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이 시린 봄
미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사실 며칠 동안의 밤잠을 설치며 내린 결론이었다.
아버지는 혼자 많은 밤을 고민하며 보냈다. 가끔 짐이 장난스럽게 "같이 미국 가자"고 말했을 때,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고 했다.
얼굴이 하얀 사람들이 사는 나라는 어떤 곳일까. 거리마다 크래커, 초콜릿, 사탕이 넘쳐나고, 어느 골목에서는 짐이 종종 부르던 '모나 리사'가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마따와 짐이 아버지를 사랑스럽게 그러안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는 몇 번이나 상상했을 것이다. 식탁 위에는 먹을 것이 넉넉히 있고, 따뜻이 누울 공간까지 있는 집.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에게 남겨진 마지막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할머니와 여동생이 겹쳐 보였을 것이다. 북에서 다른 배를 타고 내려와 자기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완강히 붙들었다. 아니, 아버지는 평생을 그렇게 붙들린 채 살아야했다. 가족을 만나야했다. 그래야 미국으로 가지 않은 이유가 '다행'으로 남을 테니까. 살아남는다는 건 그때는 곧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으로 남았다.
짐이 떠난 것은 1951년 봄이었다. 부대는 재배치 명령을 받았고, 일부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방이 꽃으로 물들었을 그 봄. 아버지의 마음만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나는 가을을 안 타는데, 이상하게 봄만 되면 가슴 한쪽이 시려."
늘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맴돈다. 겨울 내내 푸석했던 얼굴은 봄이면 윤기가 돌고 붉은기가 돌아야 했지만, 오히려 더 생기를 잃어갔다. 이제 와 되짚어보니 그 이유가 분명했다.
"그때는 바람도 다르더라. 미군들이 떠나고 나니까, 냄새도, 말소리도, 웃음도 다 사라졌어."
아직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짐이 떠난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부두를 떠나면 정말 끝이 될 것 같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무렵, 주변 사람들은 남쪽으로 계속 피난을 갔다. 어떤 이들은 서울 근처로 흩어졌지만, 아버지는 그 자리에 남았다. 짐이 떠난 뒤, 그는 남겨진 미군 트럭을 닦고, 버려진 통조림을 모아 끼니를 때웠다. 가끔은 항만 창고에 들러 하역꾼 일을 하기도 했다.
창고는 언제나 눅눅했다. 밀가루와 기름, 녹슨 철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자루를 옮겼다. 'U.S ARMY'라 찍힌 포대 속에는 옥수수 가루가 들어 있었고, 찢어진 포대에서 흘러나온 가루를 모아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미군의 담배 한 갑과 통조림 한 통 한 통을 모아, 걸어서 삼사십 분 걸리는 송현 자유시장에 내다 팔았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발이 커져 너덜너덜해진 신발 대신 새 신발 한 켤레를 샀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 발이 커지니까 신발을 자주 바꿔줘야 한다며 새 신발을 사주던 아버지. 말이 신발이지, 공주님 같은 샌들과 핑크색 운동화까지 다 갖추고 살았다. 열세 살 소년이 스스로 번 돈으로 산 그 신발 한 켤레는 얼마나 기뻤을까. 문득 그 장면이 내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역일이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아버지는 대뜸 말했다.
"여름에는 창고마다 썩은 물 냄새가 가득했어. 겨울이면 손가락이 얼어붙어 로프조차 잡을 수 없었고. 손바닥이 다 짓무를 정도니. 포대 무게만도 스무 킬로에서 쉰 킬로그램은 됐지. 어린 게 그걸 들고 날랐으니까. 형님들이 '아우, 힘들다' 하며 도와주곤 했지. 처지를 아니까 서로 '형님', '아우'하며 잘 지냈어. 아무튼 한참 자랄 나이에 내 키가 난장이 똥자루마냥 작은 것도 그때문이지 않겠나?"
아버지는 말하다 말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힘겨움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의 자부심과 씁쓸한 회한이 뒤섞여 있었다.
'하역꾼'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닌 하루하루를 버티는 생존자였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여동생이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고, 그 믿음만이 노동에서 그를 버티게 했다.
'하우스보이'였던 시절에서 이제는 어른들 사이에서 일당을 받는 막노동꾼으로 성장한 아버지를 상상했다. 맨손으로 일하며 사계절을 견뎌야 했던 소년. 밀가루, 옥수수, 분유, 담배, 그런 구호물자를 운 좋게 받아 먹기도 하며,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팔아 근근이 살아갔던 모습.
아버지는 그렇게 2년을 넘겨 일했다고 했다.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어느새 열네 살이 된 아버지는 복구되는 풍경 속에서 창고와 시장을 오갔다. 제철에 맞는 옷을 입고, 여름 신발과 겨울 신발도 따로 살 수 있게 된 그 시절의 아버지가, 내겐 한없이 기특하고 대단한 소년으로 비쳤다.
아버지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가 그를 따라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오래 묵혀둔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내가 짐을 따라가지 못하게 한 존재라도 되는 듯 마음이 저려왔다. 그랬다면, 정말 그랬다면 아버지는 행복했을까. 이상하게도, 아버지에게 미안한 세월을 안겨준 것만 같아, 딸인 내가 오히려 아버지의 어깨를 조심스레 두드려 주었다.
따라가지 않은 아버지의 결심은 옳았을까. 그 질문은 단지 과거를 묻는 게 아니었다. 나를 향한 물음이기도 했다. 그날 내내, 나는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뒤로도 종종 그 봄의 이야기를 꺼냈다. 때로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또 어떤 날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하게. 시간이 흘러도 아버지 안의 봄은 끝나지 않았다.
"그때 엉클 짐이 웃었지. 나보고 같이 가자고... 그 얼굴이 아직도 떠올라."
그 말은 어느 날 식탁에서도, 어느 날 밤 잠결에서도 흘러나왔다. 마치 머릿속 어딘가에만 그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람처럼.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아버지에게 전쟁은 끝난 적이 없다는 걸. 그의 시간은 여전히 그 항구, 그 창고, 그 밀가루 냄새 속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는 종종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길을 잃었다. 치매 초기였다. 어느 날은 “짐이 오늘 왔어”라며 창밖을 가리켰고, 또 어떤 날은 “배가 떠난다”며 신발을 신으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없이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끝엔 아직도 미군 창고의 차가운 로프 자국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아버지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일생을 붙든 결심의 잔재였고, 동시에 오래된 전쟁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 기억이, 조금씩 아버지를 데리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만이 아버지 안에서 살아 있는 ‘현재’였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버지를 천천히 그 봄으로 되돌려보내고 있었다.