 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